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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헤이리 밖, 인근 들판은 5월에 모내기를 마친 논들이 모두 초록색입니다. 이앙 후 한창 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벼들이 열 맞추어 도열해 있고 왜가리와 흰빰검둥오리들이 벼포기 사이를 누비고 있습니다.

모내기가 끝난 들판에서 먹이를 구하는 왜가리
▲ . 모내기가 끝난 들판에서 먹이를 구하는 왜가리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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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꼬가 궁금한 농부들은 논두렁을 오갑니다.

논두렁의 무성한 풀을 보면 그 풀을 베던 어릴 적 기억이 새롭습니다. 초등학교 때 일찍 대처로 유학遊學을 나온 저는 방학 때면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곤 했지요.

여름방학 무렵이면 논두렁 풀은 한 길로 자라 있을 때입니다. 논물을 보러 다니기도 해야 되고, 논두렁에 심은 콩도 힘을 받고 자라야 되며, 무엇보다도 소에게 먹일 꼴을 마련해야되었기 때문에 논두렁의 풀을 깎는 일은 한여름 큰 논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버지는 새벽에 언제 나가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아침잠을 깰 때면 이미 꼴 한 짐을 베어 들어오실 때쯤입니다. 간혹은 제가 그 논두렁 풀을 베는 일에 동참하곤 했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숫돌에 날을 세운 낫도 제가 사용하는 것은 금방 무디어졌습니다. 또한  두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돌을 쳐서 날을 상하게 하곤 했습니다. 마른 뽕나무 줄기를 찍어 누르다 낫을 두 동강내는 일도 더러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넓은 들의 논두렁을 다 베고 여름이 저물어도 결코 낫의 날을 상하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10년 넘게 사용해서 낫이 닳아 날의 폭이 반으로 줄어진 낫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여 결코 낫의 날을 상하게 하거나 부러뜨리는 일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한두 시간 만에 땀을 쏟으며 팔의 근육에 경련이 날 만큼 지치지만 아버지는 저보다 서너 배는 더 긴 길이를 깎아도 기운이 쇠한 느낌이 없었습니다.

올 어버이날에도 아버지께서는 논두렁을 만드느라 등을 펴지않으셨습니다.
 올 어버이날에도 아버지께서는 논두렁을 만드느라 등을 펴지않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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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른이 되어서 안 일이지만 논두렁의 풀을 깎는 일도 아버지는 힘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코 땅을 찍지 않으니 한번 세운 날이 한나절을 쓰도 쉬 무디어지지 않으며, 마른 나뭇가지를 자를 때에도 사선으로 짧게 낫을 날려 단 한 번에 잘랐던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힘의 소비도 적으니 한나절 동안 한 번도 쉼 없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해, 86세. 아버지는 여전히 양손을 비워두지않으십니다.
▲ . 올해, 86세. 아버지는 여전히 양손을 비워두지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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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커피한잔을 나누던 헤이리 공사진스튜디오의 공영석선생님이 목수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경륜 있는 대목大木이 나무 자르는 것을 보면 한 치도 계획에서 어긋남도 없지만 하나도 힘들어 보이질 않아요. 하지만 서툰 목수가 톱질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땀만 비 오듯 흘리거든요. 물론 잘린 나무도 거칠고 비뚤거립니다."

돌이켜보면 풀 베는 일 하나만으로도 아버지는 일의 이치에 달통한 경륜 있는 대목이셨고 저는 단지 톱질을 힘으로만 하는 것으로 여긴 철부지였던 것이지요.

왜가리가 먹이를 찾는 갈현리 들판을 바라보면서 하릴없이 '진정한 농부'의 과거를 추억하게 됩니다. 지금은 모두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고, 소도 사료로 먹이며, 논두렁에 조차 콩을 심을 만큼 가난한 시절이 아니어서 두렁의 풀을 벨 일이 없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빨 빠진 낫만 보아도 그 이빨을 뽑는 일이 전문이었던 저의 과거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새삼스럽게 농부 아버지의 근면과 성실 그리고 평생을 바친 그 초지일관의 결과로 만들어진 장인의 경지가 경외스럽습니다.

모티프원의 풀 벨 일 때문에 가져온 낫. 저는 작년에 또다시 이 낫의 이빨을 하나 뽑았습니다.
▲ . 모티프원의 풀 벨 일 때문에 가져온 낫. 저는 작년에 또다시 이 낫의 이빨을 하나 뽑았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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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와 사복私腹에 변덕이 죽 끓듯 한 오늘날 한 가지에 뜻을 세우고 진득하게 전력을 다했던 옛 장인과 쟁이의 마음가짐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건, 뜻을 세운 길에 시간을 바치고 최선을 다해 궁구하다보면 수십 년 낫을 상하지 않게 풀을 베는 농부처럼, 땀을 흘리지 않고도 바르게 나무를 켤 수 있는 대목처럼 사물의 이치에 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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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농부, #논, #희곡리, #이종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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