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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사진이 역사의 물줄기를 튼다

 

올해는 4 ․ 19 혁명 50돌인 바, 그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1960년 3 ․ 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당시 정부 여당은 3인조 9인조 등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상천외의 부정선거를 치렀다. 선거 결과 어느 지역에서는 투표인보다 이승만 이기붕 후보의 득표수가 더 많아 물건 값을 깎듯이 득표수를 깎아 발표하는 웃지 못 할 촌극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이 부정선거의 작태를 마산시민들이 보다 못해 그날 밤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아 7명이 사망하고 800여 명이 부상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시위의 원인이 부정선거에 있었음에도 당국은 불순용공세력의 조작으로 몰고 갔다. 당시 마산경찰서 한 형사주임은 발포로 숨진 학생의 호주머니에 불온 삐라를 집어넣는 조작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당시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떠올랐다. 이를 당시 부산일보 마산주재기자 허웅씨가 용감하게 특종 보도했다. 이 사진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로 전파되었으며 성난 민심에 불을 붙여  4 ․ 19 혁명의 결정적인 도화선 역할을 하였다.

 

 

NARA에서 본 한국전쟁

 

나는 2004년 1월 31일부터 3월 12일까지 40여 일간 오마이뉴스 1000여 누리꾼들의 성금으로 백범 선생 암살범 안두희를 추적한 권중희 씨와 함께 워싱턴 근교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갔다. 그때 5층 사진자료실에서 'Korea War' 파일을 들치다가 무릎을 쳤다. 영어에 까막눈인 내가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하고서. 거기에는 한국전쟁의 실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산길 들길 아무데나 지천으로 흩어져 있던 시체더미들, 쌕쌕이(전투기)들이 염소 똥처럼 마구 쏟아 떨어뜨리는 포탄, 포화에 쫓겨 가재도구를 등에 지거나 머리에 이고 허겁지겁 뛰어가는 피난민 행렬, 배만 불룩한 아이가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장면, 흥남부두에서 후퇴 수송선에 오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 유엔군들이 다급하여 군복을 입은 채 그대로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수송선에 오르는 모습,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꾸역꾸역 곡예 하듯 남하하는 피난민 모습, 꽁꽁 언 한강을 괴나리봇짐을 이고 진 피난민들이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건너는 모습, 부산 영주동 일대의 판자촌, 수원 역에서 남행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피난민들….

 

순간 나는 이 사진들을 가져다가 우리나라 사람, 특히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솔직히 우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진실에 얼마나 목마르고 있는가. 다행히 자료실에서 스캔은 허용된다고 하여, 재미 동포 주태상 씨와 박유종 씨의 도움을 받으며 40여 일간 수십만 매의 사진자료를 들춰 그 가운데 480여 매를 엄선하여 복사해 왔다. 귀국 후 곧장 사진전문 눈빛출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을 펴냈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언론들이 대서특필하고, 독자들의 성원도 컸다.

 

 

다시 NARA에 가다

 

나는 분외의 성원에 NARA(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서 미처 들춰보자 못한 사진들이 눈에 어른거려, 다시 2005년 11월 27일에 워싱턴 행 비행기에 올랐다. 1차 방미 때 곁에서 도와주신 박유종(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 씨가 다시 소매를 걷어주셨다. 12월 10일까지 10여 일 동안 자료실을 샅샅이 뒤져 모두 770여 매의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해 와서 <지울 수 없는 이미지2>를 엮었다.

 

1, 2차 리서치(탐사) 작업에도 아쉬움이 남아 다시 2007년 2월 26일부터 3월 12일까지 NARA에 갔다. 제3차 리서치(탐사) 작업 수확은 모두 496 컷으로 대부분 종군기자들이 찍은 한국전쟁 사진들이지만, 여기에는 유엔군들이 인민군과 중국군에게 노획한 문서 파일 50여 매도 담겨 있다.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머문 1~3차 기간 동안 나는 매일 가장 먼저 출근하여 최종 퇴근자로 많은 사진과 기록물들을 원 없이 보고 열심히 스캔하였다. 50여 년 묵은 먼지를 마셔서 목이 괄괄한 고역도 있었지만 NARA에 소장된 수십만 장의 사진 가운데 한국전쟁의 진실과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사진을 손에 넣을 때는 마치 자넘이 고기를 낚는 낚시꾼의 기쁨 이상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전쟁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 1, 2, 3> 3권을 펴냈다.

 

 

눈에 익은 사진

 

지난 3월 19일 저녁, 안중근 순국 100주년에 관한 자료를 얻고자 인터넷을 검색하는데 한 언론사 웹 사이트에서 내 눈에 무척 익은 한국전쟁 사진이 있기에 무척 반가워 사진 설명을 살펴보았다.

