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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장 태안의 70대 이상 할머니들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회 활동을 하며 사시는 분을 꼽자면 단연 최영숙 선생을 첫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것 같다. 1936년생이시니 올해로 74개의 나이테를 지니시게 된 분이다.

'서안예수문학회'와 '태안문학회' 회원으로 부지런히 글도 쓰고, '뻘빛시낭송회' 회원으로 늘 시심(詩心) 속에서 산다. 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성화노인대학'의 강사로 출강하며 노인들 속에서 어울렁더울렁 '젊은 노년'을 구가한다. 필리핀의 한 시골에다 유치원을 지어놓고 자선사업 성격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일 년에 두세 번은 현지를 가기도 한다. 기독교상담소를 경영하면서 서울여자대학교 농촌여성문학연구소 연구원으로도 활동한다. 

고향은 황해도 해주이나 인천과 서울에서 성장했고, 인천여고와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했다. 인천고등학교 국어교사를 거쳐 국회 사무처에 근무하던 1971년, 그녀 나이 35세 때 '태안사람'이 되는 계기를 맞았다.

74세에 첫 문집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연 자리에서 꽃다발을 안고 '저자 인사'를 하는 최영숙 선생. 옆에 선 이는 태안장로교회에서 30년 동안 목회를 하고 지난해 은퇴한 남제현 원로 목사.
▲ 저자 인사 74세에 첫 문집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연 자리에서 꽃다발을 안고 '저자 인사'를 하는 최영숙 선생. 옆에 선 이는 태안장로교회에서 30년 동안 목회를 하고 지난해 은퇴한 남제현 원로 목사.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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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교회를 다니던 그는 어느 날 교회신문에서 특이한 기사 하나를 발견한다. 충남 서산군(당시) 부석면 가사리의 '가사장로교회'에서 시무하는 전도사에 관한 기사였다. 전도사의 이름은 정주용, 1930년생 41세라고 했다. 몇 년 전에 상처를 하고 혼자 5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산다고 했다.

기사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가난한 시골교회의 가난한 전도사, 혼자되어 다섯 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는 마흔이 넘은 전도사의 짝이 되어 함께 하나님 사업을 하며 살 '천사'의 출현을 기대하는 메시지였다.

당시 영락교회에는 과부들이 많았다. 당연히 돈이 많은 과부들도 있었다. 그 과부들을 끼고 이런저런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중매는 중매 단계부터 성사가 되지 않았다. 남자 쪽의 조건이 워낙 투박하기 때문이었다.

최영숙 선생은 그 기사를 본 날부터 그 전도사를 위해 기도를 많이 했다. 생각할수록 불쌍하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신앙심 깊고 마음씨 좋고 돈도 많은 과부 한 사람이 그 전도사의 짝이 되어 주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도 보람 없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가난한 시골교회 가난한 홀아비 전도사에 대한 얘기를 아무도 하지 않게 되었고,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그때 그녀는 홀연 무엇인가가 자신에게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그 전도사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던 사실을 자각했고,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자신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다른 사람에게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내게 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순간 그녀는 결심했다. 자신이 가난한 시골교회의 그 가난한 홀아비 전도사와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임을 굳게 믿었다.

그녀는 노처녀라는 딱지가 붙기는 했지만 순결한 처녀였다. 처녀의 몸으로 자녀가 다섯이나 딸린 시골교회 전도사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당연히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녀는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무난히 대학까지 졸업하고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 사람이 시골로 가서 전처소생이 다섯이나 딸린 가난한 홀아비 전도사와 결혼을 한다하니, 그것을 달가워할 부모 형제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1976년 12월 8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양력 12월 8일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결혼기념일을 쉽게 기억하기 위해 굳이 자신의 생일을 결혼식 날로 잡았다.

결혼식장은 가나안농군학교의 교육장이었다. 주례는 가나안농군학교를 운영하는 김용기 장로가 맡아 주었다. 김용기 교장이 사시는 사택에서 한복으로 예복을 차려입고 경운기를 타고 식장으로 갔다.

그래서 그녀는 훗날 '경운기 타고 새색시 시집 가네'라는 글을 썼고, 또 결혼 날로부터 35년 후인 올해 첫 문집을 내면서 문집 이름을 <예수님이 좋아 경운기 타고 시집온 새색시>로 했다. 결혼 날의 풍경을 기록한 그 글의 한 대목을 소개해 본다. 

74세에 첫 문집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연 자리에서 저자 최영숙 선생이 축하 떡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 축하 케잌 자르기 74세에 첫 문집을 출간하고 출판기념회를 연 자리에서 저자 최영숙 선생이 축하 떡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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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귓전을 때린다. 김용기 가나안 농군학교 교장 선생님이 사시는 사택에서 신부 단장을 하고 경운기를 빌려 타고 식장으로 사용하는 교육장으로 달려갔다. 얻어 입은 새색시 한복이 눈바람에 휘날린다. 머리에는 족두리가 씌워져 있고 발에는 예쁜 색동 고무신이 얌전하게 버선발을 감싸주고 있다.  하늘에서는 하얀 함박눈이 가끔 바람에 날리고 있다. 신랑은 신사복에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착용했다.

