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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쯤 출발에 나서니 어제 내리던 보슬비가 더욱 굵어져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도로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자전거가 잔뜩 뒤엉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속을 가까스로 뚫고 1번 국도로 들어섰다. 1번 국도 역시 출근하는 인파들로 뒤덮여 있으며 밤새 내린 비가 고여 도로 표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며 정신없이 물을 헤치며 달렸다.

아! 이놈의 건망증, 배낭을 길에 두고 오다

한 시간쯤 달려 하노이 시내를 빠져 나왔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가게 처마 밑에서 쉬었다. 모두 물속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흠뻑 젖었고 자전거도 엉망이었다. 잠시 쉬고는 다시 달렸다. 한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등이 허전함을 느꼈다. 그 순간 곧바로 자전거를 돌려 온 길을 향해 다시 돌아갔다. 잠시 쉴 때 배낭을 잊고 두고 온 것이다. 가끔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또 다시 그 건망증이 도진 것이다.

배낭에는 여권을 비롯한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뒤따라오던 사람이 가져오겠지 했으나 그들도 남겨진 배낭을 보지 못했단다.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전속력으로 달렸다. 한참을 달려도 쉰 장소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쉴 때 눈여겨 보았던 주변 장소가 멀리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거기엔 노란색이 선명한 내 배낭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순간 기쁨과 함께 다리에 쥐가 났다. 넘어질 듯 말 듯 경색된 다리를 뻗으며 내려섰다.

닫혀 있었던 가게 문은 열려 있었고 누군가 가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무어라 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내 지갑과 휴대전화를 갖고 나온다. 지갑을 열고 속에 있는 돈을 보여주면서 지갑과 휴대전화를 나에게 준다. 지갑에서 없어진 것은 없었다. 배낭을 보니 배낭을 연 흔적이 전혀 없었다. 아직도 의문이다. 어떻게 지갑과 휴대전화가 배낭 밖으로 나와 있었는지...

무어라 말하는데 몸짓을 보니 누가 가져갈까 봐 지켜보고 있었다는 같다. 너무 고마워 한국서 환전해온 100만동(한국 돈 7만원 정도)을 모두 주었다. 그는 내 지갑 안의 만원권을 갖고 싶다고 표현하기에 만원을 꺼내 주었더니 아주 좋아했다.

되돌아가는 동안 맥이 완전히 풀렸다. 확인해 보니 10여 km를 전속력으로 달렸던 것이다. 장거리여행을 할 때는 무릎에 힘을 가능한 주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서는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한 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제 막 여행을 시작했는데 벌써 무릎 통증이 오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새옹지마

비가 와서 속도는 떨어지고, 두고 온 배낭을 찾기 위해 시간이 지체되고, 펑크도 자주 나서 계속 늦어졌다. 결국 계획에 없던 야간주행을 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 빗속을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숙소를 찾기 위해 타인 호아(Thanh Hoa)까지는 가야했다.

타인 호아성의 타인 호아에 다다르니 고가도로가 나왔다. 양쪽 무릎이 너무도 아파 경사가 완만함에도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가도로 아래로 가는 길도 있을 것 같아 들어섰으나 잘못된 길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되돌아 나오다 보니 '나응이(nha nghi 민박, 여관)'라는 간판 불빛이 보였다.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이럴 때 '새옹지마'라는 표현을 쓰지...

첫날이 가장 긴 여행으로 원래 계획은 150km 정도였다. 그러나 두고 온 배낭을 찾기 위해 되돌아갔다 온 것까지 합하니 170km가 되었다. 하루에 그것도 빗속을 170km나 달린다는 것은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매우 무리한 일이었다. 한쪽 무릎의 통증이 양쪽 모두로 퍼졌다. 3층에 있는 방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명나라를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 황제

비에 젖은 옷과 신발은 아침이 되어도 마르지 않았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 보았자 또 젖을 것이 뻔해서 축축한 옷과 신발을 다시 걸쳤다. 그 찜찜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조금 달리고 나니 그러한 느낌이 모두 가셔졌다.

인파를 따라 타인 호아 도심으로 들어가니 넓은 공원이 나오고 가운데 큰 동상이 서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레 러이(Le Loi) 황제이다.

명나라를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 황제
 명나라를 물리친 레 왕조의 시조 레 러이 황제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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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근처에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니 이른 아침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아침과 함께 베트남 커피를 주문했다. 베트남 커피는 연유를 담고 있는 잔 위에 작은 구멍이 촘촘히 뚫린 조그마한 컵을 올려놓고 커피 가루를 그 속에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부으면 아래에 떨어진다. 이것을 섞어서 얼음이 담긴 유리잔에 부어 냉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데 맛과 향이 아주 좋다. 일부 카페에선 이 커피를 화이트 커피(white coffee)라 적어 놓았다. 베트남에서 커피를 많이 생산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듯 전국 곳곳에 카페가 매우 많이 보인다.

페트병 조각으로 찢어진 타이어 응급조치

어제와 오늘에 걸쳐 펑크가 자주 났다. 튜브를 갈기 위해 바퀴를 뺄라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기 일처럼 봐주려 한다. 간섭이 지나치다 할까 아니면 정이 많다고 할까? 아무튼 그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 정비에 대해서는 많은 경험을 갖고 있다.

고쳐주려고 애를 쓰는 베트남 사람
 고쳐주려고 애를 쓰는 베트남 사람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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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타이어 옆면이 찢어져 고민하고 있을 때 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자기 집에서 타이어를 갖고 와 대본다. 크기가 다르자 자기의 오토바이에 우리 바퀴를 싣고 어디론가 갔다. 잠시 후 다시 왔는데 크기가 맞는 타이어가 없었는지 그냥 갖고 왔다. 훼손된 타이어가 뒷바퀴에 있던 것을 알고 우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는 앞타이어와 뒷타이어를 바꾸라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앞바퀴보다 뒷바퀴에 하중에 더 많이 걸리므로 훼손된 타이어를 앞바퀴로 옮긴 것이다.

튜브가 타이어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비닐을 이용해 튜브를 감싸고 임시방편으로 수리를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튜브가 타이어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 때 번뜩이는 생각! 버려진 페트병을 잘라 찢어진 타이어 안에 대고 튜브를 넣었다. 효과 만점이었다.

아픈 다리로 인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응에안(Nghe An)성의 디엔 차우(Dien Chau)에서 멈추었다. 제법 큰 마을이었다. 작고 깨끗한 호텔을 찾아 들어서니 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기도소리와 수탉 울음소리 그리고 개 짖는 소리의 화음

잠결에 종소리와 기도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밖에 나와 보니 비가 제법 굵게 내린다. 시간은 새벽 4시쯤 되었다. 바로 호텔 뒤에 있는 성당에서 종소리와 함께 기도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천주교에서 하루 세 번하는 삼종기도를 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예전에는 근처 성당에서 새벽 6시와 12시 그리고 저녁 6시이면 성당 종을 울리고 삼종기도 하는 것을 많이 봤기에 그 추억에 잠시 잠겼다.

성경을 읽는 소리인지 기도소리인지 처음엔 은은히 들리는 것이 옛 기억을 살리는 것처럼 운치 있었으나 문제는 그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새벽의 수탉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질세라 동네 개들도 함께 짖어댄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기도소리와 수탉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어울려 환상적인 화음이 울려 퍼진다. 완전히 잠을 설쳤다. 기도 소리는 한 시간이 넘어서야 그쳤다.


태그:#건망증, #레러이 황제, #패트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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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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