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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에 허덕이는 일상의 모순을 여행길에서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사륜구동으로 하는 사막 여행이 갖는 원죄라 할 수 있다.
▲ 짐 꾸리기 짐에 허덕이는 일상의 모순을 여행길에서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사륜구동으로 하는 사막 여행이 갖는 원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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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번의 숙소 안마당에서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늘어놓은 짐 앞에서 그만 막막해졌다. 부피가 크고 조금이라도 사용 빈도가 떨어질 것이라 여긴 짐들은 이미 시드니에 내려놨건만 차 한 대에 실을 네 사람의 짐과 각종 장비, 부식 따위가 마당 한 구석에 가득하다.

이걸 다 실을 수 있을까? 수납공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40ℓ 냉장고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사막 구간에서 육류와 부식을 보관하려면 이만한 크기의 아이스박스가 필수품인데 여러 날 동안 얼음을 구할 수 없는 곳이니 냉장고 외엔 대안이 없다.

접이식 의자나 매트를 두고 갈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후 기다릴 야영의 날들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무엇 하나 포기하지 못했다. 물질적 욕심과 그 짐의 무게로 허리가 휘고 마는 삶의 모순은 여행길에서도 재현되고 있었다. 부식과 매트리스처럼 가벼운 물건은 루프 렉에 얹고 짐가방이나 무거운 장비는 차 안에 넣어 결국 적재를 끝냈다.

브리즈번 중심가의 딕스미스(Dick Smith)에 들러 차량용 인버터를 구입했다. 지니고 있던 500W 용량의 인버터가 고장 나 그보다 작은 50W 용량이나마 확보한 것인데 작은 물품이지만 이것이 있고 없고의 결과는 하늘과 땅이다. 야영이 지속될 때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를 구동하게 하는 유일한 충전원이 될 터였다. 이 작은 것을 구입하지 못해 벌써 여러 날 마음이 쓰였는데 당장 오늘부터 야영의 날들이 시작되는 지라 일부러 전기제품 가게를 찾은 것이었다.

정말이지 끝이 없는 온갖 사소한 것들과의 씨름이다. 입에 넣을 먹거리, 자리를 펼 공간, 지녀야 할 사물, 버려야 할 물건, 가야 할 길, 멈춰야 하는 곳, 어느 한 가지도 마음 안 가는 구석이 없다. 무소유의 가치를 인식하면서도 자동차 여행을, 사륜구동을 이용한 사막 횡단을 꿈꾼 자가 져야할 짐의 원죄를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해발 270m의 얕은 산이지만 브리즈번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 마운트 쿠사 전망대 해발 270m의 얕은 산이지만 브리즈번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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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번 시내에서 7Km쯤 서쪽으로 나와 마운트 쿠사(Mt.Coot-tha)에 올랐다. 해발 270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평지의 브리즈번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쿠사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은 화각 넓은 파노라마 사진기에 찍힌 풍경 같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능은 이 때문이었을까? 발아래 너른 전망을 두고 내가 속하고 누볐던 입지를 먼 곳에서 조망해 한 눈에 둘 수 있어야만 안도하는 것. 가까이 접하고 곁에 늘 있어주는 존재에 대해선 그 가치를 모르다가 한 발치 떨어진 후에야 그 형체를, 존재를 어림잡을 수 있는 미욱함 때문에 꼭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를 희망하는 것인가.

인구 160만 명이 생활하는 호주 세 번째 규모의 도시가 숲속에 폭 안겨 있다. 브리즈번 강이 스멀스멀 뱀처럼 휘어 흐르며 도심을 가르는 저 빌딩의 밀집지대도 주변을 에워싼 녹음의 색을 누르지는 못한다. 또 한 번 도시가 국립공원 속에 있고 국립공원이 도시 속에 있는 호주 자연의 위용을 접한다.

90m 높이의 시계탑이 있는 그리스 복고풍의 시청 건물과 킹조지(King George) 광장도, 1988년 엑스포가 개최되었던 레저구역인 사우스 뱅크 파크랜드(South Bank Parkland)도 녹음과 건물의 어우러짐 속으로 묻힐 뿐 구체적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또 내 자취가 남은, 그러면서도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한 도시를 뒤로 한다.

