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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아내가 영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계기로 또 하나의 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환자를 돌보는 아름다운 재활병원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사고를 지켜보면서 불행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순간에 장애인이 되면 자신의 장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편견을 이겨내는 일이 고통스럽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많은 장애인들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분들의 삶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제는 장애를 가진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부모님, 자립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장애인 등 역경을 딛고 일어나신 분들을 만나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제대로 된 재활병원을 지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효자동 구텐 백> 저자의 말 중에서

 

<효자동 구텐 백>(푸르메 펴냄)의 저자 백경학은 신문기자로 재직하던 중 2년 일정으로 독일에 가게 된다(1996년). 독일 통합 이후 동서독 사회통합과정에 나타난 문제점을 연구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2년 동안 뮌헨대학 정치학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수학하게 된다.

 

2년간의 연구 일정이 끝난 1998년, 그의 가족은 귀국 직전 영국 여행길에 나선다. 하지만 이 여행길에서 가족은 처참한 사고를 당한다. 아내가 딸에게 입힐 옷가지를 꺼내고자 잠시 차를 세웠고 트렁크에서 옷을 꺼내는 순간 차 한 대가 이들 가족을 덮친 것이다. 이 사고로 그의 아내는 다리를 절단,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장애인이 된다.

 

아내의 장애로 그의 눈이 비로소 장애인들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아내의 치료과정에서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 그 문제점들을 실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재활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병원건립을 위한 자산마련을 위해 국내최초 하우스맥주를 생산하는 '옥토버훼스트'를 세워 운영하게 된다.

 

이후 그는 재활병원 건립추진을 위한 재단설립의 필요성으로 첫발을 시작, 2005년, 우여곡절 끝에 비영리법인 '푸르메재단'이 설립된다. 재단 설립과 함께 그는 현재 상임이사로 '환자를 가족처럼 돌보는 아름다운 재활병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저소득층 장애인들을 위한 '푸르메 나눔치과'는 그 일환으로, 몇 명의 치과의사들이 봉사 중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무얼까. 나는 단연 타인에 대한 배려 정도와 의료 및 교육문제를 국가에서 책임지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갑작스런 질병과 사고로 인한 불행은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지역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인 까닭이다."

 

"개인소득 2만 달러, 교역량 11위의 경제대국에서 입원할 병실이 없어 유령처럼 전국을 떠돌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내 병원들은 재활병동과 재활의학과를 개설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이유는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책속에서 저자

 

<효자동 구텐 백>에는 '장애인을 위해 아름다운 병원을 짓는 사람, 푸르메재단 백경학이사의 특별한 인생이야기'란 부제가 붙었다. 자칫 한 개인의 생활 수필 정도로 읽혀질라. 단연 아니다. 우리의 장애인들을 위한 정책과 사회의 인식, 우리의 의료현실과 그 문제점 등을 외국의 현실과 비교,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푸르메재단 설립 그 첫걸음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려고해도 흔히 말하는 빽 없고 자본 없는 사람들은 그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게 하는, 실질적인 현장 조사는 고사하고 심도 있는 서류심사조차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돈과 고위인사의 참여 정도로 허가를 판단한다든지 하는 우리의 행정(혹은 제도)  그 문제점을 생각하게 한 글이었다.

 

우리의 장애인 재활현실은

푸르메재단에 의하면, 현재 우리의 장애인수는 약 470만 명, 전체인구 10%에 해당한다. 이중 65%가 교통사고나 지체장애 등으로 지속적인 재활치료와 입원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입원치료 등과 같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는 정도는 겨우 2%. 재활의학과 의사 1인당 장애인 수 6,000명, 장애인구 1,000명 당 재활병상 수는 3개미만으로 장애환자 재활의 첫 관문인 재활치료 여건은 척박하다고.

 

10명중 1명이 장애를 겪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가장 기초적인 의료서비스조차 원활하게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저자처럼 남의 일로만 생각하던 장애가 내 가족 누군가에게 찾아온다면 이 척박한 의료현실에 다만 분개만 할 것인가?

 

2년 전 <그림이 있는 정원>이란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장애인 동화작가 고정욱씨는 "전체 장애인 중 90%는 교통사고 등과 같은 후천적인 요인에 의한 장애인으로 점점 느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는 '장애는 더 이상 특정한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내 가족 중 누군가 혹은 나도 언제든 겪을 수 있는 일'임을 실감하게 하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들과 함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화들이 잔잔하게 소개된다. 2005년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용기의 눈물을 줬던 이지선씨의 마라톤 완주 이야기는 가슴 뜨겁다. 화상으로 숨을 쉬지 못해 땀 조절을 할 수 없는 피부로 7시간 22분 동안 42.195km를 완주한 그녀의 용기는 내 삶에 힘이 되리라.

 

노후 자금으로 쓰려고 마련해 둔 3억 원 상당의 토지를 푸르메재단에 기부한 장애인 부부의 이야기, 생후 9개월 때 경기(驚氣)의 후유증으로 목도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뇌성마비를 치료해준 한의사처럼 한의사가 되어 10년 가까이 장애인들과 저소득층 사람들을 위한 시설을 다니며 봉사를 하고 있는 어떤 한의사의 이야기는 가슴 뭉클하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어디에 있나요? 만날 수가 없어요"라고 묻는 세계적인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의 성장을 가능케 한 국가의 지원, 백화점에 장사진을 이룬 독일의 장애인들 이야기, 루즈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의 공통점인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례 등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여전히 우리의 장애인들은 높은 턱을 힘겹게 넘어야 하는 현실이기에.

 

책에서 만난 어이없는 일화도 있다. 28년간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을 팔아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몇 년째 모 지방대학에 해마다 1억 원씩 기부하고 있다는 오씨라는 여인이 푸르메재단에 기부를 하겠다며 자신을 소개된 모 지방 신문까지 펼쳐보였는데 알고 보니 해당 대학에도 기사를 내보내게 하고 나타나지 않아 사기를 치고, 도리어 차비를 뜯어 갔다나.

 

두번째 어이없는 일화. 이명박 전 시장이 대통령선거 한나라당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던 그 무렵 저자는 푸르메재단 홍보대사 등 관계자 몇몇과 함께 서울시장을 만났다. 서울시장은 자신이 지난날 목격한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와 자신의 그 후원을 말하면서 병원건립을 위한 부지제공을 확언, 동석한 이지선씨에게 "약속을 꼭 지키겠다"며 거듭 약속했으나….

 

저자는 이 어이없는 일들을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비유하고 있다. 이 책은 글들은 한 개인이 지난 몇 년간 장애인들을 위한 재활병원 건립을 목표로 걸어오면서 겪고 만난 세상과 사람들 이야기이지만 사람이 얼마만큼 아름다워지고 가치 있어질 수 있는지, 또 얼마만큼이나 추악하고 하잘것없는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등 사람 본성을 생각하게 하기도 했다.

 

"아내의 교통사고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많은 것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

 

<효자동 구텐 백>은 이처럼 어느 날 남의 일로만 알고 있던 장애를 내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저자가 '많은 것을 잃고 그 대가로 얻은 잃은 것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들려주고 있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 효자동 구텐 백)|백경학|푸르메|2010-03-12 |12,000원 


효자동 구텐 백

백경학 지음, 푸르메(2010)


태그:#푸르메재단, #푸르메 나눔치과, #재활병원, #이지선,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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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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