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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에 스미다>(아트북스,2010)
 ├ 글 : 민봄내
 └ 책값 : 13800원

잘 놀던 아이가 잠이 듭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쉴새없이 뛰고 놀고 노래하고 말하고 하던 아이가 까무룩 잠이 듭니다. 더운 날씨에 물놀이를 시키니 한 시간이 넘도록 물에서 나오지 않고 놀려고 하더니, 물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옷을 입히니 이 더운 날씨에 양말 신겨 달라며 칭얼거리다가 한쪽 발에 꿰어 주니 어느새 큰 베개에 제 몸을 넙죽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듭니다.

잠이 든 아이를 삼십 분 즈음 그대로 둡니다. 삼십 분이 지나고서야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는 살짜이나마 깨어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채 두 시간 반이 넘도록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이맘때는 애 아빠가 비로소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동네마실을 다니든 할 만한 말미인데, 그렇다고 애 아빠 스스로 뭔가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른 새벽에 아이가 깨어나기 앞서 일어나 주섬주섬 이 살림 저 살림 하는 가운데 하루 내내 아이랑 씨름하며 지내다 보니, 아이가 늦은 낮잠을 자는 이때에는 애 아빠도 고단하고 지치기 때문입니다. 드러누운 아이 옆에 함께 드러누워 늦은 낮잠을 함께 자고 싶습니다.

.. 나의 아빠 또한 딸에게 처음이고 싶은 게 많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기장에게 박수를 보내는 에티켓, 정찬을 먹는 순서, 두 발 자전거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셨고, 막걸리 넣은 밀반죽을 아랫목에 묻었다가 찐빵이 돼 가는 과정도 보여주셨다. 그네를 탈 때 뒤로 나뒹굴지 않는 요령과 어린 동생을 돌보는 법, 어른들에게 꼭 인사해야 하는 이유와 동물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울지 않는 뚝심까지. 하지만 공식적인 어른이 될 때까지 난 그것들을 스스로 익혀 왔다고 여겼다 ..  (55쪽)

놀고 뛰고 하는 우리 집 아이.
 놀고 뛰고 하는 우리 집 아이.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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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잠든 아이가 쉬를 했습니다. 날이 더워 낮잠 잘 때에는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더니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천으로 오줌자리를 훔칩니다. 아이한테 새 바지를 입힙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기계빨래를 하는 분들은 빨랫감을 모아서 할 텐데, 손빨래를 하는 사람도 하루치 빨래를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날도 있으나, 으레 그때그때 빨래를 해서 널어 놓습니다. 요사이처럼 더운 날은 일부러 손빨래를 자주 하며 몸을 식힙니다.

다 한 빨래를 빨랫대에 널어 놓습니다. 아이 오줌으로 젖어 아침에 널어 놓은 담요가 언제쯤 마를까 모르겠습니다. 다 안 마르면 아빠가 안 젖은 자리 쪽으로 해서 바닥에 깔고 자야지요.

요즈음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하는데,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기에 아이 이야기를 나눈다 할 테지만, 하루 내내 아이랑 붙어서 복닥이기 때문에 저절로 아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축구 경기에 하루 내내 마음을 파는 분들이라면 으레 축구 얘기가 터져나올 테고, 정치 소식에 늘 눈길 두는 분들이라면 저절로 정치 얘기가 흘러나올 테지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지난날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책 얘기만 했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헌책방 얘기를 신나게 했구나 싶습니다.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는 동안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책을 쉼없이 사 읽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바지런히 글을 썼으니까요. 이래도 책 저래도 책 그래도 책인 삶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피니 그렇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좋아할 책을 찾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반가운 짝을 사귑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몸에 맞는 밥을 먹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흐뭇해 하는 일거리를 붙잡습니다.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듭니다.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는 스르르 잠이 듭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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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노래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었다. 장르나 시대상을 몰라도 물의 하류처럼 고여 드는 기분. 귀에 콕 박혀서 버스 노선같이 외워지는 가사들. 꼭 그만큼의 흡입력이면 됐다 ..  (82쪽)

사진을 읽을 때에, 사진을 꼭 잘 알아야 사진을 잘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느낌에 따라 사진을 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꾸리는 삶이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찾지 못한다면,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사진이라든지 '널리 이름났다는' 사진에 매달립니다.

그림을 읽을 때에, 그림을 잘 안다든지 그림쟁이를 잘 알아야 그림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림읽기란, 그러니까 '그림 감상을 하며 감동하기'란 그림 지식을 불리거나 뽐내는 일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 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을 찾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본다든지 오래도록 마주 바라보면서 마음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뭉클함을 사랑하는 일이 그림읽기입니다.

