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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의 외과주임교수이자 대한임상종양학회이사장인 정상설박사께서 헤이리로 나들이를 하셨습니다.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조광호 신부님의 40년 작업을 집대성하는 헤이리에서의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 사모님과 함께한 걸음이었습니다.

평소, 빠듯한 업무의 유일한 탈출구로 미술작품을 가까이 하셨던 성품의 반영입니다. 늘 서울성모병원의 유방센터를 지키며 하루에도 50여명의 유방암 환자들을 진료하고 몇 건의 유방외과수술을 진행합니다.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유방은 세상 생명의 영속성을 지켜내는 기능 외에도 아름다움과 자존의 상징입니다. 몹쓸 병으로 가슴을 도려낸 여자의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기 힘든 부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유방암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생빈도가 높은 여성암이 되었습니다.

이분이 다른 의사와 차별되는 것은 유방암 수술을 하기 전에 꼭 환자를 안아준다는 것입니다. 가장 외롭고 두려운 시기에 집도의사의 포옹이 가져다줄 안정과 위안은 그 외과의사의 의술보다도 더 큰 심리적 치유효과를 낼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병은 의술만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님을 '허그 hug'로 입증하고 있는 정상설 박사와 함께 '조광호 40년의 흔적 Korea Fantasy'전을 관람하기위해 헤이리의 갤러리를 방문한 정박사의 부인
 병은 의술만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님을 '허그 hug'로 입증하고 있는 정상설 박사와 함께 '조광호 40년의 흔적 Korea Fantasy'전을 관람하기위해 헤이리의 갤러리를 방문한 정박사의 부인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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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이 마치 지옥으로의 초대에 임하는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는 환자는 훨씬 긴장이 완화된 상태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집도의사의 포옹을 지켜본 그 환자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평소 베풀어주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주어 유방암 수술 후에 부부의 금실이 더 좋아졌다,는 고백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서울성모병원의 유방암 환자들이 조직한 가유회(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유방암 환우회)라는 투병과 봉사모임이 있습니다. 그 모임의 회원들은 모두가 '지옥의 문'으로 들어갔다 오신 분들이지요. 그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회원들은 정박사께서 제창한 환우안아주기와 불우이웃돌보기 등 봉사활동을 지속하는 것으로 동병상련의 정을 13년째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지인의 유방검진을 받는 것을 계기로 정박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첫 인연이 계속되어 지난해 가유회의 모임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모임은 회원들의 봉사를 격려하고 상호간의 희망과 행복을 나누는 자리였습니다. 뼈저린 슬픔을 기초로 한 이 조직의 회원들은 자신의 등에 진 아픔의 무게 위에 힘겨워하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기꺼이 얻어 받는 즐거운 희생을 실천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암은 재발과 전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절망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이 자조모임을 통해 사후의 재발에 대한 위험을 줄이고 유방절제술 후에 유방의 재건성형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등의 신체적 후유증의 방지 외에도 불안과 우울이라는 정서적 흔들림을 최소화하면서 동료들의 지지를 통해 재활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정박사님은 그 모임을 있게 한 장본인이며 현재까지도 가장 큰 힘이 되는 버팀목입니다.
그 자리에서도 일일이 회원들을 안아주고 회원들이 궁금해 하는 수술 후의 개별적인 의문들에 대해 질문 받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늘리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더 많은 삶'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회원들은 정박사님의 애정에 김수희의 '애모'를 개사해서 합창하는 것으로 답했습니다.

"교수님 앞에서 유방 보이며 오늘도 떨고 있구나
세월에 병들은 우리 가슴은 무너져 없어 졌는데~

얼 만큼 더~ 견뎌야 완치가 될 수 있을까
교수님 말씀 한 마디에 울고 웃는 우리 환우들

교수님 앞에만 서면 나는 왜 말도 못하나
교수님 등 뒤에 서서 말 못 한 거 후회 하는데

유방 때문에 함께 가야 할 우린 당신의 환자

용기와 희망이 있는 한 유방암은 별거 아니야
희망과 사랑이 있는 한 가유회는 영원 할 거야"

저는 팔순의 할머님과 손자뻘 아가씨 환우들의 그 투병 모임에서 웃음과 눈물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의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의술만이 아니라 세상을 껴안을 길고 넓은 팔이라는 것도…….

