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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봉림리 언덕, 아래로는 홍교가 바라다 보이고 위로는 징광산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집이라 묘사된 대저택이 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표현 그대로 어른 키 두 배 정도의 높이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담장은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옹성을 이루고 있다. 더구나 안방까지 가는데도 계단을 세 차례나 거쳐야 할 만큼 멀다.

 

이 집은 원래 이 지역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식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김범우는 이 저택을 중심으로 좌우익의 중심점을 잡아주는 민족주의자로 나온다.

 

그런데 소설과 실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고 있는 <태백산맥>을 보면서 과연 김범우라는 인물이 존재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알 수 없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인지 진짜인지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하늘은 구름 사이로 살짝 봄을 보여주기만 할 뿐 여전히 추운 겨울이다. 더구나 씽씽 불어오는 바람은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필자의 가슴을 시리게 하고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그래서 아직도 겨울옷 그대로다.

 

그런데 필자보다 나이는 두 배나 많으면서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얇은 봄옷으로 단장하고 있는 것이 있다. 벌교 김범우의 집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순천시 낙안면 신기리에 있는 김치용씨의 100년 된 배나무가 그것인데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도 꿋꿋하게 새순을 뿜어내고 있다.

 

1세기 동안 매년 봄이 되면 배꽃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나무, 밑 둥지가 어른 한 아름은 되고 파르스름한 이끼를 몸에 걸친 튼실한 뿌리는 사방으로 내리 뻗어있다. 이렇게 오래된 배나무는 전국적으로도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치용씨 배 농장에는 무려 80여 그루나 된다.

 

원래 이 지역에 100여년 된 배나무가 있던 집은 김씨네 농장 말고도 두 곳이 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중에 모두 개목(改木-나무를 갈아엎고 새로 심은 것)을 해 사라지고 김씨네 배농장만 심을 당시 그대로 접목만 붙여 배를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농장의 주인인 김치용씨의 증조할아버지가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집의 원 주인이었고 김씨의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며 그 할아버지가 심은 배나무가 바로 지금의 배나무라는 것이다.

 

김범우집 안내판에 새겨진 '이 집은 원래 이 지역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라는 그 주인공격인 사람을 만난 것이다. <태백산맥>이 허구라고 하지만 허구가 아니고 사실인 듯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즐거운 상상.

 

반갑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해 소설속의 인물인 김범우를 김씨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에 대입해 풀어보겠다고 김치용씨에게 여러 질문을 해댔지만 김씨는 "허구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만약 김범우를 찾아보려면 저 배나무에서 찾아보라"고 100년 된 배나무를 가리킨다.

 

도대체 배나무와 김범우는 뭔 관련이 있기에 그곳에서 그를 찾아보라는 말일까?

 

김씨는 "적어도 지금 김범우집이라고 알려진 곳을 증조할아버지가 짓고 할아버지가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몰락해 남의 집이 됐기에 그곳에 김범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한 뒤 "그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곳에 배나무를 심었고 후손인 내가 기르고 있으니 나는 이 배나무에 김범우의 사상이 살아있고 이 배나무가 김범우라 생각한다"며 조상과의 유일한 끈으로 또 선조가 남겨놓은 유일한 살아있는 생물로 배나무를 아끼고 돌본다고 말한다. 

 

'온화한 애정' 이것은 배나무의 꽃말이다. 그리고 봄이면 하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그 무렵부터 100년 동안 백의민족같이 하얀 꽃을 피워낸 김씨네 배나무,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조국을 온화한 애정으로 바라봤던 김범우가 배나무로 환생하고 100년 동안 이 지역에 배꽃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범우를 만나고 싶은가? 그러면 낙안면 신기리의 김치용씨 농장으로 가면 된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바이크올레꾼, #김치용, #김범우,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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