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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초지는 오일파스텔의 그래스 그린이 아니고 어두운 모스 그린으로 바뀌었다. 스위스 국경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기차 안이다. 신기하게도 풍경은 완연히 달라졌다. 차 창 밖으로 내달리는 산등성이의 실루엣이며 초록 빛깔이 우리나라와 아주 흡사하다.

 

어디선가 꼬릿꼬릿한 발 냄새가 풍겨 온다. 옆 좌석의 눈썹 짙은 이탈리아 남자가 신발을 벗은 채 맞은 편 의자에 길게 발을 걸쳐 놓고 앉아 있다. 남자는 마주 앉은 여자와 수다가 늘어진다. 실내는 더운 기운이 가득하고 창을 통과하는 태양빛도 심상치 않다. 라디오의 음악소리도 간간이 들려온다. 베네치아를 향해 가는 치살피노 기차 안은 마치 통일호 같다.

 

스위스 기차 안에서는 상상도 못할 풍경들. 인터라켄에서는 많은 등산객들이 타고 내렸지만 등반에 지쳐 잠이 들거나 흐트러진 자세의 서양 사람들을 본 기억이 없다. 취리히, 루체른, 인터라켄에서 몽트뢰를 거쳐 베네치아를 가는 동안 차츰차츰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거대하고 뻣뻣한 체구에 독일어를 쓰던 취리히 사람들, 한층 밝은 표정으로 키도 조금은 덜 크고, 혀끝으로 불어를 굴리던 몽트뢰 사람들, 조금은 소란스럽고 키도 얼추 만만한 이탈리아 사람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다.

 

베네치아(venezia)에 도착해 산타 루치아 역을 빠져 나오니 뜨거운 태양빛에 눈이 부시다. 스위스에서는 잊고 있었던 계절을 비로소 실감한다. 수상버스인 바포레토 승선장 주변엔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하고, 그 사이를 비집고 물내음이 훅 끼쳐온다.

 

150여개의 운하가 흐르고, 4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되는 117개의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는 물의 도시. 골목골목이 미로처럼 뻗어있고 물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되는 베네치아.

화려한 가면들과 가죽 가방들이 주렁주렁한 노점상들, 그 틈을 비집으며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행자들, 스위스로부터 로마로부터 몰려든 관광객들, 이 모든 풍경들이 뒤범벅되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내리는 한낮의 베네치아는 소란스러운 관광지처럼 들 떠 있다.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들은 저절로 그늘이 되어 태양을 피해 걸어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물길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다 보면, 뱃머리가 유연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곤돌라를 종종 만나기도 한다. 마치 소인국에 온 것처럼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물어물어 식당을 찾았다.

 

철사심을 박은 듯 딱딱한 면, 팁을 주지 않았다
 

오징어 먹물 파스타는 베네치아의 명물이고, 가이드북에서 추천한 이 식당은 파스타를 잘 만든다 하니 당연 우리의 메뉴는 오징어 먹물 스파게티와 맥주.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손님은 우리 가족뿐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종종 왁자하게 식당에 들어와, 앉지도 않고 빵과 음료수를 먹고 나가곤 했다. 선 채로 음식을 먹으며 떠드는 그들의 모습이 유쾌해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테이블 비용을 따로 계산에 넣는 곳도 있다. 1인당 자릿세가 5000원이나 하기도 한다. 우리 가족이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자릿세로 1만5000원이나 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돈이 아깝지만, 선 채로 음식을 아구아구 먹을 배짱이 없는 한, 그냥 음식값의 일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 테이블에 있는 빵은 다 따로 계산해야 한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노려보기만 할 뿐 테이블 위의 빵은 항상 경계의 대상이다. 하여 낯선 곳에서의 식사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피곤하기 그지없다.

 

스위스에서 굶주렸던(한 끼에 10만원이나 지불했음에도 굶주려야 했던 사연은 이미 밝혔다) 우리 가족이 이탈리아에 발을 딛자마자 고향에 온 듯 푸근했던 건 음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이다.

 

그래도 피자와 파스타의 나라 이탈리아인데, 이제 배 좀 채울 수 있겠구나, 정 안 되면 피자만 내리 먹어주지 뭐. 그러나 시커먼 먹물 오징어 스파게티를 베어 무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또 음식이 나를 배반하는구나, 가이드북 저자가 대체 누구야, 파스타가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 말라, 돌아가면 당장 인터넷에 악평을 올려야지.

 

면은 설익어서 철사심을 박은 듯 딱딱하고 짠맛이 심한데다 비릿한 냄새까지. 억지로 먹어보지만 양은 또 왜 그리 많은지. 도저히 더는 먹을 수가 없어서 정중하게 나는 말했다. 너무 짜고 익지도 않았다고 하니, 하얀 앞치마를 길게 두른 웨이터는 물어보지도 않고 다시 만들어 주겠다며 먹던 음식을 걷어가는 폼이 번갯불에 콩 볶을 태세다. 아니, 됐다고 입맛 떨어져서 더 먹고 싶지도 않다고 할 겨를도 없이 그는 사라졌다. 군말은 없었지만 대접받는 느낌은 더더욱 아니다.

 

다시 가져온 음식은 맛이 크게 다르지도 않았고 이미 맥주로 배가 부른 상태였다. 음식은 서너 꼽재기도 못 먹고 남기고 접시엔 팁을 남기지 않았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건 주방장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는데, 다시 나온 음식조차 고스란히 남겼으니 우리는 최악의 평가를 내린 셈이다. 식당 앞 물길 위 작은 다리 난간에 기댄 웨이터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실, 팁을 줄까말까 많이 망설였고, 팁을 놓지 않고 나온 게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동안 그 걱정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이후의 이탈리아 음식은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렇게 설익고 짠 파스타는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웨이터의 그 태도는 마음에 안 들었다. 처음으로 팁을 주지 않는 배짱을 부려 본 셈이다.

 

여행을 가면 서양의 팁 문화를 존중해야 하고 지키는 건 당연하지만,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 때는 팁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불친절하거나 무례하게 굴 때에는 팁을 주지 않음으로써 항의를 하고 불만을 표시할 수 있다.

 

호텔로 돌아온 딸은 팝콘을 먹어댄다. 비싼 음식 값을 치르고도 배가 고프다는 딸을 보니 속이 상한다. 베네치아의 첫 날은 비릿한 불쾌함, 바로 그것이었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8월, 2주 동안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습니다. 환율도 그 당시 기준입니다.


태그:#이탈리아, #베네치아, #베니스, #이탈리아식당, #오징어먹물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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