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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A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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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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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장 선생님이, 학생회장 선거 TV연설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한다면 방송 중에 TV를 꺼버리고, 강제로 후보를 사퇴시킨다고 했습니다."

경기도 성남시 소재의 A고등학교에 다니는 2학년 S군은 지난 18일 위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학내 여러 교실에 부착했다. 학생부장 교사 등 학교 측 몰래 감행한 일이다. S군의 '도발'은 괜한 게 아니다. 유인물 부착 이전에 학교가 학생이 발언할 내용을 사전에 검열·삭제했기 때문이다.

S군은 지난 19일 진행된 A고등학교 학생회장단 선거에 회장 후보로 나섰다. 그는 정책 공약으로 '학생인권조례의 학내 실현을 위해 노력'을 당당하게 내세울 예정이었다. 학내 TV유세에서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어깨에 두르는 띠에도 '학생인권조례'를 새기려 했다.

하지만 S군은 자신의 핵심 공약을 말하지 못했다. 어깨띠에도 '학생인권조례'를 새기지 못했다. 학교 측은 방송 유세 연설문을 사전 검열했다. 그리고 S군을 따로 불러 이렇게 삭제를 지시했다고 한다. 

"학생인권조례 언급하면 TV 꺼버리고, 후보 사퇴시키겠다"

"학생인권조례는 아직 경기도교육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니 연설문에 쓸 수 없다. 다른 공약에서도 학생인권조례를 언급하지 말라. 미래지향적인 내용은 지우고 이룰 수 있는 공약만 써오라."

우선 S군은 학교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연설문도 다시 써서 제출했다. '학생인권조례' 단어가 쏙 빠진 연설문은 '검열'을 통과했다. 그래서 지난 14일 방송 연설을 했다. 하지만 S군은 괴로웠다.

'교육감은 물론이고 사회 대다수 구성원이 말하는 학생인권조례를 정작 학생이 언급할 수 없다니...' 

경기도 성남시 A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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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결국 S군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방송 연설 등 사전 검열에 막혀 하지 못했던 자신의 목소리를 문서로 만들었다. A4 한 장 분량으로 길지 않았다. S군은 문건에 이렇게 썼다.

"(학교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현재 통과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학생 여러분들에게 학생인권조례안을 알려주는 행위를 강제로 막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납니다. 저는 강제로 (후보) 사퇴시킨다는 말을 듣고 학생인권조례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어 S군은 "나를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TV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알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끝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승리를 위해 한 발 뒤로 갔을 뿐이고, 내가 당선된다면 학생인권조례 실현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또 S군은 이렇게 적었다.

"학생들이 머리가 조금 길다고 공부를 못하고, 머리가 아주 짧다고 공부를 잘한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또한 여학생들의 치마가 조금 길다고 공부를 잘하고, 치마가 아주 짧다고 공부를 못하는 과학적 증거 역시 없습니다. (중략)

제가 이 글을 돌리는 것이 학생부 선생님들께 걸린다면 저는 강제로 사퇴를 당합니다. 두발 자유, 8교시 자유, 야간자율학습 자유를 하고 싶지 않다면 즉시 제가 쓴 글을 갖고 학생부장 선생님을 찾아가세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와 함께 학생 인권을 찾고 새로운 명문 OO고교를 만들기에 동참하고 싶다면 저를 뽑아주십시오."

교감 "공약 사전 검토했지만, 후보 사퇴 강요는 사실과 다르다" 

S군은 A고교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 학교 교사들은 "그냥 지금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는 학생이다"고 말했다.

S군도 문건에서 "선생님들의 말만 잘 따르면 좋은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다"며 "내가 편한 길을 버리고 학생회장에 출마한 이유는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학내 교실에 부착한 S군의 문건은 학교에 발각됐다. S군은 학교 허락 없이 '불법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사과문을 써서 학교에 제출했다. S군은 사과문에 "학생부장 선생님을 비방해 내 지지도를 올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며 "인권을 찾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적었다.

2010년 1월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서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조례 제정 취지에 대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2010년 1월 19일 오후 경기 수원시 경기도교육청에서 열린 '2010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종합 공청회'에서 참석한 학생과 학부모들이 조례 제정 취지에 대한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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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군은 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리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될 것이라는 통보도 받았다. 하지만 학생의 연설문을 사전에 검열하고 '학생인권조례'라는 단어 사용을 금지한 것 자체가 학생인권 침해라는 지적이 많다.

