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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공원에서 금정산성을 거쳐 상계봉으로 오르는 돌계단,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은 그윽한 관솔 향을 풍기며 세월의 덧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금강공원에서 금정산성을 거쳐 상계봉으로 오르는 돌계단, 다양한 형태의 바위들은 그윽한 관솔 향을 풍기며 세월의 덧없음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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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1동 일원에 자리한 '금강공원'(3092㎡)은 부산·경남 일대가 아스라이 한눈에 들어오는 금정산(801m)을 배경으로 금정사, 석불사, 휴정암, 약수정사 등 크고 작은 암자와 사찰이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 아늑하게 다가온다.

공원에서 금정산성 남문을 거쳐 기암절벽이 장관인 상계봉(640m)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크고 작은 바위들은 아름다움을 더하고, 울창한 송림과 사철 마르지 않는 계곡물은 포근한 어머니 품을 떠오르게 한다.

내년이 미수(米壽)라는 김종기(87세) 할아버지가 초가집과 농기구 등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금강공원 입구에 진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내년이 미수(米壽)라는 김종기(87세) 할아버지가 초가집과 농기구 등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금강공원 입구에 진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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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입구에는 옛날 농가와 같은 초가집 몇 채와 선조들이 신고 다니던 짚신, 똬리, 디딜방아, 연자방아, 인분을 담아 나르던 똥장군, 실을 뽑는 물레와 베틀, 곡식 쭉정이를 바람에 날려 보내는 풍구(풀무)와 각종 농기구 등을 만들어 진열해놓고 있어 민속박물관에 온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연자매'로도 불리는 연자방아는 소가 온종일 힘들게 걸어가도 그 자리여서, 소의 한이 서린 방아라고도 했다. 특히 저 멀리서 '풍구타령'이 들려올 것 같은 풍구는 힘든 농사일도 가락으로 이겨내던 선조들의 멋과 슬기를 엿보는 듯했으며 시계를 50년대 어느 시골 마을로 돌려놓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서 김만일(65) 해설사를 소개받아 함께 걸으며 선조들의 얼과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각종 문화재와 금강공원에 얽힌 사연들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았다.

# 망미루(望美樓)

금강공원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망미루’, 한양에서 부임해 온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망미루’라 불렀다고.
 금강공원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망미루’, 한양에서 부임해 온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망미루’라 불렀다고.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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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공원 입구에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망미루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의 대문으로 동래부사 김석일이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 청사 동헌 앞에 세운 문루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시가지를 정리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한다.

1895년(고종 32년) 동래 도호부(都護府)가 동래 관찰사영(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布政司)라고 불리었고, 4대 문의 개폐와 정오를 알리는 큰 북이 걸려 있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높은 주 초석 위에 놓인 2층으로 된 누각이다.

공포는 이익공(二翼工)이고 마루는 기틀마루이며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붙이고 지붕 틀을 평오량팔작(平五梁八作)지붕 겹처마 집이다. 건물이 낡고 훼손이 심해 1970년 해체 복원했다가 1989년에 개수했다고.

#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

조상들의 한이 서린 역사와 저항정신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동래독진대아문’
 조상들의 한이 서린 역사와 저항정신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동래독진대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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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독진대아문'은 부산에 남아 있는 전형적인 관아의 대문으로, 1626년(인조 4년)에 동래부사 정양필이 동래부 청사의 동헌 앞에 대문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망미루 뒤쪽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금강공원으로 옮겼다고.

1700년(숙종 26년)에 중수하였고, 1870년(고종 7년)에 중건된 '독진대아문'에는 어린 왕자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시련을 겪은 효종(1656년)이 북벌을 계획하며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 휘하에서 독립한 동래독진임을 알리는 현판이 정면 중앙에 걸려 있다.

'독진대아문' 왼쪽 기둥에는 동래부가 변방을 지키는 병마절제사의 영(營)임을 밝히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이, 오른쪽에는 동래부가 일본과의 외교를 맡아보는 관아라는 뜻의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슬 지붕과 홑처마 3칸으로 중앙의 무고주(無高柱) 위에 '삼량 초익공'(三梁 初翼工)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흔하지 않은 3문 형식의 아문 건물 중 하나라고 한다. 1971년 부산시에 의해 해체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다고.

