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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건축물에 기가 죽었다면, 더위에 지쳐 하루쯤 빈둥거리고 싶다면, 아이가 딸린 가족여행이라면 로마를 달콤한 곳으로 기억하고 싶다면 젤라테리아를 순례하는 것도 괜찮겠다.

젤라토를 먹을 때에는 입도 열고 마음도 열어야

'젤라토'는 이탈리아어로 아이스크림이라는 뜻. 아이스크림 전문점 젤라테리아에서는 직접 만든 젤라토 수십 종을 판매하고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젤라토는 현재 전 세계로 퍼져 인기만발이다. 얼리지 않은 아이스크림, 젤라토는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많이 달지도 않아 뒷맛이 깔끔하다. 하여 더운 여름날 로마에서 젤라토를 손에 든 여행자들을 만나는 일이란 서울에서 양산 쓴 아줌마들을 만나는 것보다도 더 흔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 가족은 호텔을 느지막이 빠져나와 판테온으로 가는 길에 유명한 젤라테리아에 먼저 들렀다. 로마 어디를 가든 젤라테리아는 쉽게 찾을 수가 있고, 어느 젤라테리아든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젤라토를 떠주는 사람과 먼저 눈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주문할 기회를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젤라테리아에서는 직접 만든  30~40종의 젤라토(아이스크림)를 판매한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대는 젤라테리아이기에, 무슨 맛일까 꼼꼼히 따져보고 고르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 젤라토 대부분의 젤라테리아에서는 직접 만든 30~40종의 젤라토(아이스크림)를 판매한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대는 젤라테리아이기에, 무슨 맛일까 꼼꼼히 따져보고 고르기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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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젤라토 달콤한 로마의 기억.
 달콤한 젤라토 달콤한 로마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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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는 평판 좋은 젤라테리아 베스트 3가 있다. 우리가 들른 곳은 피스타치오 맛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들어가니, 아이스크림콘은 천장에서부터 샹들리에처럼 겹겹으로 늘어져 있다. 일회용 컵 뽑듯이 콘을 뽑아서 주문한 젤라토를 덜어준다. 나는 항상 내 혀의 취향을 배반하지 못하고 사각거리는 맛을 선사하는 리모네(rimone 레몬)를 선택한다. 가끔 구수한 풍미의 쌀맛 젤라토를 먹는 것도 별미다.

젤라토 한컵 들고 로마의 반들거리는 돌길을 밟으며 걸어가는 기분은 정말이지 행복하다. 젤라토의 진짜 맛은 그때부터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 오는 정오 무렵, 방금 사들고 나온 젤라토는 먹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녹기 시작한다.

로마는 큰 도로를 제외하면 온통 이 돌길이라서 차들이 쌩쌩 달릴 수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구경다니면서 차를 피할 일도 차에 질릴 일도 별로 없다.
▲ 로마의 돌길 로마는 큰 도로를 제외하면 온통 이 돌길이라서 차들이 쌩쌩 달릴 수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구경다니면서 차를 피할 일도 차에 질릴 일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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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부터 들락거리던 유명한 아이스크림점에 발길을 끊었는데, 두 명의 창업주 중 하나가 심장마비로 죽고 다른 창업주의 아들은 사업계승을 거부하고 채식운동가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스크림의 최후를 목격한 게 화근이었다. 다 녹아 풀어진 아이스크림만큼 추한 게 또 있을까. 내가 저런 쓰레기를 맛있다고 먹었나 싶을 정도로 입맛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꽃은 져서 떨어져도 꽃이지만 아이스크림은 녹으면 쓰레기다.

하지만 젤라토는 조금 달랐다. 조금씩 녹기 시작할 때 맛은 더 달콤해지고 다 녹은 것도 싹싹 긁어 먹고 싶은 게 젤라토였다. 젤라토 사먹는 데만 하루에 13€(당시 환률 1€=1830원 정도)를 쓰기도 했다.