쿠사에서 나와 밀턴 로드(Milton Rd)를 지나는 길에 퀸즐랜드를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인 포엑스(XXXX) 공장을 지나쳤다. 공장견학도 되고 시음도 가능하니 모두들 들렀다 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내처 가속 패달을 밟았다. 일행에겐 하필 그 때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이가 술을 못 먹는 나였던 것이 불운일 밖에. 게다가 사막만큼이나 밟고 싶었던 땅인 프레이저 아일랜드(Fraser Island)에 가려면 오늘은 레인보우 비치(Rainbow Beach)까지는 도착해야 했다.

브리즈번에서 레인보우 비치로 가는 길
▲ 길 브리즈번에서 레인보우 비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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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번에서 레인보우 비치는 245Km. 가깝다 여겼는데 놀멍놀멍 움직인 탓인지 아침 9시 갓 넘어 나선 길이 저녁 7시가 되어서야 레인보우 비치에서 끝을 맺었다. 안내소는 문을 닫아 주유소에서 바지(Barge) 승선권과 프레이저 아일랜드 차량 허가증(Vehicle Permit), 그리고 레인보우 비치와 프레이저 아일랜드에서 캠핑 허가증(Camping Permit)을 구입했다.

프레이저 아일랜드에도 주유소는 있지만 육지보다야 비쌀 터여서 주유도 가득해 놓고 마트에 들러 부식과 물을 더 보충하니 큰일을 앞두고 든든히 배를 채운 장정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이 해안에서 야영하고 내일 바지선에만 오르면 꿈에 그리던 프레이저 아일랜드에 들어간다 생각하니 마음까지 달떴다.

지금까지 경유한 호주의 모든 공간이 그러했지만 150Km 전체가 모래로 이루어진 세계문화유산 프레이저 아일랜드는 호주를 마음에 품는 순간부터 꼭 가보리라 작정한 곳이었다. 심슨 사막 바로 다음의 버킷리스트였는데 기어이 상륙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꿈을 설정하고 꿈에 맞게 계획만 짜놓으면 어느 순간에 실행하게 되며, 그 실행의 과정에서 멈추지만 않으면 목표에 도달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다.

'재능 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못 따라오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재능도 있는데 노력하는 사람이고 또한 즐기기까지 하는 자가 아닌가, 하는 '자뻑'에 빠져보기도 했다.

프레이저로 들어가는 최단거리 노선은 레인보우 비치에서 출발하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다.
▲ 레인보우 비치에서의 캠핑 프레이저로 들어가는 최단거리 노선은 레인보우 비치에서 출발하는 배를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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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아일랜드로 바지선이 뜨는 레인보우 비치 인스킵 포인트(Inskip Point)에서 캠핑그라운드를 찾는데 어둠 속이라 여의치 않다. 해변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어 진입하다가 차가 모래에 갇혔다. 스톡턴 비치에서 만났던 그 부드러운 해안모래지대다. 타이어 공기압을 줄이고서야 야영이 가능한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캠핑마저도 타이어공기압을 조절해야 하는 진짜 '야외'에 나온 것이다.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쳤다. 쿠사 전망대 아래 풀밭에서 식빵과 우유로 때운 늦은 아침과 맥도널드 점심 이후로 이때껏 곡기를 접하지 못했던 위장에도 소식을 전했다. 간만에 김, 김치로 포식을 했다. 게다가 와인, 치즈로 완벽한 입가심(이때는 술 못하는 나만 바보다)까지. 배가 부르고 몸을 누일 텐트가 옆에 있으며 좋은 사람들과 나뭇잎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으니 천하가 내 안에 있다. 

우리 말고도 숲 어디선가 야영을 하고 있는 불빛들이 보인다. 혼자 간이 화장실을 찾아갔던 아내에게 밤엔 혼자 다니지 말라며 동행이 되어준 젊은 연인들을 보면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고된 여정에 억척스레 자기 몫을 해내는 모습이 고맙기도 했다. 물론 철호, 경숙 부부에게도. 사륜구동으로 지구의 속살 깊은 곳들을 누벼보겠다는 내 꿈은 아내가 동조해 주지 않았다면 그냥 '꿈'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들의 호주 제안에 평소 절친했던 경숙 부부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또 얼만큼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