겉그림
 겉그림
ⓒ 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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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봄내라는 분이 쓴 <그림에 스미다>라는 이야기책 하나는 바로 이렇게 그림을 읽은 삶을 담은 책입니다. 민봄내 님 책 <그림에 스미다>라는 책에서는 민봄내 님 스스로 좋아하고 아끼는 그림을 놓고 '기교가 어떻고 유파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다' 하고 밝히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지식조각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읽기를 하며 우리가 따질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거든요. 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나 스스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띄우면서 즐거웠느냐입니다.

..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건 커다란 이불 홑청 아래 만들어지는 약간의 응달이었다. 그 자그마한 빨래 그림자가 태양의 뒤뜰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한번 앉으면 오래 노는 걸 알고 있던 엄마는, 가끔 빨래줄 장대를 옮겨 달라고 명하셨다 ..  (164쪽)

책읽기란 그림읽기하고 같습니다. 책 하나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방마실을 합니다. 또는 셈틀을 켜고 누리집을 뒤적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을 펼치고 줄거리를 살피며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실천으로 받아들일는'지 '머리에 지식으로 채울는'지를 가름합니다.

책읽기를 마친 뒤 '책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그림읽기를 마친 다음 '그림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책이나 그림이란, 우리 가슴으로 스며든 책이나 그림 이야기이지, 이 책이나 그림에 얽힌 지식조각이 아닙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어찌저찌하고는 하나도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책 하나가 내 품에 고이 안겼느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그림 하나가 내 가슴에 푸근히 기대었느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 언젠가 열대 나라를 여행하면서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그러나 몹시 아끼는) 책을, 베개로 삼은 적이 있다. 지치고 목이 말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응달진 회랑을 찾아가 책 모서리에 머리를 걸치고 누워 버렸다. 돌아올 때까지 완독은 못했지만, 좋았다. 아끼는 제목과 문구들을 배낭에 지고 걷는다는 느낌만으로도 신이 났으니까. 읽고 난 후에도 마음 밖에서 겉도는 문장들. 책의 백양백색을 따지다 보면, 늘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책은 세상살이에 있어, 참 괜찮은 친구라는 것 ..  (232쪽)

우리 집 방은 아이랑 애 엄마가 해 놓은 낙서가 그림처럼 벽을 수놓습니다.
 우리 집 방은 아이랑 애 엄마가 해 놓은 낙서가 그림처럼 벽을 수놓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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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봄내 님 <그림으로 스미다>는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겉멋 들린 그림읽기에서 살짝살짝 홀가분해지는 매무새를 언뜻선뜻 보여줍니다. 지난날에는 갖가지 어렵고 딱딱한 말로 겉치레를 해대는 '예술비평'만 있었는데, 민봄내 님 책은 이런 겉치레 딱딱함하고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좋은 그림읽기란 좋은 삶에서 비롯하는 만큼, 잘나거나 못나거나 한 삶이 아닌 나 스스로 나한테 좋으며 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좋은 삶인가를 곱씹으면서 그림을 읽고 그림을 말하며 그림을 나누면 됩니다.

그러나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은 아직 마무리가 슬기롭게 되지는 못합니다. 그림읽기를 겉멋으로 하지 않고 당신 삶자락으로 하고 있는 민봄내 님인데, 민봄내 님이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낸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에서 민봄내 님 넋은 아쉽게도 착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맑은 곳으로 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자 나이 서른이면 세 가지 틀을 완성시키라고 했다. 돈과 일과 사랑. 혹시 혼자여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고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서른은 '나홀로 세상에'라고 말해 주고 싶다(19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떨굽니다. 왜 '돈과 일과 사랑'이어야 할는지 안타까워 고개를 떨굽니다. 그나마 '사랑'이 있으나 민봄내 님이 밝히는 사랑은 남녀 사이에 맺는 살섞기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숱하고 너른 사랑 가운데 아주 작은 귀퉁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이라고 하여도 도시에서 전문직업인으로 하는 일이지, 나 스스로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뭇목숨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돈'은 두말할 까닭이 없겠지요. 더없이 빛나는 나이인 서른에 한낱 돈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쓰럽고 슬픈 넋인지요.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우리는 '돈-일-사랑'이라는 겉발린 허울에서 홀가분할 수 없을까요.

어설픈 틀에 매이지 않는 그림읽기요, 어줍잖은 틀에 갇히지 않는 그림읽기이며, 어리석은 틀을 내세우지 않는 그림읽기인 <그림에 스미다>이지만, 어설픈 돈과 어줍잖은 일과 어리석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맙니다. 아무쪼록 '참-착함-고움(진선미)'을 찾으며 깨닫고 곰삭이는 싱그럽고 푸르디푸른 봄볕으로 빛나는 냇물 한 줄기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랑어린 빗물 같은 <그림에 스미다>로 다시 태어나 주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그림에 스미다 - 그대에게 띄우는 50장의 그림엽서

민봄내 지음, 아트북스(2010)


태그:#책읽기, #삶읽기, #그림읽기, #그림책,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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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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