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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선의사추모공원기적비건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양규태씨가 김낙선 의사의 행적을 모아 정리한 <김낙선 의사 독립운동과 생애>를 내놓았다. 그동안 추진했던 추모공원기적비가 지난해 10월20일 건립된 이후 김 의사의 행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첫 번째 성과물이다.

 

1881년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우덕마을에서 태어난 김 의사는 1909년 3월 태인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교전 중 허벅지 총상을 입었고, 1909년 7월에는 부안, 정읍, 태인, 김제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8월 김제 홍산면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교전 중 총상을 입고 체포 구금된 후, 11월에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1916년 총상과 고문으로 수감불능 수인으로 석방되지만, 1925년 4월25일 총상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45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만다.

 

김 의사는 이후 잊혔다가, 1986년에서야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자료심사위원회가 공적심사를 통해 서훈을 결정함으로써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고, 2003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됐다.

 

지난해 10월에는 김 의사가 살았던 상서면 감교리 장밭들에 추모공원기적비가 세워졌으며, 이곳을 충효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국비를 지원받아 현재 추모공원을 조성 중이다.

 

양씨는 "비를 세우는 일은 돌에 공적을 각인하는 일이 되므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추진할 수 있었으나, 의사님의 행적을 기록하는 일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행적기록이 아무 곳에도 보관된 데가 없었거니와, 그런 독립운동을 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하는 분들도 이젠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쓸 만한 총칼 들고 맞대고 싸우는 그런 독립운동이 아니라 야음을 틈탄 유격전으로 일본군대에 타격을 주는 외로운 독립운동이었기에 기록과 행적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글 내놓기가 퍽 두려웠습니다. 조건 없이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사님의 거룩한 인격에 흠이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습니다. 앞으로 의사님에 관한 보충자료를 더 확보해 만대에 길이 남을, 독립운동에서 보여주신 애국정신의 귀감이 되는 책을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전주일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독립운동, #김낙선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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