우리들의 결혼식장은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육장이었다. 또 한 차례 농촌교육을 마치신 김용기 장로님의 주례를 맡아주셨다  김용기 장로님은 주례사를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며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가 전서 5;16-18)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모든 교육생들이 우리 두 사람의 하객이었다. 교육생들이 찬양도 불러주고 축사도 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교육생들과 모든 선생님들이 힘을 합하여 피로연도 베풀어 주었다. 비록 간소하고 보잘것없는 결혼식이지만 하나님의 사역을 하시는 전도사님께 시집을 간다는 귀한 소망의 이루어짐 때문에 내 마음이 흡족하고 용기가 샘솟는다.

결혼식을 마친 후 그녀는 곧장 낭군을 따라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 가사장로교회로  내려왔다. 다섯 명의 자녀들이 새 엄마를 맞아주었다. 열일곱 살에서 여섯 살까지였고, 아들 넷에 딸이 하나였고, 딸은 둘째였다. 그녀는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결심 한 가지를 했다. 앞으로 온전히 이 아이들에게만 관심과 정성을 쏟자. 나는 노산(老産)의 위험도 있으니 아이를 갖지 말자.

그녀는 그날 그 순간의 결심을 평생 동안 지켰다. 자신은 아이를 갖지 않고 전처소생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지극 정성으로 기르고 보살폈다. 사랑으로 기른 만큼 다섯 아이들 모두 바르게 잘 자랐고, 사회의 어엿한 일꾼들이 되어 어머니께 효도로써 보답한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열과 성을 다했다. 남편은 초등학교 졸업 학력만을 가지고 여러 가지 어려운 직업을 전전하다가 어찌어찌하여 전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전도사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전통 교단인 장로교(통합)에 속한 전도사로서 정통 코스로는 목사가 되기 어려운 처지이기도 했다. 그런 남편에게 그녀는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단 경험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손수 남편에게 공부를 시켰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했다.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두 번 낙방 후 세 번째 도전에 합격을 했다.

다음은 고등학교 검정고시였다. 더욱 강도 높은 공부를 한 끝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고는 다음해 장로교신학대학 입시에 도전했다. 합격증을 받은 날 그들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4년 공부를 잘 마치고 장로교신학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드디어 1986년 해미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결혼생활 10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들 부부는 결혼 후 가사장로교회에서 2년 사역을 하고 1978년 태안군 원북면 대기리 풍천교회로 옮겨 생활했다. 남편은 풍천교회에서 8년 동안 전도사로 일하고, 목사가 된 후에는 원북면 반계리 원북장로교회로 옮겨 목회를 하다가 1998년 68세로 별세했다.  

22년 동안 부부의 고락을 함께 나누고 62세 때 홀로 된 최영숙 선생은 지금도 남편 고 정주용 목사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이상한 힘이 되어 혼자서도 너끈히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모두 출가한 다섯 명 자녀들이 종종 문안 전화를 해주고 어머니 생신(부모 결혼기념일)이나 명절 때 꼭꼭 찾아주는 것이 큰 낙이라고 했다. 남편을 생각하고 자녀들을 대할 때는 결혼을 좀 더 일찍 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고 아쉬워지기도 한다.

"목사님을 처음 안 때로부터 무려 5년이나 지나서야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친정 식구들의 반대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요. 내가 다른 쪽으로는 아예 눈을 돌리지 않고 나이만 먹게 되니까 할 수 없이 허락을 하신 거지요. 그래도 정식 결혼식을 하기 전부터 왕래를 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에요."

최영숙 선생은 결혼 생활을 시작한 날부터 일기를 썼다. 그 일기를 바탕으로 22년 동안의 결혼생활과 혼자되어 오늘까지 살아온 도합 30여 년의 세월을 알뜰히 수놓은 문집을 지난봄에 출간했다. '도서출판 가야'에서 펴낸 230쪽의 아담한 책이다.

일기를 바탕으로 쓴 글이라서 글들이 짤막짤막하다. 여행기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여행기조차 일기 형식으로 씌어져서 스케치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230쪽의 책에 도합 80편 가까운 글이 담겨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서점에 내놓고 판매를 할 책은 아니다. 그저 친지들에게 선물도 하고, 그동안의 책 빚을 갚기도 할 마음으로 만든 책이다. 필리핀에 유치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필리핀 어린이들에게 한글도 가르치는데, 한글을 익히는 아이들에게도 선물할 생각이다.

최영숙 선생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다. 처녀 시절 직장생활을 하며 알뜰히 모은 돈이 '종자돈'이 되어준 덕도 있고, 친정 부모의 유산 상속에서 출가외인이라 하여 차별을 받지 않은 덕도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뜻 있는 일에 손도 쓰면서 기쁘고 즐겁게 생활한다.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 않고 천진한 소녀 같은 품성을 유지한다.

