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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성북동의 '심우장'을 둘러 본 일행들은 인근의 '서울명수학교' 앞을 지난다. 명수학교는 지난 1968년에 개교한 정신지체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로, 나는 성북동에 장애인 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성북동에 장애인학교가 있다니
▲ 서울명수학교 성북동에 장애인학교가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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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으면 이런 부촌에 장애인학교를 세운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42년 전 설립 당시에는 성북동도 서울 도심을 기준으로 보자면 약간은 변두리에 조용한 농촌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시인 김광섭 선생의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가 이 무렵에 발표되었으니, 명수학교도 성북동 개발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성북동에서 만난 정신지체 특수학교인 명수학교와의 만남은 성북동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게 하는 놀라운 반가움이었다.

성북동
▲ 수월암 성북동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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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수학교 앞에는 작은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암자가 보인다. 아직 봄꽃이 좋아서 벚꽃 구경을 위해 잠시 암자로 들어가 사진을 찍고서 돌아 나온다. 작은 암자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좋았다.

수월암의 벚꽃을 뒤로 하고 '길상사(吉祥寺)'로 간다. 사실 길상사에 가면 시인 백석(白石)과 그의 연인이었던 김영한 여사가 먼저 생각이 난다.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평안도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지방적 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한 백석은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를 많이 발표했다.

법정스님이 회주로 있었던 절
▲ 길상사 법정스님이 회주로 있었던 절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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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산 자락인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운영했던 백석의 옛 연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은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에 감동하여 자신의 전 재산을 송광사에 시주하고 떠났다.

승려이자 수필작가인 법정 스님은 1997년 12월부터 2003년 12월까지 길상사의 회주(會主)로 주석했다. 지난 3월 법정스님이 이곳 길상사에서 입적한 이후 절은 더욱 붐비는 곳이 되었다. 그의 저서인 '무소유' '오두막 편지' 등의 책이 동날 정도로 팔려나갔고, 절을 찾는 사람들은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것 같다. 

길상사
▲ 김영한 여사 추모비 길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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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도 석가탄신일 준비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으로 절 내부를 이곳저곳 살펴보고 내려왔다. 아쉽게도 법정스님에 대한 추모열기로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전의 고요함을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상사를 둘러 본 다음, 길상사 조금 위쪽에 있는 독일대사관저 앞에 위치한 '정법사(正法寺)'로 향한다. 성북동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정법사는 예전에 복전암(福田庵)이라 불리던 작은 암자였다. 1960년 석산스님이 가회동에 있던 건봉사(乾鳳寺)의 포교당을 옮겨오며 대웅전을 세우고 정법사라고 이름을 붙였다.

성북동에 가장 오래된 절 정법사
▲ 정법사 성북동에 가장 오래된 절 정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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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원래 서대문에 있던 황태자궁을 이전하여 온 것으로 2004년에 중수한 것이고, 내부의 석가모니불, 지장보살, 관음 등의 불상과 1918년에 그려진 열반도, 후불탱화, 현왕탱화 등이 있다.

참 작고 아름다운 절이다
▲ 정법사 대웅전 참 작고 아름다운 절이다
ⓒ 김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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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는 영구위패를 모시는 극락전이 있다. 미륵신앙을 중히 여기는 사찰임을 잘 드러내주는 석조미륵불입상은 1975년 조성되었다. 사천왕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범종루와 산신각, 팔상전, 3채의 요사채가 있다. 성북동의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너무 고즈넉하여 며칠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개관을 준비 중에 있다
▲ 한국가구박물관 아직 개관을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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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사 인근에는 아직 개관을 준비 중에 있는 '한국가구박물관(韓國古家具博物館)'이 있다. 전통 목가구를 중심으로 옹기 유기 등의 전통 살림살이를 전시하는 전문박물관으로 소장품을 안방 사랑방 부엌용품으로 구분한 방과 먹감나무 은행나무 대나무 소나무 종이 등의 재료별로 구분한 방, 지역별로 분류한 방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어 '성북동 성당'으로 향한다. 1980년대 조성된 성북동 성당은 인근의 혜화동 성당이 규모가 커지자 분리되어 나와 현재에 이르는 곳으로 작지만 참 운치 있고 멋있는 성당이었다. 붉은 벽돌과 마리아상, 소나무, 향나무 등이 인상적이다.

아름답다
▲ 성북동성당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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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고종의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이 35년간 별궁으로 사용한 정원인 '성락원(城樂苑)'으로 향했다. 현재는 공사 중이라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내년 정도에는 다시 개관이 된다고 한다.   

조선시대 민가의 별장
▲ 성락원 조선시대 민가의 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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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은 조선시대 민가의 별장으로는 서울에 남은 유일한 것이다.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는 전원(前苑), 영벽지(影碧池)와 폭포가 있는 내원(內苑), 송석(松石)과 못이 있는 후원 공간 등 자연지형에 따라 조원된 세 개의 공간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쪽 암벽에 있는 추사 김정희의 '장빙가(樟氷家-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는 집)'라는 글씨와 송석정의 지붕을 뚫고 서 있는 노송이 인상적인 곳이라고 한다. 

닫혀있는 성락원을 뒤로 하고 '선잠단지(先蠶壇址)'로 이동했다. 조선의 왕들이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모시고 풍년을 기원했다면, 왕비들의 소임 중에 하나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내는 일이었다. 누에를 키워 고치에서 실을 뽑아 방적하는 일은 중요한 생산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양잠을 크게 장려하여 각 도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는 한편,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그리고 잠사가 생산되면 국가에서 엄밀히 심사하는 것을 제도로 삼았다.

농업 국가였던 조선의 왕들이 친히 쟁기를 잡고 밭을 갈아 보임으로써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의식을 행했고, 왕비들은 뽕나무가 잘 크고 살찐 고치로 좋은 실을 얻게 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리고자 선잠단을 지었다.

왕비들의 주로 하던 양잠을 권장하던 곳
▲ 선잠단지 왕비들의 주로 하던 양잠을 권장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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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에는 대를 모으고 중국 황제의 왕비인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의 신위를 배향하였다. 단의 남쪽에는 1단 낮은 댓돌이 있는데 그 앞쪽 뜰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고 궁중의 잠실에서 키우는 누에를 먹이게 하였다. 현재는 성북초등학교 옆 길거리에 여러 집들에 둘러싸인 조그만 터전만 남아 있다.

선잠단지를 둘러 본 우리들은 나폴레옹제과 방향으로 길을 내려 온 다음,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인근의 칼국수와 수제비를 잘하는 작은 식당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한 다음, 해산했다.

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시 종로/중구 걷기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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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성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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