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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도 그다지 높지 않고 산세도 웅장하지 않은데 계절마다 오르는 이들에게 한폭의 그림을 선사하는 산들이 있습니다. 도시인에겐 조금 심심하고 지루할 만한 산 속에 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 오래된 산성이 숨어있듯 자리하고 있다면 그 그림은 더욱 풍성하게 변하지요. 경기도 남부 500m가 갓넘는 키의 아담한 남한산이 그런 곳 중의 하나입니다.

 

눈이 많이 오면 도시는 그만 슬로우 시티로 바뀌고, 자칭 만물의 영장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은 하늘하늘 쌓이는 하얀 눈에 굴복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런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탄성이 나오는 멋진 설경의 세계를 선물해주니 역시 자연은 공평한 것 같습니다. 

 

지난 가을엔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까지 오르기도 해서 아직도 남한산의 가을 풍경이 기억속에 남아있는데, 계절이 겨울로 바뀌고 눈이 내리니 산과 산성은 언제 그랬냐는듯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네요. 눈에 푹 파묻힌 남한산 초입길은 마치 처음 이산에 온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장착하고 눈길을 오르자니 저벅저벅 눈밟히는 소리에 가을날 낙엽 밟는 소리가 연상되어 듣기 좋습니다.

 

눈내린 겨울산의 매력 

 

평소에 자전거도 자주 타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고 있으니 남한산길 정도는 쉽게 생각하고 가뿐하게 오르는데 웬걸 금방 헉헉 숨이 차고 상체가 앞으로 숙여집니다. 아무리 낮고 아담한 산이라지만 눈쌓인 겨울산을 제가 너무 얕봤나 봅니다. 눈구경도 하며 천천히 쉬어가기로 산행전략을 바꾸고 산중에 몇 개씩 보이는 약수터에서 속시원하게 물도 마시며 여유를 가지니 산행이 좀 편해지네요.

 

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쌓인 눈의 밀도도 진해지고 백설기 같이 풍성한 설경에 오르는 사람들마다 제각기 소리내어 감탄을 합니다. '세상에 저 눈 좀 봐' '올 겨울은 최고구만' '천국이 따로 없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이 춘삼월에 웬 눈이야 하며 짜증을 냈을 도시인들의 얄팍한 속내에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이젠 일상용품이 된 디카를 꺼내서 다들 설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혼자 산행을 하는 저에게 다투어 촬영 부탁을 하네요. 다리도 아프고 귀찮기도 했지만 '사진보시'를 하는 마음으로, 산 속에서 수행하는 심정으로 구도를 바꿔가며 여러 장 잘 찍어 주었습니다.

 

누군가 나무를 규칙적으로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산길을 따라 울려 퍼져서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글쎄 딱다구리 한 마리가 눈쌓인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부리로 나무를 두들기고 있네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딱다구리를 본 것도 처음인데, 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쳐다보거나 말거나 제 할 일만 열심히 합니다. 귀엽기도 하고 신통방통하기도 해서 한참을 서서 딱다구리의 나무 두들기기 연주를 들었습니다.

 

눈쌓인 산성은 커다란 화폭의 그림 

 

남한산길은 험준하거나 급경사의 산행길이 아니라서 그런지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우연히 얘기도 나누며 같이 걷게 된 내 어머니뻘의 어떤 분은 몇 년 전 다리 관절이 아파서 고생을 했었는데, 남한산길을 꾸준히 오르면서 나았다고 산을 용한 의사처럼 칭송합니다. 노약자를 특히 우대하고 포용하는 이 산이 괜시리 고맙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걸어 오르니 드디어 산성의 우뚝한 위용이 보입니다. 남한산과 산성은 계절마다 여러 번 올 만한 곳입니다. 단순하고 정적이던 산길은 남한산성을 만나면서 성벽 안쪽과 바깥쪽의 길로 갈라지고 남문, 수어장대, 북문, 서문, 동문등으로 산행길과 주변 풍경이 무척이나 다채로워지니까요.

 

그 옛날 나라를 방어하고 왕조를 지키던 산성은 이제 찾아온 도시인들에게 건강과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 남한산성은 제겐 커다란 화폭의 멋있는 동양화로 보입니다. 그것도 아주 생생한 그림으로 다가와 그 어떤 명화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몰랐거나 무심했던 지난 역사의 이야기도 배우게 해주니 조상의 은덕도 이만한 게 없네요.

 

구불구불 능선을 따라 난 산성길을 걷다보니 남한산에도 소나무들이 참 많이 살고 있습니다. 딱 보기에도 오랜 수령의 소나무들은 그 자체로도 기나긴 세월과 인고의 강한 포스가 느껴지는데, 내린 눈으로 백발이 되니 더욱 신령스럽게 느껴집니다. 이 풍성하고도 드높은 소나무숲이 좋아서 남한산을 찾는 분들도 많다네요.
 
눈내린 산성길을 감탄하며 걷다가 서다가 하니 미처 다 일주하지도 못했습니다. 눈은 호강했지만 오랜만의 산행으로 다리가 힘들어 하여 하산할 때는 버스를 타고 산을 내려왔습니다. 산행길도 아닌데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도 남한산은 멋진 설경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꽃피는 봄에 또 만나자며 마지막 겨울 선물을 전해주는 것 같아 끝까지 즐거운 산행이었네요.

덧붙이는 글 | 3월 11일(목)에 산행을 했으며 코스는 수도권 8호선 전철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려 - 남한산 유원지 - 남한산성 (남문) - 남한산성 일주  


태그:#남한산, #남한산성, #겨울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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