경기도교육청 쪽은 "학생인권조례 언급 자체를 막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만약 '학생인권조례' 단어 삭제와 학생회장 후보 강제 사퇴 언급이 사실이라면 학교에서 반교육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현재 A고교는 S군의 주장을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후보 강제 사퇴' 부분은 S군과 학교 측의 주장이 다르다.

A고교 김아무개 교감은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의 공약을 사전에 검토해 연설문에서 학생인권조례를 뺐고, 한 교사가 '방송연설에서 학생인권조례 언급하면 TV를 꺼버린다'는 말을 한 것도 사실이다"며 "하지만 후보 사퇴 강요는 학생과 해당 교사의 주장이 다르다, 교사는 '그런 말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A학교 "아빠 없이 자라서인지 자존심 강해... 후보 사퇴 언급 안 했다"

김 교감은 "학생 공약을 (학교에서) 사전에 손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논란이지만 (우리는) 교육적 차원에서 지도할 수 있다고 본다"며 "아직 의회에서 통과도 안 됐는데, 학생인권조례 실현을 이야기하는 건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이라 '현실적으로 언급하라'는 이야기를 S군에게 했다"고 밝혔다.

또 김 교감은 "S군이 모자가정에서 아버지 없이 살아서 그런지 자존심과 자신감이 강하다"며 "선생님의 몇 마디 말에 자존심에 상처 받고 (태도를) 확 돌려 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S군이 이 학교 안 다닐 것도 아니고, 앞으로 선생님들을 계속 봐야 하니 원만히 잘 해결되는 게 좋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A고교의 많은 학생들은 학교 측의 연설문 사전 검열과 '학생인권조례' 단어 삭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6.2지방선거를 앞둔 지난 5월 10일 민주진보진영 수도권 교육감 예비후보인 김상곤(경기도), 곽노현(서울), 이청연(인천) 후보가 서울 종로구 건강연대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제정 등 학생인권신장 정책협약 체결식'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차별, 억압, 경쟁, 폭력을 극복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6.2지방선거를 앞둔 지난 5월 10일 민주진보진영 수도권 교육감 예비후보인 김상곤(경기도), 곽노현(서울), 이청연(인천) 후보가 서울 종로구 건강연대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제정 등 학생인권신장 정책협약 체결식'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차별, 억압, 경쟁, 폭력을 극복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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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A고교 앞에서 만난 2학년 B군은 "학교는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교육적 차원'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데, 자세히 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비교육적인 일이 많다"며 "많은 교육감 후보들이 지방선거에서 했던 이야기를 왜 학생들은 하면 안 되느냐"고 꼬집었다.

또 2학년 C양은 "교육적 차원에서 S군을 지도했다면, 학교의 책임 있는 분들은 당장 경기도교육청을 찾아가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하고 있는 김상곤 교육감부터 지도, 선도해야 할 것"이라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학교가 가장 '후지게' 나간다"고 말했다.

학생들 "교육적 차원에서 검열·삭제? 그럼 교육감부터 지도하라"

한 무리의 3학년 학생들은 "우리 학교는 점심 때 축구도 못하게 한다, 연설문 사전 검열은 아무것도 아니다"며 "우리는 곧 '지옥' 같은 학교를 떠나지만 후배들이라도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많은 학생들은 A고교 학생회장 선거에서 직접·비밀·평등의 선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A고교는 지난 19일 진행된 투표에서 학교홈페이지에 가입된 학생에게만 투표권을 줬다. 또 담임교사 컴퓨터에서만 전자투표를 하게 했고, 일부 교실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의 투표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학년 P양은 "선생님이 내 투표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불쾌했는데, 특정 후보 찍는 걸 보고 '너 진짜야?'라고 물어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은 작년부터 "헌법이 보장한 권리와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가 교문 앞에서 막히면 안 된다, 학교 안에서도 인권이 자유롭게 흘러야 한다"며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두발 자유, 야간자율학습 학생 선택권 보장 등이 담겨 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당선인은 '경기도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곽 당선인 역시 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을 약속했다. 이밖에 진보 성향의 강원·전북·전남·광주 교육감 당선인들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뜻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A고교 사례처럼,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교문 앞에서 막히고 있다.


태그:#학생인권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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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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