나는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행복하다.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 내 인생에도 이런 지도 한 장 있었으면.
▲ 내 마음의 지도 나는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행복하다.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명확히 알 수 있으니까. 내 인생에도 이런 지도 한 장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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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잠자리를 살피는 사이 지도를 폈다. 나는 지도를 보고 있을 때 행복하다. 내가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이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옳고 그름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삶의 좌표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인생에도 지도가 있다면…. 나는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내 주변엔 무엇이 있는지, 또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지도가 있다면…. 그러나 나는, 지금, 지도를 보고 있다. 그리고 내일 나는 내 눈길이 훑었던 지도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길을, 풍경을 몸으로 기억하는 방법.
▲ 달리기 길을, 풍경을 몸으로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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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분.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향할 기대 때문인지 조금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지표면이나 살짝 적실 비가 내려 긴장했으나 아침 해돋이가 장관이다. 일찍부터 낚시하는 사람들과 그들 너머의 넘실거리는 파도의 배경으로 프레이저 아일랜드가 보인다.

이제 넘어가야할 공간. 짙게 드리운 구름과 수백 번의 반복을 두려워하지 않는 파도의 울림, 그 파도가 들어오기까지 발자국을 깊게 간직하는 이 해변의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달음박질을 했다. 심장이 터질 정도로 전력 질주를 몇 차례 하고 나면 가쁜 호흡이나 널뛰는 심장이 간직한 고통만큼 그 사이로 스쳐간 풍경들이 오래 간직된다. 시각과 마음으로 입력한 것 외에 몸으로 각인한 기억도 오래 간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았다.

유년의 기억 때문에 개를 무서워하는 경숙이 산책하던 개가 살갑게 달려드는 통에 놀라 소스라쳤다. 안타까운 마음에 '함부로 돌아다니니 그런 일이 생기는 것 아니냐'며 철호씨가 야단을 쳤는데 그게 못내 서러웠나보다. 급기야 경숙이 눈물을 흘리며 텐트로 돌아가고 그 뒤를 안쓰러운 표정의 철호씨가 성큼성큼 따라간 것이 아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걱정을 했는데 웬걸, 막상 아침을 먹을 땐 어느새 희희낙락이다. 그러면 그렇지, 사랑싸움에 공연히 내 속만 탔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와 함께 이런 속생각을 날렸다.

'조금 지나보시게 길이 멀고 험해져 몸 고달퍼지면 그저 믿고 의지하게 될 뿐 부부지간에 서운할 겨를도 없다네.'

말이 선착장이지 깊은 모래를 헤치고 바지선의 램프가 열려진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 레인보우 비치 인스킵 선착장 말이 선착장이지 깊은 모래를 헤치고 바지선의 램프가 열려진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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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다 된 시간에 짐을 거둬 4~5Km 떨어진 바지 선착장으로 갔다. 말이 좋아 선착장이지 그냥 모래 해안에 배를 대고 램프를 열면 차들이 깊게 빠지는 모래를 헤치고 올라타는 공간일 뿐이다. 그 와중에 모래에 빠져 바지선에 오르지 못하는 차도 종종 생긴다. 다행이라면 이곳 레인보우 비치의 인스킵 포인트에서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남쪽인 후크 포인트 (Hook Point)로 가는 항로는 육지에서 프레이저 아일랜드로 가는 가장 짧은 노선이어서 바지선이 연이어 있는 관계로 금방 다음 배를 타면 된다.

10분이 조금 넘을 짧은 항해 중에도 배 위에서 프레이저 아이랜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쩌지 못했다. 그토록 안달하고 열망하던 모래섬에 이제 첫발을 딛을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자동차 주행 속도를 80Km로 제한하는 75마일 비치와 바다를 조망하는 인디언 헤드, 신령한 맑은 물 맥켄지 호수는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을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들과 대면하게 될까. 섬의 형체가 육중해지는가 싶더니 드디어 배가 백사장에 닿았다. 오직 사륜구동만 접근이 허용되는 모래의 섬에 도착한 것이다.

레인보우 비치에서 15분 정도의 항해면 프레이저 아일랜드 후크 포인트에 도착한다. 내리는 방법도 탈 때와 동일. 문이 열리면 그냥 내리면 된다.
▲ 프레이저 아일랜드 상륙 레인보우 비치에서 15분 정도의 항해면 프레이저 아일랜드 후크 포인트에 도착한다. 내리는 방법도 탈 때와 동일. 문이 열리면 그냥 내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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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아일랜드
 프레이저 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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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호주, #자동차 여행, #대륙횡단,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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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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