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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이 입적한 후 스님 저서 중 <무소유>가 경매에 나와 110만 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이 가진 본래 뜻과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무소유>는 '1988년 6월 10일 재증보판 14쇄'로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1988년 8월 22일이다. 벌써 22년 전으로 군대 생활을 1년 남짓 남겨 둔 때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무소유>를 알고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 같이 근무했던 한 단기사병(방위병)이 <무소유>라는 책이 있으니 한 번 사서 읽어보라고 권했던 것 같다.
 
나는 경비부대에 근무했었다. 맥아더 장군은 "전투에서 실패하면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하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나는 초소에 <무소유>를 가지고 가서 읽었다.
 
초소 근무를 나가면 보통 2~3시간이 걸렸는데 잠깐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를 떠올리면서 책을 한 장씩 뒤로 넘겼다. 마음이 가는 곳에 밑줄을 그었다. 밑줄 그은 내용을 읽으면서 22년 전 그 때를 반추해보았다.
 

33쪽을 보니 22년 전 그었던 첫 밑줄이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라. 당시 상병 월급이 5천원 안팎으로 기억나는데 무슨 뜻에서 이곳에 밑금을 그었을까? 궁금했다. 별로 소유할 것도 없는데, 군인이라는 신분 자체가 '무소유'인데.

 

그런가 하면 35쪽 마지막 문장처럼 지금도 유효하게 다가오는 문장도 있었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이니까."

 

무소유는 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군인은 자본에서는 무소유일 수 있지만 '계급'으로 선임병이 후임병을 권력으로 소유할 수 있다. 상병이 일병과 이병에게 계급이라는 힘으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은 폭력이었다. 계급을 내려놓을 수는 없지만 계급을 폭력으로 행사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무소유'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스님은 83쪽에서 "생명의 원천인 대지를 멀리하면서, 곡식을 만들어 내는 어진 농사꾼을 짓밟으면서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 따라서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의해 삶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것이다"고 말한다.

 

이 내용은 1974년 7월 <현대인>에 실린 내용이다. 이 글을 보면서 이명박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4대강 사업이 떠올랐다. 4대강 사업을 한다고 팔당지역 유기농단지를 갈아엎었다. 생명을 죽이는 사업이라는 근거가 분명한데도, 정부는 '생명을 살리는 사업'이라고 우기고 있다. 36년 전 법정 스님이 "곡식을 만들어 내는 어진 농사꾼을 짓밟으면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이 지금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법정 스님이 이 글을 썼던 때는 박정희 독재정권이었지만 지금은 시민이 직접 뽑는 민주주의 시대이다. 그러나 정부가 농사 짓는 사람들을 내치는 일은 별 다르지 않았다. 통탄할 일이다.

 

87쪽,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인 것이다"라는 대목에서는 모종의 결기마저 느껴진다. 그렇다, 인민은 짐승이 아니다. 권력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로봇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는 비판하지 말라고, 비판하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입을 털어막고, 글을 쓰지 못하도록 손을 묶는다. 인민이여 당당하지 살자.

 

천안함 침몰 때문에 가장 이득을 본 사람이 아마 '봉은사 외압의혹' 때문에 큰 곤혹을 치른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일 것이다. '사실 무근'이라고 해명했지만 천안함이 침몰하는 바람에 들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진실을 밝혀줄 당사자  중 한 사람인 자승 총무원장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데 <무소유>에서는 '침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힌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97쪽)

 

침묵은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 맞다.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거짓이다. 진실을 외면하는 침묵은 거짓이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혔다면 진실을 위해 당당히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거짓은 당당할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다.

 

누렇게 빛바랜 22년 전 <무소유>를 다시 읽으니 한 가지 구절이 가슴 깊게 남는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라는 구절 말이다. 지금 이 시대 비겁한 침묵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당하고 참된 말이 진짜 침묵이다.


소설 무소유 - 법정스님 이야기

정찬주 지음, 열림원(2011)


태그:#무소유,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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