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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연극 줄거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무대 위 부부는 독특하기도, 평범하기도 한, 그런 부부였다. 고등학교 때의 선생님과 제자로 만난 사이니 그리 흔하진 않겠고, 그러나 지지고 볶으며 산 30년 세월은 세상 많은 부부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보였다.

 

평생 교직에 몸담고 살아온 남편은 꼼꼼하고, 빈틈 없고, 매사 가르치려 하고, 버럭 소리지르기 일쑤고, 끊임 없이 잘못을 지적하고, 모든 결정을 자기가 다 하는 사람이다.

 

여학교 제자였던 나이 차 나는 아내는 처음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기도 했던 모양이지만, 곧바로 포기하고 그저 남편 뜻에 맞춰 살아왔다. 돈 쓰기를 무서워하고, 수시로 잔소리하며 화를 내는 남편에게 꼼짝 못하고 눌려지내다 보니 자기 목소리를 내본 게 언제인지 모를 정도이다.

 

아이들 다 키워서 내놓고 둘만 남은 집, 겉보기엔 별다를 게 없는 집이지만 집에 대한 부부의 생각에도 차이가 있다. 이 집을 장만하기 위해 수당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앞뒤 안 가리고 수업을 맡았던 남편은 최선을 다했노라 자부한다. 그러나 아내는 그러는 동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남편은 없었으며 자신과 아이들만 있었노라 아쉬워한다. 

 

30년 세월을 한 이불 속에 누워 살아온 부부가 마주보고 있거나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실감한다. 각자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반드시 같으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보통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은퇴한 남편은 여전히 아내의 꼼꼼하지 못한 일처리를 지적하고 야단치고 버럭 소리를 질러댄다. 아내는 간간이 툴툴거리긴 해도 대놓고 항의하지는 못한다. 노년에 이른 부부의 삶은 이렇게 죽 이어질 것 같았지만, 아내의 위암 말기 진단으로 흔들리게 된다. 아니, 흔들리는 쪽은 남편이다. 아내는 외로움의 병이 깊어, 그 누군가에게 빨리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빌고 있었기에 6개월 남았다는 의사의 진단에 오히려 웃음을 터뜨린다.

 

아내의 병을 이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 후회하는 남편. 항암치료를 하지 않기로 한 아내는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맘껏 하겠노라 선언하고는 남편에게 살림을 맡기고 밖으로 밖으로 돈다. 쇼핑, 친구 만나기, 춤 배우기. 

 

살림에도 적응이 되지 않고, 아내의 변화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남편은 혼란스럽기만 하고 화가 난다. 아픈 아내에게 맘대로 화도 내지 못하니 이 또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아내가 떠나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버거운데, 아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해대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내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지고, 그동안의 아내의 낯선 행동에 숨겨진 이유들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내는 낡아 이제는 한몸처럼 편한 소파에 앉거나 누워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아이들을 기다려왔다. 외로움은 깊어지다 못해 가슴 속 병이 되었고, 그 병은 결국 몸의 병을 만들어 이제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몸이 아픈 아내는 여전히 침대 아닌 소파에 누워 잠을 잔다. 익숙하고 편하니까.

 

그러나 남편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세상 모든 부부가 다 그렇게 사니까, 다들 우리처럼 사니까 말이다. 상대의 생각이나 느낌을 배려하지 않고 살아온 남편의 딱딱한 가슴이 녹기 시작한 것은 내 눈에서 눈물이 나기 시작한 그 대목이었던 것 같다. 

 

"나는 눈을 감고 자고 있는 당신이 아니라, 눈을 뜨고 있는 당신과 텔레비전을 보고 싶었고, 영화도 같이 보고 싶었고, 등산도 같이 가고 싶었고, 여행도 하고 싶었다구요... 친구가 중국 여행 가자고 했을 때 그 때 우겨서 같이 갈 걸 그랬어요. 당신이 그랬잖아요. 나중에, 나중에 다 해준다고... 나중에..."

 

그 나중은 언제일까. 아내는 이제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태가 됐는데 말이다. 그래서 남편의 고백은 어리석으면서도 가슴 아프다.

 

"당신이야 언제나 건강할 줄 알았지..."

 

아내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뜨거운 감정을 다시 느끼고 확인하고 싶어 애를 쓴다. 정말 그런 감정이 있기나 했었는지 다시 한 번,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느끼고 그 마음 그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남편도 드디어 아내의 그 마음을 알고는 미안함과 사랑이 섞인 고백을 한다.

 

연극 속 부부의 모습에는 내 주위에 있는 여러 부부의 모습이 골고루 들어있다. 식구들 기다리며 늘 소파에 누워 잠드는 선배, 나이 차 많이 나는 남편이 하도 버럭 소리를 질러대서 깜짝 깜짝 놀라는 병이 생겼다는 후배, 잔소리꾼 남편 때문에 늘 소화가 안 된다는 친구, 남편에게 눌려 하고 싶은 말 못하고 살다 보니 언제부턴가 말만 하려면 더듬거린다는 할머니, 그저 자기만 아는 남편 참아주기에 이제는 화가 난다는 할머니까지.

 

남편들도 할 말이 많겠지만 나는 묻고 싶다. 돈 벌기 힘들고 피곤하다고 늘 미루기만 하다가 언제쯤이나 돼야 아내들의 눈을 들여다 볼 거냐고. 아내도 자식도 누구 덕에 살았는데 이제와서 자기를 부담스럽게 여기면서 말도 섞으려 하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고. 

 

이제 남편들 순서다. 할 말이 많다고들 하는데, 아무도 막지 않는다. 소통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시작된다. 할 말 많은데 참는 거라고 하지 말자. 아무도 참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죽기 전에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지금 하자. 나중에 고맙다고 사랑했었노라고 고백하지 말고 지금 하자. 같이 텔레비전 보고, 영화 보고, 등산 가고... 그러고 보면 사람의 소원이라는 것이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그런데 나 역시 왜 그 소원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가 바쁘다고 하니까, 집에 오면 늘 지쳐 눕기 바쁘니까. 이게 바로 나를 포함한 지금 우리 부부들의 현주소일까.

덧붙이는 글 | <환상의 죽음> 한숙희 작, 권은아 연출, 출연 : 이일섭, 조주현, 최초우, 지미리 / - 5월 30일까지, 대학로 두레홀 1관, 070-8804-9929  


태그:#환상의 죽음, #부부, #죽음, #약속, #노년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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