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는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이탈리아의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저서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의 프랑스 어판 서문을 통해 이렇게 물었다. 웃으면서 화를 낸다고? 생경하지 않다. 언제부터였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경험 많다.

예컨대, 얻어맞고 들어온 아들 대신 몽둥이 들었다던 한화 김승연 회장의 '눈물겨운' 부정은 약과다. '어륀쥐'라 발음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오렌지' 못 사먹는다던 이경숙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의 기막힌 오만으로부터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상관없다"던 박은경 환경부 장관 후보의 화려한 언어유희.

'높은 의료 수준'은 미국을, '적절한 인터넷 통제'는 중국을 거론하던 현 정부의 가치중립적 선진국의 예. 미국산 쇠고기 판매 재개로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게 됐다"던 이명박 대통령이 뻥튀기, 어묵을 들고 이문동 재래시장을 돌며 펼치던 서민놀이.

'좌파 교육 때문에 성폭력 범죄 발생'한다던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가 '현 정권에 비판적인 강남 부자 절의 주지' 명진 스님에게 찍어댄(것으로 추측되는) 좌파 낙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중에도 백미는 단연 '명박산성'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준법'과 '법치'조차 구분할 줄 모르면서 '법치주의'를 떠들어대는 정권이 그동안 쏟아낸 무궁무진한 익살극의 역사는 이토록 길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보다 많이 웃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실소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툭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 유쾌한 웃음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우리는 과연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소설가 김갑수의 저서 <이승만에서 2PM까지> 겉그림.
 소설가 김갑수의 저서 <이승만에서 2PM까지> 겉그림.
ⓒ 한걸음 더

관련사진보기

에코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과연 웃으면서 화를 낼 수 있을까. 에코는 그렇다고 했다. "악의나 잔혹함에 분개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없지만, 어리석음에 분노하는 것이라면 그럴 수 있다"며. 이이제이. 코미디에는 코미디로 대처할밖에.

반면 인간 사회의 어리석음을 향해 정색하며 화를 내는 방법도 있다. 경험으로 미뤄보건대 전자는 패러디의 형태로 나타나는 조롱인데, 현재 인터넷 공간을 달구며 다양하게 확대재생산 되고 있는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후자는 페이소스가 동반된 정공법에 가깝다. 개선의 여지를 남겨두는 애증이랄까. 소설가 김갑수는 후자를 선택했다. 

가령, 우리가 화를 내며 동시에 웃었던, 즉 숱한 어리석은 사건들은 태반의 경우 '보수와 진보' 혹은 '우파와 좌파' 놀음에 기인한다. 심지어 '좌빨'이니 '친북'이니 하며 덧씌우는 데 재능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김갑수는 신간 <이승만에서 2PM까지>(도서출판 한걸음·더)를 통해 이것은 '이념의 2원론'일 따름이라 했다. 이런 2원론이 사람에게까지 함부로 적용되는 실정이라 우려하는 저자는 "문제는 '가짜 보수'나 '사이비 진보'에 있으며 바로 그들로 인해 역사는 파행하거나 퇴행하는 것"이라 지적하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그래서 '이념'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나는 사람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본다. 자연스러운 사람과 부자연스러운 사람이다. 부자연스러운 사람은 필경 위선적이거나 아니면 위악적으로 나타난다.(...)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사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대부분 위선적이거나 위악적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부자연스럽다는 맹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가짜 보수'거나 '사이비 진보'일 가능성이 크다. (동저서 머리말 중)"

같은 맥락에서 노무현을 진보적, 이명박을 보수적이라 말하는 세간의 시각에 저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전자는 위악적이요 후자는 위선적이라 구별하는 편이 더 일리가 있단다.

<이승만에서...>를 통해 만난 신규식 선생

하마터면 <이명박의 위선과 노무현의 위악>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올 뻔한 이 책 <이승만에서 2PM까지>는 노무현 정부 후반기 1년 반과 이명박 정부 전반기 1년 반을 합쳐 3년에 걸친 한국 사회 쟁점을, 제목 그대로 '인물' 탐구를 통해 보여준다.