어쨌든 로마에서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쌓인 피로를 푸는 데에는 젤라토만한 것이 없다. 가시처럼 내리꽂히는 햇살을 잠시 잊기에는 젤라토만한 것이 없다. 광장의 한구석에 적당히 퍼질러 앉아 젤라토를 야금야금 떠먹어 가며 쉬는 휴식만큼 달콤한 시간이 또 있을까.

다만, 형형색색 가지가지 맛을 다양하게 맛보지 못하고 보수적인 내 입맛에 굴복해 버려 몇 가지 맛에만 갇혀 버렸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젤라토를 먹을 때에는 입도 열고 마음도 열어야 한다. 새로운 맛에 도전해 보려면 말이다. 그 많은 종류의 젤라토 중 지존의 맛을 찾아내려면 말이다.

판테온의 신비한 빛

한덩이 젤라토를 마지막 순간까지 핥아 먹고 나면 판테온(Pantheon)에 도착하게 된다. 고대 로마의 영광을 대변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 판테온. 그 입구에는 16개의 코린트식 화강암 원주가 줄을 서 있다.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하늘로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눈'과 마주치게 된다. 돔의 정상에 뚫린 구멍은 태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 구멍 사이로 스며드는 빛은 신비하게도 커다란 내부를 환히 밝히고 있다, 다른 아무런 조명도 없이.

고개를 쳐든 채, 천장의 규칙적이고 조화로운 격자 무늬 사이로 빛이 비껴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판테온의 내부에서 실로 '우주'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다.

돔의 정상에 뚫린 구멍은 태양을 상징한다. 거대한 눈을 통해 스며든 빛은 신비롭게도 판테온의 내부를 고르게 밝혀주고 있었다.
▲ 거대한 눈 돔의 정상에 뚫린 구멍은 태양을 상징한다. 거대한 눈을 통해 스며든 빛은 신비롭게도 판테온의 내부를 고르게 밝혀주고 있었다.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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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7년 올림푸스의 모든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아그리파가 만들었다는 판테온의 판pan은 '모든 것', 테온theon은 '신'이라는 뜻이다.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는 판테온을 미켈란젤로는 '천사의 설계'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판테온은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성당으로 바뀐 덕에 원형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게 된 유일한 고대 로마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판테온의 지붕은 원래 청동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는 이 청동을 뜯어내어 베르니니로 하여금 성 피에트로 성당의 거대한 발다키노를 만들게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에 감탄하다 빛이 떨어지는 곳을 따라가듯 쳐들었던 고개를 거두어 들이면 눈에 들어오는 묘가 하나 있다. 유리벽 안의 석관에는 37세에 요절했다는 라파엘로가 잠들어 있다. 짐승조차 그를 사랑할 정도로 온화했다는 라파엘로는 이 신비로운 빛 속에서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판테온을 빠져나와 로마의 거리를 걸어가는 내내 마주치는 건물들은 범상치 않아 보인다. 먼지가 더께가 되어 마치 검은 재처럼 건물의 기둥이며 벽을 뒤덮고 있지만 오랜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젤라토에 내 입이 사로잡히고 판테온에 내 눈과 마음이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기원전 753년에 세워진 로마, 그 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일대를 거느리고 발전하다 서기 476년에 망했다지만 나는 의심이 들었다. 과연 로마 제국이 망하기는 망한 걸까. 로마 제국이 망한지 1500년이나 흘러버렸지만, 문화적으로 정신적으로 압도 당하는 이 느낌은 뭐란 말인가.

나는 문득 로마의 화려한 문화유산들 속에 둘러싸인 내 자신이 헐벗은 것처럼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판테온의 돔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돔 중의 하나. 돔의 지름과 바닥에서 돔까지의 높이가 똑같이 43.40m.
▲ 판테온의 내부 판테온의 돔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돔 중의 하나. 돔의 지름과 바닥에서 돔까지의 높이가 똑같이 43.40m.
ⓒ 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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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태그:#젤라토, #판테온, #로마,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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