‘독진대아문’에서 바라본 금정산 숲. 온갖 모양의 바위와 울창한 송림은 운치가 그만이었다.
 ‘독진대아문’에서 바라본 금정산 숲. 온갖 모양의 바위와 울창한 송림은 운치가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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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니, 다양한 모양의 바위들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송림의 조화가 한 폭의 동양화처럼 다가왔는데, 추위와 싸우느라 앙상해진 가지에는 물기가 오르고 있었다.

김만일 해설사는 '동래독진대아문'이 세워지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왜놈들이 외교를 한다고 한양까지 올라다니다 보니까, 임진왜란 때 조선 지리를 너무나 잘 알았는거라. 그래놔 노니까 동래부에서 왜놈들에게, 이제 너희는 외교 하러 한양까지 올라가지 말고 동래부에서 외교를 끝내고 돌아가라고 했어요. 지리를 너무 잘 아니까 전쟁 때 우리가 떡이 돼버린기라. 이 문을 세우게 된 동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기지요."

설명을 듣자니까, 언젠가 시청했던 TV드라마 장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 땅을 미치광이처럼 휩쓸고 다니며 부녀자를 겁탈하고 노략질을 일삼던 왜군들 모습을 몸서리치며 보았기 때문이었다.

# 이섭교비(利涉橋碑)

금정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이섭교비’. 선조들의 멋과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금정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이섭교비’. 선조들의 멋과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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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섭교비는 '이섭교'라는 다리를 놓은 후 그 기념으로 세워놓은 비석으로, 다리를 놓기까지의 과정과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직책을 기록하고 있어, 향토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자연 암반을 받침돌 삼아 그 위에 세운 비에는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았지만, 나무가 쉬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돈을 모아 조선 숙종 21년(1695)에 다리를 놓았다'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 있다.

김 해설사는 '이섭교'에 대해 지금의 동래구 안락동에서 연산동으로 갈 때 건너야 했던 수영천에 놓인 동다리로, 지금은 없어졌으나 1694년(숙종 20년)에 동래부사 이희룡이 이웃한 주민들 계의 도움을 얻어 세 개의 아치가 무지개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전에는 나무다리가 있었으나, 쉽게 부식되어 수축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이에 따른 민폐가 심해 돌다리로 개축한 것이라고.

#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김만일 해설사가 흉물스럽게 변한 ‘내주축성비’에 대해 설명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김만일 해설사가 흉물스럽게 변한 ‘내주축성비’에 대해 설명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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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남문 밖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에 금강공원 '동래독진대아문' 뒤쪽으로 옮긴 '내주축성비'는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축조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그 내력을 적어 1735년(영조 11년)에 세운 비다. 

비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을 새겨놓았는데, 비문 내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시멘트로 흉물스럽게 덧씌워놓아 안타깝게 했다. 머릿돌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에서 동래성을 연구하는데 가장 정확한 자료가 나왔으며 조선후기 축성사(築城史) 가운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고 전했다.

# 일제강점기 때 금강공원은?

부근이 평평하고 샘터(파란통)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인 부호 ‘히라시바라’의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자리
 부근이 평평하고 샘터(파란통)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인 부호 ‘히라시바라’의 별장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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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공원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올라가는데, 김만일 해설사에 의하면 공원 부근은 원래 일인 부호들의 별장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금강공원을 병풍처럼 둘러싼 금정산은 삼국시대 때 처음 축성하고, 조선 숙종(1703) 때 중축했다는 금정산성(1만7333m)과 국내 5대 사찰의 하나인 범어사로 유명하다. 금정산 줄기도 원래는 경남 양산 다방 삼거리에서 낙동강 하류 남쪽 끝 몰운대까지 이어지는데,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 개발로 끊겼다고.

동래 지역은 삼국시대 때부터 왜구들이 침범하던 고장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도 동래온천 부근은 유곽 촌을 이루었으며 일인 부호들은 금정산 아래, 지금의 금강공원 부근에 정원과 연못이 있는 별장을 지어 거주했다 한다. 

특히 일인 부호 '히라시바라'는 마당에 정원과 연못을 조성해놓고 세월을 즐기던 자기 집(별장)을 1940년 당시 동래 면장이던 '나카시마'에게 기증하고 '금강원'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공원 발자취에는 명명한 연도만 나와 있었는데, 김 해설사 설명은 금강공원의 효시일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

‘히라시바라’가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못. 샘터 앞에 있으며 한국식 정원 연못에는 이러한 돌다리를 놓지 않는다고 한다.
 ‘히라시바라’가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못. 샘터 앞에 있으며 한국식 정원 연못에는 이러한 돌다리를 놓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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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부산금강공원, #금정산, #망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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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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