이 기간 동안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자연스러운 사람'과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의 행보를 작가의 시선으로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의 지난 한 세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사적 영역을 떠나 이제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가늠하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정약용, 김옥균, 서재필, 안창호, 이광수 등, 저자에 따르면 '서구인에 대해 시종여일한 열등의식'에 젖어있던 일단의 세력을 반성하고 신규식, 장준하, 김구 등 교과서가 말하지 않는 진실을 재발견하게 하는 것이 또한 이 책의 강점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프랑스에서 살아온 내가 궁금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왜 아니겠는가. 나치 점령 하에 레지스탕스 운동가로 활약했던 샤를르 드 골, 장 물랭과 같은 인물들이 좌우의 구별 없이 오늘날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프랑스에서는 극영화로, 다큐멘터리로 재조명된 그들의 삶을 만나는 일이 낯설지 않다. 드골을, 물랭을 모르는 프랑스인은 그래서 프랑스인이 아닌 거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 대한 평가 논쟁이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첨예한 대한민국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이렇듯 우리의 근대사를 살았던 '자연스러운 사람'과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의 비열하거나 혹은 인간적인 면모를 생동감 있게 복원해낸 것은 단언컨대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섬세한 소설가로서 관록의 소산이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이승만에서 2PM까지'의 저자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김갑수씨의 '저자와의 대화'가 열렸다.
 지난 4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이승만에서 2PM까지'의 저자 <오마이뉴스> 뉴스게릴라 김갑수씨의 '저자와의 대화'가 열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나는 특히 책의 중간 즈음에 등장하는 항일 독립투사 신규식 선생을 대면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경술국치로 나라가 완전히 결딴나자 홀연히 상해로 말을 달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던.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에 절망, 밤마다 통곡으로 날을 지새웠다던. 좌절감으로 25일 간 단식 끝에 마침내 영면했다던. 서러운 마흔 셋 짧은 삶을 마감하기 직전 "정부, 정부!"라는 단말마를 토해냈다던.

스물다섯 되던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음독,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결국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는데 한자어로 사시를 뜻하는 '예관'을 자신의 호로 썼을 만큼 초연하게 살다간 신규식 선생을 부끄럽게도 나는 몰랐다. 이름 석 자는 들었을지언정. 장 물랭의 일생은 줄줄이 외면서. 그래서였을까. 선생을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에 비유한 저자가 묘사해낸 당시 상해 망명길은 평화롭고 아름다워서 처절했다.

이렇듯 저자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역사와 인물에 한없이 애틋한 시선을 던지다가도 돌연 침묵보다 무겁게 화를 내곤 한다. 점잔빼지 않고 기어이 '이 돌대가리들아!' 호령하고야 만다. 세상의 어리석음을 향해 가하는 호방한 일침이다.

6·2 지방선거를 위한 기출문제집

여담이지만, 지난 2006년 중반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를 기사로 만나면서 나는 그의 나이가 많아야 마흔일 거라 지레짐작해버렸다.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김갑수, 그의 서명을 달고 올라오는 기사들을 찾아 읽으며 그 순발력에 감탄했고 또 그 속에 묻어나는 청춘의 패기에 전율했던 까닭이다. 그러다 지난 2008년 '올해의 뉴스게릴라상'을 수상한 저자의 인터뷰 기사에서 처음 접한 그의 주름진 얼굴은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이 책에 담긴 66편의 글은 대부분 2006년 9월부터 2009년 9월까지 <오마이뉴스>에 발표된 저자의 시론이다. <오마이뉴스>의 독자라면 김갑수라는 이름을 모를 리 없으나 그의 글을 모조리 읽었다 예단할 필요도 없다. 저자의 글에 각별한 애정을 품은, 나와 같은 독자라면 그것이 이미 <오마이뉴스>에서 접한 글이라 할지라도 책으로 재차 읽었을 때 한층 숙성된 묘미를 맛볼 수 있을 테니까.

이를테면,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를 방문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일화. "아버지나 고인이나 모두 국가를 위해 사신 분"이라 말한 박 전 대표와 "딸처럼 여길 테니 어려운 일 생기면 찾아오라" 화답한 김 여사를 일러 '교활한 딸과 맹한 미망인'이라 일갈한 저자의 칼 같은 일성이 당혹스러웠던 기억은 책을 통해 마침내 교감으로 바뀌었음을 고백한다.  

불친절하고 한편 파격적인 저자의 어법에 괘념하지 않고 책을 읽는 내내 머리가 끄덕여지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진실성 없고 부자연스러우며 천박한' 미사여구의 맹점을 첫 장부터 경고한 저자의 친절덕분이다.

지난 2007년 프랑스 대선 당시 갖가지 사안을 보는 기준이 니콜라 사르코지 현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때가 있었다. 자신의 의견을 '극단적으로' 피력하는 사르코지에 따라 좌우가 대립했다. '사르코지는 뭐라고 말했나'를 알아본 뒤 좌우로 정렬하는 현상은 비단 정치인에 국한되지 않았다.

2010년 지방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둔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눈 뜨면 터지는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을 보며 나는 문득 저자 김갑수의 생각이 궁금해지곤 한다. 사르코지가 아니라 김갑수는 뭐라 말할까. '웃으면서 화내는' 에코의 방식으로 여태 즐겨왔다면 이제는 김갑수의 방식으로 정색할 때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좌우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가리는 독특한 리트머스종이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승만에서 2PM까지>는 그래서 6·2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알찬 기출문제집이다.


이승만에서 2PM까지 - 아! 대한민국, 위선과 위악의 페이소스

김갑수 지음, 한걸음더(2010)


태그:#김갑수, #이승만에서 2PM까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