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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그것도 우리나라의 제주도에서만 들을 수 있는 특별한 소리가 있다.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물 밖으로 올라와 가쁘게 내쉬는 휘파람 소리 '숨비소리'가 그것이다. 이 책의 표지에 보이는 사진 속 해녀 할망이 지금 힘겹게 숨쉬고 있는 소리다.

제주도나 우도의 해안가를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청명한 파도 소리에 섞여 신묘한 소리가 들려 온다. 해녀 할망들이 힘든 물질을 하면서 내는 숨소리로, 나 같은 육지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한 이 소리는 한 번 들으면 잊지 못할 정도로 머리속에 깊이 남는다.

동네 도서관의 서고에서 제주도 여행 관련 책을 훑어보다가 담박에 눈길이 가는 책을 발견했다. 책의 제목도 그렇고 무엇보다 표지에 있는 한 장의 사진이 숨비소리가 들려오는 듯 가슴속에 파고든다. 제주도에 여행을 갔다가 해녀들이 물질을 하는 일터를 목격하고 숨비소리까지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눈에 꽂히는 사진집이다.

<숨비소리-우도 해녀> 이성은 사진집
 <숨비소리-우도 해녀> 이성은 사진집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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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끄뜨레 하기엔 하영멍 당신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촬영을 시작한 나는 고함치는 해녀들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고 피하다, 찍다, 욕먹다, 뒤돌아서다를 반복했다. 해녀들의 목소리는 짧고 강렬한 어조로 빨리 말해서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 칠순 해녀들의 갖은 사연과 제주 사투리를 이해하기란 한라산처럼 높았다. 만날 때마다 이전 같지가 않고 새로운 각오가 필요했다. - 본문 중에서

육지 사람들이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가까이에서 듣는 것은 금기로 느껴질 만큼 괜히 카메라를 들고 분별없이 그녀들을 찍다간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우도의 어느 바닷가에선 해녀 할망을 배웅하고 마중을 나오는 하루방에게 카메라를 뺏기는 관광객도 보았다. 하긴 자신의 삶과 애환이 오롯이 녹아있는 일터에 불쑥 들어와 마음대로 촬영하는 걸 누가 좋아하겠는가. 작가 이성은은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농사일을 거드는 등 해녀들과 동고동락하고서야 비로소 숨비소리를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 <숨비소리-우도해녀>의 저자이자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성은은 숨비소리와 해녀들의 삶을 담기 위해 제주 우도에 7년을(2000년~2007년)을 오가며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제주 성산읍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로 유명한 고 김영갑 작가가 자연주의라는 고매한 앵글로 제주를 표현했다면, 이성은 작가는 좀 더 제주민의 삶에 밀착한 치열함으로 제주를 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좀년 애기 나 사을이믄 물에 든다

제주의 어느 해안가에서 'ㅈ·ㅁ녀의 집' 이란 간판을 본 적이 있다. 궁금해서 안에 들어가 물어보니 해녀란 뜻이고, 좀녀라고 읽는단다(좀녀는 잠녀(潛女)의 제주 사투리). 바다에서 물질하는 여자를 해녀라고 부른 것은 일제 침략기 때 일본인들이 해녀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통용된 것인데, 원래 제주도에서는 좀녀라고 불렀다.

바닷속에서 몇 분이고 숨을 참아야 한다. 해산물들을 하나라도 더 찍어올리려면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숨이 목젖까지 차오르고 마침내 정수리까지 차올라 죽음의 문턱이 아른거릴 때까지. 좀녀 할망은 그렇게 참았던 숨을 마침내 내쉬는 거다. 그 숨소리가 바로 숨비소리다. 죽음의 문턱에서 한 숨 돌리고 다시 죽음 같은 삶으로 귀환하는 그런 한숨소리인 거다. 숨비다는 말은 좀녀가 물질하러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니 정녕 그렇지 않은가.

육지 여성들에게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이라는 말이 있다면, 제주 해녀들에게는 '물 아래 삼 년, 물 우이 삼 년'이라는 말이 있다. 운명 같고 굴레 같은 해녀들의 척박한 삶을 이르는 속담이다. '좀년 애기 나 사을이믄 물에 든다'고 할 정도니 이 섬에서 태어난 여성의 운명은 참 가혹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여자로 태어난 죄(?)로 고단한 일상을 멍에처럼 짊어진 해녀들의 삶이 담긴 사진들을 찬찬히 보자니, 초인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강인한 여성성과 함께 애잔한 슬픔이 밀려오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해녀는 농사일도 하고 겨울에도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여인의 상징이다.
 우리나라의 해녀는 농사일도 하고 겨울에도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여인의 상징이다.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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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

이웃 일본에도 해녀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해녀와는 다른 점이 있다. 제주의 해녀들은 겨울에도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한다는 것이다. 겨울 바다라 하면 왠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한 겨울 바닷속에 들어간다고 생각만 해도 오들오들 춥다.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말이다. 이렇게 강인한 우리의 해녀들은 일본으로 원정 물질을 하러 가기도 했다. 

거친 숨결소리, 바다보다 더 거칠고 바다보다 더 깊은 한숨소리, 삶과 죽음의 바다를 자맥질하는 심연의 소리를 그녀는 들려주었다. 그 소리를 눈으로 듣고 있자니, 문득 사진 뒤에 숨어있던 또 다른 숨비소리가 숨가쁘게 다가왔다. 저 사진은 그러니 삶과 죽음이 하나로 겹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제주에 가본 사람은 푸른 바닷가 주변에 계절에 따라 마늘, 양파, 무 등을 심어논 밭을 보았을 것이다. 해녀들은 물질 외에 이런 밭일도 거들어야 했으니, 어쩔 때는 도대체 남자들은 어디에서 뭐하는 것인지, 왜 해녀만 있고 해남은 없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해보기도 했다.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고 싶다'는 제주의 속담이 수긍이 간다.   

바닷속에서는 한 마리 인어처럼 유연하고 재빠른 해녀 할망이 물질을 마치고 육지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뽀글뽀글 파마 머리에 허리 구부정한 모습이 놀랍게도 내 어머니의 모습과 너무 닮아서 친근하게 느껴지며 가슴 한 구석이 찡했다. 제주의 해녀는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일하고, 아픔을 부득부득 견디고, 바쁘면서도 느긋하며, 그렇게 함께 어울려 사는 우리네 이웃 아주머니들을 닮았다.

책의 말미에 여러 장에 걸쳐 해녀들이 물과 뭍을 오가며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직접 쓴 내용이 이채롭다.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남편 이야기, 일제 치하 땐 돈을 벌기 위해 멀리 일본까지 물질하러 가야했던 일... 뭉툭한 글씨로 짧디 짧게 썼지만 어떤 위인전보다 길고도 짠하게 마음속에 남는다.   

숨비기꽃 / 최원정

토산 앞바다, 법환포구
주상절리 가파른 언덕까지
바닷가 짠 내음을 맡으며 살아가는
질긴 목숨, 해녀의 꽃

꽃잎 비벼 귀 막고
잎 따서 물안경 닦아
함께 자맥질하던
아름다운 여인의 꽃

어디서 들리는가
아득한 숨비소리

잠녀(潛女)의 영혼으로
피고지고 피고지고
지칠 줄 모르는
저, 바닷가의 폭동


숨비소리 - 우도 해녀

이성은 지음, 눈빛(2007)


태그:#숨비소리, #이성은, #제주도, #우도,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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