 

'‣ 1952년 3월 3일 전쟁터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국군 취사병의 모습 / 미 국립기록보관청((NARA) ․ 000'

 

이 사진을 보고 '000'라는 민영 뉴스 통신사 웹 사이트로 가서 검색했더니 2007년 6월 25일자에 "6 ․ 25 '지울 수 없는 이미지'- 부식 준비하는 국군 취사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전쟁 발발 57주년을 맞은 25일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담은 사진 250여 점을 엮은 사진집 '지울 수 없는 이미지'가 출간됐다. 소설가 박도 씨가 미 국립기록보관청(NARA)이 보관하고 있는 한국 현대사 관련 파일들 중에서 발굴한 것이다"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내가 이 사진을 NARA에서 입수한 정보를 원래 메모지에서 추적하자 2007년 2월 28일에 얻은 것으로, 그날 꺼낸 숱한 상자에서 이 사진 파일을 보고서 매우 짜릿한 손맛을 느낀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사실  NARA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한국전쟁 사진 자료가 있지만 그 가운데 쓸 만한 것은 모래톱에서 진주 찾기처럼 힘들다. 대부분 사진은 미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쪼코릿'이나 '씨 레이션'을 나눠주는 장면이나 그들의 전공을 자랑하는 전투 장면으로, 당시 전쟁 중 신음하는 우리 백성들의 참담한 생활상이나 학살 장면은 찾기가 매우 힘들었다.

 

일반 독자들이 이 언론사의 취사병 사진 보도만 보면 잘못이 없을 것이다. 언론사에서 000 통신사의 사진을 제공받아 보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다. 그 기자의 이름은 없었다. 한국전쟁 후 미국은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을 모두 모아 NARA에 보관해 두다가 50년이 지난 뒤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진의 저작권은 원래 NARA에 있지만 50년이 지났기에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1차분은 누리꾼들이 모아 준 성금으로 갔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오마이뉴스를 통해 <사진으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30회 연재하여 공개한 바 있다. 그 연재물은 지금도 지구촌 곳곳을 돌고 있다. 그리고 입수해온 원본 파일을 CD에 담아 오마이뉴스사와 백범기념관,  우당기념관, 민족문제연구소 등 유관단체에 기증하였다. 하지만 2차와 3차 검색작업에 따르는 미국행 비용은 내 자비(일부 출판사의 도움)로 메웠다. 

 

이 사진집이 나오자 작가, 출판사, 여러 기관에서 사진사용을 간청해 오기에 거의 다 게재를 허락해 주었다. 다만 염치도 없이 수십 장을 달라거나 심한 경우는 전 파일을 자기들에게 건네 달라는 무모한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는 출판물이 나오면 나에게 우송해 주거나 간혹 고마움의 표시로 자그마한 기념품까지 보내주기도 했다.

 

 

염치없는 언론사들

 

요란한 보도와는 달리 정작 사진집 판매는 매우 부진하여 나도 여태 여비의 절반도 건지지 못했고, 아마 출판사도 나에게 미리 건넨 선인세도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앞뒤 일들을 살피자 대언론사가 개인의 수고를 가로채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에 마침 기사 위에 있는 특별취재팀 기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Original Message-----

From: "박도"

To: ihooo@oooo.com

Cc: 625@oooo.com

Sent: 10-03-19(금) 23:08:45

Subject: 사진출처 문의

 

안녕하세요. 저는 작가 박도입니다. 2004년, 2005년에 이어, 2007년 세 차례 미국국립문서기록보관청에 가서 매우 힘들게 한국전쟁 사진을 입수해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귀 신문에 연재된 6.25전쟁 60주년 특집 '나와 6.25'를 보다가 눈에 익은 사진 - 곧 1952. 3. 3. 국군취사병의 모습- 이 있기에 그 출처를 보니 'NARA / 000'로 되어 있네요. 사진이 보관된 곳은 'NARA'가 맞습니다만 000의 어느 기자가 'NARA'에 가서 찾아왔나요?  사실 이 사진을 한국에 가져오기까지 엄청난 노고가 있었습니다. 대언론사에서 사진입수 경위를 좀 더 정확하고 자세하게 밝히는 게 옳지 않을까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제 전화 010-0000-0000

 

이튿날은 토요일로 신문사가 쉬는 날인 모양으로 다음날인 3월 20일 오후에 담당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기네는 000 통신사의 사진을 썼기에 하자가 없지만 앞으로는 내 이름을 넣어주겠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고 했다. 나는 아직 출판사와 계약기간 중이므로 내 이름을 넣는 문제는 출판사와 상의하라는 말로 즉답을 피한 채, 000 통신사와 눈빛출판사에 전화로 경위를 물은 바, 통신사에서는 신간 보도용으로 출판사에 사진파일을 요청했고, 출판사에서는 그 요청에 응했다는 답이었다. 그렇다면 신문사에서는 통신사 보도 사진 입수경위는 보지 않거나 아니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 개인의 노고는 아예 무시하고서 전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그 기자가 가르쳐 달라는 출판사 전화번호를 가르쳐주며 이미 보도된 사진의 출처를 밝혀줄 것을 요구하자, 그는 정정 보도는 불가하다고 했다. 신문사나 통신사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사진 발굴자(제공자)는 사라지고, 이대로 다른 매체에서 또 이를 인용 보도한다면 그들은 NARA 근처에도 가지 않고 마치 자기네가 애써 발굴한 것이 되지 않는가.

 

사실 한국전쟁 사진과 같은 귀중한 기록물은 국가가 나서서 하거나 대형 언론사에서 대대적으로 발굴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그들의 오만한 작태가 얄미워 몇 마디 써보았다.

 

아무튼 사선을 넘나들며 한국전쟁 사진기록을 남긴 종군기자들에게 깊은 경의를 드린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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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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