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은 눈 감을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양민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은 눈 감을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을 보여준다. ⓒ 작은 연못

"<작은연못>, 쪽팔려서 봤다."

아줌마를 넘어 아이 엄마가 되고 나니 가리는 게 많아졌다. 임신 때 들었던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얘기만 들어라"라는 주변 조언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버릇이 아직 남았는지 몸에 좋은 음식과 생필품만 찾게 됐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누가 다치고 죽는 영화는 꺼리고 따뜻하고 훈훈한 영화들에 빠졌다. 영화 <작은 연못>(감독 이상우) 시사회에 가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노근리 사건'을 다룬 영화라는 소리에 멈칫했다. '노근리 사건'이 뭔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피난민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사건 아닌가. 갈등했다.

'공짜로 영화보는 것도 좋지만 이 피에 젖어 있을 영화를 꼭 볼 필요가 있을까?'

마음의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문성근의 한 인터뷰 기사가 눈에 들어 왔다. AP에서 은퇴한 한국기자가 "노근리 사건을 특종보도한 AP기자로부터 '한국에선 왜 이 사건을 영화화하지 않느냐'는 연락을 받았다"고 그에게 전했다는 것이다. 그 얘길 듣고 "부끄럽고 쪽팔려" 영화 만들자고 충무로에 소문을 냈다는 문성근.

그 감정에 '급'전염됐다. 1950년 7월에 일어나 1994년 '노근리양민학살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낼 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유족들이 한국과 미국 대통령에 탄원서도 보내고 언론에 몇 번 보도돼도 한국과 미국 정부는 꿈쩍 안 한, 모두에게 '잊힌 사건'이었다. AP통신이 비밀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원문을 보도하기 전까지….

50여 년만에 역사의 봉인이 벗겨진 이 진실을 다시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그래, 나도 '쪽팔려서' 봐야겠다, 맘을 크게 먹고 극장으로 향했다.

평화로운 마을에 마음 홀리고, 전쟁의 진실에 마음 졸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마음 졸일 필요는 없었다.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충북 영동지역을 옮겨 놓은 산골짜기 마을 대문바위골은 평화로웠다. 전쟁이 터진 지 1달여가 지났지만, "누가 이 산골짜기까지 오겠어유~" 하는 구수한 사투리에 담긴 일상은 소소했다.

아이들은 가을에 있을 전국노래자랑 연습 준비로 바빴고, 할아버지들은 바둑을 즐겼다. 노름한 남편 때문에 부인이 애를 업고 집을 나섰고, 청춘남녀는 풋풋한 '연애질'에 마음 설렜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그런 예쁜 풍경에 나도 몰래 전쟁을 잠시 잊었다.

물론 그 평화로움의 끝은 우리가 아는대로다. 여전히 일본말 하는 조선인을 앞세우고 마을에 들어온 미군들에 쫓겨 피난길에 나선 대문바위골 사람들. 일제 때도 지켜줬다는 대문바위에 모두들 합장을 하고 떠났지만, 아이들의 노래자랑이 예정됐던 가을에 다시 마을로 돌아온 이들은 얼마 없었다.

영화는 우리가 몰랐던, 혹은 주의깊게 보지 않았던 사실들도 보여준다. 피난민들에게 퍼부어지던 총질은 단 한 번이 아닌, 3일 내내 이어졌다는 것. "여자들만 있으면 쏘지 않을지도 모르잖유" 하며 한밤중에 남자들이 빠져나가고 아이와 노인, 여성들만 남았는데도 총질은 멈추지 않았던 것.

그 총질이 "빨갱이도 아닌 미군이 우리를 왜 쏘겠슈?" 하던 순진무구한 대문바위골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미군에 의해 계속됐다는 것. 그 미군들 역시 "이들은 분명한 민간인들입니다" 상부에 보고했지만, AP통신이 밝힌 '그들(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

우리가 이 영화를, 역사의 진실을 두 눈 질끔 감지 못하게 하는 많은 이야기를 전한다.

"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해하지 마세요"

 평화로웠던 대문바위골 사람들. <작은 연못>에 참여한 142명의 배우와 229명의 스탭은 모두 노개런티로 노력 봉사했다.

평화로웠던 대문바위골 사람들. <작은 연못>에 참여한 142명의 배우와 229명의 스탭은 모두 노개런티로 노력 봉사했다. ⓒ 작은 연못


영화 시작 전, <작은 연못>의 연출실장이 두 가지 당부를 했다. 하나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 하지 말라"였다. 그의 말대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문바위골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었다. 그 수많은 주인공은 단 한 컷 나온 송강호부터 유해진, 문소리, 고 박광정, 전혜진, 문성근 등 142명의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연기했다.

배우들뿐만 아니다. 229명의 스태프들과 특수효과, 특수분장, 영화음악의 김민기까지 모두 '노력봉사'로 이루어졌다. 연출실장이 말한대로 정말 "먹고 사는 것과 상관없이 정성을 다해 만든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만드느라 영화제작에 8년이나 걸렸다.

그의 또 다른 당부는 "이 영화에서 정치적 구호를 기대하지 말라"였다. '미군은 죽일 놈'을 기대하고 영화를 보면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그 역시 맞았다. 미군도 상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군인일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반미영화'라기 보다는 '반전영화'에 가깝다.

영화 초반에 선생님이 직접 일러주기도 한다. 여자아이가 "이 쑥맥아"라고 놀리자 남자아이가 "이 지지배야"라고 대꾸하면서 말다툼으로 번지자 아이들에게 해주는 말. "얘들아, 왜 노래를 하는지 아니? 싸우지 말라고 노래하는 거야." 너무 선도적이라고? 영화를 다 본 후, 돌아보니 그렇다는 거지. 결코 지루한 계몽영화는 아니다.

또 다른 주인공이 되어주세요

이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에 대해 얘기해야겠다. 영화 시작과 함께 스크린엔 100명의 이름이 떠오른다. 극장 상영용 필름 한 벌 비용은 100만원. 한 사람이 1만원씩 100명을 모아 상영용 필름 한 벌씩을 만드는 것. 시사회 전 관객들에게 그 백 명 중 한 명이 돼 달라는 봉투가 전해진다. 누가 강제하지 않는데도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오면서 모금함에 봉투를 넣는다.

"이거 공짜가 아니라 더 비싼 영화 본 거잖아."

볼멘소리로 말하면서도 다들 싫은 기색이 아니다. 이들의 이름은 다시 4월 15일 정식 개봉 때 각 극장 상영관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사회를 보지 않고도 <작은 연못> 공식 사이트(http://www.alittlepond2010.co.kr)를 통해 필름 구매 캠페인에 참여할 수 있다.

김민기의 '작은 연못'은 이렇게 노래한다.

"깊은산 오솔길옆 자그마한 연못엔 /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 먼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마리 /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 깊은산 작은 연못"

그 작은 연못의 이야기를 전해줄 이들이 바로 지금 손에 1만원을 들고 있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그 주인공들에게 노래자랑 연습하던 아이들이 '천리길'을 들려준다.

"동산에 아침 햇살 구름 뚫고 솟아와 / 새하얀 접시꽃잎 위에 눈부시게 빛나고 / 발 아래는 구름바다 천길를 뻗었나 / 산 아래 마을들아 밤새 잘들 잤느냐 / 나뭇잎이 스쳐가네 물방울이 날으네 / 발목에 엉킨 칡넝쿨 우리 갈길 막아도 / 노루 사슴 뛰어간다 머리위엔 종달새 / 수풀 저편 논두렁엔 아기 염소가 노닌다 /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작은 연못 노근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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