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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전 9시께, '삼성 백혈병' 유가족 정애정씨가 서울 강남구 서초동 삼성사옥 앞에 대기하던 취재진 버스에 올라 "유가족에게도 생산라인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15일 오전 9시께, '삼성 백혈병' 유가족 정애정씨가 서울 강남구 서초동 삼성사옥 앞에 대기하던 취재진 버스에 올라 "유가족에게도 생산라인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 권박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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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15일 처음으로 외부에 문을 열었다. 집단 백혈병에 대한 의혹을 풀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이날 오전 10시 30분께, 용인 기흥공장에서 기자 100여 명을 대상으로 반도체 제조공정 설명회를 열고 5라인과 S라인 생산공정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삼성전자는 "국내외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 학술단체 등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의혹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유가족들이 추천하는 전문가도 공신력만 있다면 포함시키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가족들은 "기자 공장 견학시키면서 쇼하지 말라"는 반응이다. 정말 투명하게 의혹을 밝히려면 유가족이나 노동자들이 추천하는 전문가도 현장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가족 한 명은 삼성 서초동 사옥 앞에 대기하던 취재진 버스에 올라타서 "나도 공장에 들어가겠다"고 맞섰다.

피해유가족 "기자들은 들어가는데 내가 왜 못 가냐"

기자들이 경험한 반도체 생산라인은 최첨단 시설답게 깔끔했다. 방사선 설비에는 '(안전장치인) 인터락 가동 중', '방사선 주의' 등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보호장구 보관함은 많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방독면 등 법적 요건에 맞춘 도구들을 갖추고 있었다. 한 구석엔 사용하는 물질을 적은 물질안전보건자료(MSDS)가 비치돼 있었다.

피해 유가족들은 지하실 배관사고를 주장했지만, 취재진을 안내한 공장 관계자는 "지난 10년 근무하면서 배관에서 사고가 난 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기분 탓인지 약간의 약품 냄새가 난다"는 것이 기자들의 의견이었지만 공장 직원들은 "잘 느끼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나마의 공기도 그대로 바닥 환풍구로 빨려들어간다고 했다.

라인에 들어갈 때는 눈만 빼꼼히 내놓았을 뿐 발끝부터 머리까지 여러겹의 방진복과 장갑, 안전화, 마스크를 썼다. 제품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말하자면 사람보다는 제품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이런 답답한 옷차림으로는 화학물질이 직접 몸에 닿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설명회에서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메모리담당 조수인 사장은 "반도체나 LCD 제조과정에서 백혈병에 걸릴 리스크는 전혀 없다", "어떤 경우든 인터락 해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기계에 대해서도 "안전성을 확신한다"고 했고, 유기용제 냄새 부분에 대해서도 "법적 기준의 10% 이하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유해 화학물질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고 해도, 사측이 미리 준비한 '라인투어'에 1시간 참여한다고 해서 비전문가인 기자들이 새로운 의혹을 캐내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사실 우리가 본다고 뭘 아느냐"는 말이 나왔다.

게다가 이렇게 기자들이 본 생산라인은 백혈병 피해자들이 집단으로 발생한 그 현장도 아니다.

이번에 공개된 5라인과 S라인도 생산설비가 개선됐다. 가장 설비수준이 좋은 S라인은 2005년 자동화 로봇이 들어섰다. 5라인에서는 직접 화학물질을 놓고 수동으로 제품을 세척했다는 것이 노동자들의 주장이지만, 지금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가장 환자들이 많았던 1~3라인 설비는 아예 폐쇄된 뒤 생산이 아닌 검사 공정으로 바뀌었다.

삼성 "기업비밀이지만 공개... 더 소통하겠다"

이날 기자버스에 탔던 유가족 정애정씨의 주장도 "그동안 어떤 것이 바뀌었는지 직접 보고 옛날 상황과 지금의 차이를 기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삼성 기흥공장 1라인에서 일했던 그의 남편 고 황민웅씨는 지난 2005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씨 자신도 5라인에서 11년 근무한 바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남편의 작업환경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다.

정씨는 "(방해 안 하고) 군소리 없이 기자들 꽁무니만 따라다니겠다"고 호소하기도 했고, "나를 태우고 가든지 행사를 취소하든지 해라"고 협박(?)도 했다. "이미 (언론 공개에 대비해) 비정규직 아줌마들이 바닥 닦고 지하 닦고 한 것 아니냐"고 현장 은폐를 의심하기도 했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도 "반대 입장도 들어봐야 객관적이지 않겠느냐, 오늘 행사는 극히 주관적이다"고 맞섰고, 이종란 노무사는 "기자들이 좀 '같이 가자'고 해주세요"라고 말하다가 눈물을 쏟았다.

사실 유가족과 반올림이 보여달라고 요구한 것은 공장 현장보다는 화학물질 등 삼성반도체 생산 공정에 대한 자료였다.

노동부가 삼성전자 등 반도체산업체 13개사를 상대로 실시한 주요 화학물질 취급현황, 방사선 발생장치 사용현황 일제조사 결과는 여전히 감춰져 있다. 각 기업들의 '영업비밀'이라는 이유에서다. 지난 7일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대정부 질의에서 자료공개를 요구하자 정운찬 국무총리는 "하루 이틀 안에 답변을 주겠다"고 했지만 아직 답은 없다.

생산라인에서 벤젠을 검출했다고 보고한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보고서 역시 비공개 상태다. 다만 사측이 설명회에서 "이는 공기 중이 아닌 벌크 시료를 채취한 결과였다"고 반박했을 뿐이다. 삼성전자는 "이후 시료 조사도 화학시험연구원과 미국 쪽에 다시 의뢰했는데 벤젠이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기자들 "알쏭달쏭... 공장 본다고 알겠나"

그동안의 백혈병 의혹에 대해 하주호 삼성전자 홍보팀 상무는 "역학조사 결과 인과관계가 있으면 당연히 개선하고 싶다, 그런데 관계가 없다고 나오지 않느냐"면서 "공청회든 토론회든 유족들이 요구하면 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조수인 사장 역시 "라인 설비 배치도 기업 비밀 중 하나지만 공개 안 한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행사의 의미를 강조했다. 또한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는 못하겠지만, 이 일을 시작으로 더 안전한 작업환경을 만들겠다, 좀더 소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조가 있어야 노동자들이 작업환경 안전에 대한 주장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노사협의회를 통해 안전문제도 이야기하고 있고, 노조는 위 임직원들이 선택할 문제"라면서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반올림'은 이날 배포한 자료에서 "박지연씨 발인이 있던 지난 2일 삼성은 백혈병 피해 노동자 주장들을 부정했고, 지난 6일에는 반도체 공장을 '꿈의 일터'로 만들겠다고 밝혔다"고 강조했다. 일련의 흐름을 볼 때, 삼성이 나노시티에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날 정애정씨는 남아있는 기자들에게 "아마도 오늘 기사에는 삼성이 보여주는 대로 '작업장은 깨끗했고 안전해보였다, 문제를 찾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겠느냐"면서 "그것만으로 기사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사측은 "다음에 검토해보자"는 답만 되풀이하다가 버스를 포기한 채 택시를 이용해 기자들을 이동시켰다. 결국 '꿈의 일터' 반도체 생산라인은 기자들에게만 그 문을 열었다.


태그:#삼성 백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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