서울성모병원의 정신과 환우들을 대상으로 10여 년 동안 서예로 예술치료봉사를 도왔던 소엽선생은 정 박사님을 '자임慈任'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아끼지 않는 분'이라는 것과 글자 앞뒤를 바꾸면 '임자'가 되므로 '평생을 함께해 온 나이 지긋한 부부사이에서의 편안한 호칭처럼 환자들과 격의 없음'을 함의含意한 호칭이지요.

지난해 가을 최근에 읽은 감명 깊은 책이라며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라는 책을 선물해주셨습니다. 그 책은 한 환경운동가가 실천해온 자연과 인간사이의 참된 관계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박사님은 이렇듯 참된 소통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사와 환자 사이든, 나와 이웃 사이든, 사람과 자연사이든…….

의대에서 강의할 때 제자들에게는 일기일회一期一會임을 강조하는 엄한 교수입니다. 법정스님의 법문집 '일기일회'에서는 말합니다. '모든 것은 생에 단 한 번,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이 말이 더욱 현실인 것은 환자의 진료이고 더욱 절실한 곳은 수술실입니다. 환자에게 가장 최선인 질료와 처방은 단 한번이라는 것입니다. 개복을 기다리는 환자를 수술대에 눕히고 메스를 든 의사에게 'here and now'는 어떤 철학자보다 통절痛切한 명제입니다.

소엽선생은 정박사님께서 좋아하는 굴원의 '어부사' 한 구절을 붓글씨로 쓰서 선물했습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라'는 말에서 온 '창랑청탁滄浪淸濁'이라는 말입니다.

정박사님은 그 글씨로 올해의 연하장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갓끈을 씻는 물이 되거나 발을 씻는 물이 되거나를 스스로 할 탓입니다.

정박사님은 늘 '느림'을 추구합니다. 읽은 책중에서 '빠른 마음은 병들어 있다. 느린 마음은 건강하다. 고요한 마음은 거룩하다.' 이 말에 공감하고 '병든 마음'이 아니라 '건강한 마음'을 추구하고 '거룩한 마음'에 도달하는 것을 궁극으로 삼습니다.

또한 늘 환자들과의 진료약속과 수술스케줄에 매인 삶을 살고 있는 만큼 '자유'를 동경합니다.

조광호신부의 작품을 보기위해 전시장을 나오셨다가 두 번이나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간혹 조신부님의 인천 작업실도 왕래하곤 하시는 사이였습니다.

정박사님 부부는 큐레이트의 모든 설명에 정중하고도 주의깊게 귀를 귀울렸습니다.
 정박사님 부부는 큐레이트의 모든 설명에 정중하고도 주의깊게 귀를 귀울렸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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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나와 모티프원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차를 우리는 동안 다시 느림에 대한 얘기를 이었습니다.

"일전에 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저보다 훨씬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친구에게 부러움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네가 선택한 것 아니니?' 저는 크게 한 방 먹고 말았습니다."

모티프원의 서재에서 함께한 정박사님 부부. 정박사님의 말씀중에는 늘 '느리게 사는 법'과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한 동경이 담겨있습니다.
 모티프원의 서재에서 함께한 정박사님 부부. 정박사님의 말씀중에는 늘 '느리게 사는 법'과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한 동경이 담겨있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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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2월에 아프리카로 떠나는 소엽선생과 저를 단골 일식집으로 초청해 점심을 사시면서도 '자유로운 삶'에 대한 부러움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정박사님을 아직 필요로 함으로 매인 몸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설박사는 1980년대 후반, 유방의 형태를 보존하면서 암조직만을 절제하는 수술법인 유방보존술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분으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유방암 전문의 중의 한사람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홈페이지 www.motif.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정상설, #서울성모병원, #유방센터, #유방암, #가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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