내가 '만년소녀'라고 부르는 올해 74세이신 최영숙 선생과 함께 앉았다. 1981년에 처음 뵈었으니 어언 30년 지기가 되었다.
▲ 30년 지기 내가 '만년소녀'라고 부르는 올해 74세이신 최영숙 선생과 함께 앉았다. 1981년에 처음 뵈었으니 어언 30년 지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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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영숙 선생을 1981년 고장에서 '흙빛문학회'를 창립할 때 처음 만났다. 흙빛문학회에 참여했으나 아무래도 능력이 부치는 것 같다며 일찍 하선했던 그는 내가 1998년 '태안문학회'를 창립하자 기꺼이 참여했다. 작품집과 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열성 회원이다.

목사님 부인이었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하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천주교 신자인 나와 아무 격의가 없다. 내가 2년 전 신앙문집들을 출간했을 때 신앙산문집을 몇 권 구입해서 주변 친지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신자배가운동에 호응하여 다섯 명을 이름을 써내고 그 다섯 명에게 내 책을 선물했는데, 책을 읽은 세 명이 천주교회로 방향을 돌렸다는 말을 내게 하며 깔깔 웃기도 했다.

지난해 내가 '용산미사'에 참례할 때는 용산미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개신교 일각에서 장례비 3억 모금을 하자는 말들이 나돌 때는 "천주교 신부님들이 장례비 3억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렇게 매일같이 미사를 지내는 줄로 아는 모양이죠? 용산문제는 돈이 근본 문제는 아닐 텐데 말예요"라고 해서 나를 놀라게 한 분이기도 하다.

지난 3월 15일 낮에 최영숙 선생의 문집 출판기념회가 태안 읍내의 한 음식점에서 있었다. 다수의 지역문인들과 시낭송회 회원들, 여러 교회 목회자들과 목사 사모들 및 신도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천주교 신자인 나도 참석하여 함께 기도하고(목사님들의 기도 때는 성호를 그어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면서) 즐겁게 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최영숙 선생의 문집 앞머리에 수록된 내 출간 축시를 직접 육성으로 낭송하기도 했다. 최영숙 선생의 문집 앞머리에 배치되고,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내가 직접 낭송했던 출간 축시를 여기에 소개해 본다.

최영숙 선생의 첫 산문집 <예수님이 좋아 경운기 타고 시집온 새색시> 앞머리에 실린 내 축시를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직접 낭송했다.
▲ 축시 낭송 최영숙 선생의 첫 산문집 <예수님이 좋아 경운기 타고 시집온 새색시> 앞머리에 실린 내 축시를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직접 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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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시

만년소녀의 '꽃꿈' 이야기
―최영숙 님의 문집 출간에 붙여

그는 여자다 할머니다
누가 봐도 할머니인데
나이가 없다
생년월일은 있는데
나이가 지워져 버렸다
성품 탓이다 타고난 성품에
평생을 예수님 사랑으로
기도로 채운 덕이다
늘 웃음이 머무는 그의 얼굴엔
청순함과 천진함이
조롱박도 되고 함지박도 된다
그래서 그는 만년소녀다
소녀에게는 늘푸른 내일이 있다
지나간 수많은 날들도 다 내일이다
함초롬이 피어난 그리움의 꽃들
울안 가득한 추억들은
내일에도 피어날 꽃들이다
그는 매일같이 꽃길을 간다
꽃길에서 오늘도 꽃꿈을 꾼다
그의 마음속 논두렁 밭두렁 산모롱이 길에는
오늘도 경운기가 웃음소리를 낸다
새색시 시절 낭군 만나러 오는 길에 탔던
자갈길 경운기가 끊임없이 그를 태우고 간다
그 경운기 달구지엔
갖가지 이름의 보석들이 가득 실려 있다
희생 헌신 봉사
사랑으로 가능한 보석들이다
하나같이 야무지다
넉넉하고 푸짐하다
붙임성 적극성 친밀성이라는 이름
향학열이라는 이름의 보석도 있다
그런 보석들이 실려 있기에
그의 경운기는 오늘도 동구 밖을 나간다
꾸밈없는 푸근함을 실어 나른다
70여 개의 나이테를 데불고도
때로는 병상 위에서 휴식을 하는 동안에도
낙천성과 동무하는
그의 왕성한 너울가지는
그가 처음 타고 왔던 경운기를
오늘도 멈추지 않게 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듯
만년소녀의 경운기는
오늘도 꽃꿈을 안고 꽃길을 간다. 

고장에서 오랜 동안 문학회와 시낭송회 회원으로 활동해온 최영숙 선생이 70대 중반 세월 속에서 첫 문집을 출간했다. 지인들과 나누고자 만든 소박한 책이다.
▲ 최영숙 선생의 첫 문집 고장에서 오랜 동안 문학회와 시낭송회 회원으로 활동해온 최영숙 선생이 70대 중반 세월 속에서 첫 문집을 출간했다. 지인들과 나누고자 만든 소박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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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목사 부인, #문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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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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