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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지리산 화엄사에서 첫 걸음을 뗀 지리산만인보
 2월 28일 지리산 화엄사에서 첫 걸음을 뗀 지리산만인보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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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화엄사를 출발한 '지리산만인보'가 남악사 앞에서 고천문을 낭독하며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28일 화엄사를 출발한 '지리산만인보'가 남악사 앞에서 고천문을 낭독하며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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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엎드리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엎드리지 않으면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눈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유세차 경인년 정월하고도 달 둥근 대보름날
대한민국 지리산자락 구례 땅 남악사에서
하늘과 땅, 세상의 모든 신명께 저희들 마음을 고 합니다.

2월 28일 오전 지리산 구례 화엄사. 예로부터 산신제를 지내던 남악사 앞마당에서 고천문이 올려졌다. 이날 첫 걸음을 떼는 지리산 만인보가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늘에 제를 올리며 지리산 만인보는 '더불어 살기 위한 마음'으로 떼는 발걸음임을 알렸다. 더불어 살지 않으려는 마음이 전쟁과 고통을 세상에 만들고, 함께 하지 않고 나누지 않으려는 하며 섬기지 않는 마음들이 세상을 병들게 하고 상처를 주고 있는 현실에서 상생과 화해를 위해 더딘 걸음을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와 더불어 사는 모든 생명을 아끼고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산에 들에 새들과 짐승들 겁 없이 뛰어놀고, 갯벌과 바다가 강물이 흘러온 길 막힘없이 우리 곁에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중략)... 더함도 그 덜함도 없이 나뉘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지리산 만인보가 그 첫발을 내 딛습니다. 따뜻한 사랑으로 껴안을 것입니다. 울타리 없는 공동체 지리산 만인보가 만들어 가고 싶은 세상입니다.

댐과 케이블카의 위협에 대응하는 느림의 미학

산길을 따라 지리산 둘레를 걷고 있는 지리산 만인보
 산길을 따라 지리산 둘레를 걷고 있는 지리산 만인보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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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만인보'가 28일 화엄사를 출발해 내년 2월까지 1년 동안의 여정을 시작했다. 지난해 지리산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논의 과정 속에서 의견이 모아져 준비된 '지리산 만인보'는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 등 지리산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지리산을 아끼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걷기를 통해 자연과 생태, 더불어 삶의 중요성을 느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지리산 주변의 논길 마을길 산길을 걸으면서 나와 우리네 사는 모습을 되돌아보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사는 존재임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 '지리산 만인보'가 추구하는 걷기의 목적이다.

하지만 단순 소박함을 지향하고 있는 걷기에 담겨진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느림의 미학으로 개발의 광풍을 막아보자는 것이다. 최근 지리산에 닥쳐오고 있는 댐과 케이블카의 위협이 지리산 만인보의 걸음을 시작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추진되고 있는 각종 개발 사업은 시민사회의 거센 저항에 계속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 그럴수록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를 일삼고 일들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는 현실이고 단시간 내에 이뤄내겠다는 성과주의는 모든 일을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려는 형국이다. 최근 지리산 주변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댐과 케이블카 설치 계획 등도 마찬가지다.

이를 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하는 시민 사회단체들은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으로 진단한 것이고, 대립이 아닌 성찰을 통해 생명과 평화의 관점에서 막아보겠다는 생각에 걷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빠름에는 느림으로 조급함에는 여유로 대응하겠다는 것이 지리산 만인보가 추구하는 방법이다.

삼보일배, 탁발순례, 오체투지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생명 평화적 운동방식이 둘레길을 걷는 형태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생태환경의 중요성 일깨워주는 숲길 여정

28일 화엄사에서 출발한 지리사만인보가 지리산 주변 산길을 따라 걷고 있다
 28일 화엄사에서 출발한 지리사만인보가 지리산 주변 산길을 따라 걷고 있다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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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고유제를 마치고 화엄사를 출발한 지리산 만인보의 여정은 산길로 시작됐다. 1년 동안 지리산 둘레를 걸을 예정인 만인보는 아스팔트 도로가 아닌 산길과 논길이 경로로 선택됐다. 여기에는 걷기를 통해 자연을 보게 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차로 달릴 때는 풀 한포기와 주변 동식물의 생태에 둔감하다면 산길로 걷는 여정은 자연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걸음의 경로로 택한 곳은 인위적으로 꾸며진 도로 보다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을 지나도록 준비돼 있었다. 시작부터 비가 와서 불어난 개울을 건너기 위해 잠시 바지를 걷고 찬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산들바람 속 봄기운 완연한 산길은 자연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게 해 줬다. 걷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위해 준비하는 기운에 카메라를 가까이 댔다. 길가의 풀 한포기와 정갈한 흙길의 느낌이 달랐고 나무와 동식물들의 생태가 정감 있게 다가왔다.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백운산과 오산의 풍경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구례읍 전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맑은 공기를 들이키는 순간 자연의 가치에 대한 굳이 다른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만일 이런 공간이 개발로 파헤쳐지고, 울타리와 말뚝이 박힌다면 어떻게 될까? 걷기에 나선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했다. 도로를 내거나 댐이 들어서 이런 자연이 묻히게 되는 것은 더불어 살아야 되는 현실에 큰 손실이 된다는 것이다.

지리산 만인보에 참여한 정결(16) 학생은 개발의 광풍에서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거창하게 표현했다. 이번에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어린 소녀는 여러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 마냥 재밌고 신나는 기분이었지만 지리산 만인보의 의미는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이기에.

"무분별한 개발 아닌 기존 환경 보전되는 발전 필요"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에서 점심을 대접받고 마을주민들과 여흥을 즐기고 있는 지리산만인보 참가자들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에서 점심을 대접받고 마을주민들과 여흥을 즐기고 있는 지리산만인보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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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만인보의 걸음이 점심식사를 위해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에 도착한 것은 1시 즈음이었다. 걸음의 취지를 알고 있는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환대했다. 마을을 지나는 대규모 손님들을 위해 주민들은 차와 음식으로 정성껏 대접했다.

마을 회관이 지어진후 첫 손님들이라 특별히 대접하는 것이라고 했다. 100여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위해 손수 비빔밥을 준비했고 직접 떡메 체험도 시켜주며 즉석에서 만든 인절미도 맛보게 했다. 마을 주민들과 인사를 나눈 후에는 한바탕 여흥이 펼쳐지기도 했다. 

이날 걷기의 종착지인 죽연마을에서도 마찬가지로 환대가 이어졌다. 하루 종일 걸은 사람들을 위해 고기와 음식을 내어왔고, 지리산 만인보 참석자들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를 하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상사마을 오철수 이장은 지리산 만인보의 취지에 공감하며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기존의 환경이 잘 보전되는 상태에서 지리산 주변이 발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케이블카 찬반 논란이 거센 지역이지만 환경을 훼손하는 개발에 초래할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리산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산악인 함태식 선생(83)도 "산과 강 등 자연을 훼손하는 행동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지리산을 노리고 있는 각종 개발 계획이 늘어나고 있는 것에 우려를 나타냈다.

지리산 만인보 준비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생명과 평화의 위기가 왔음에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소유와 힘의 논리, 경쟁과 지배의 논리만이 안타깝다"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폭력, 경쟁을 통해 사라지고 있는 존중과 배려 등 사회가 처한 위기들이 지리산 만인보를 통해 치유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많은 분들이 걸음에 동참할 수 있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지리산 만인보는 내년 2월까지 매월 두 번째와 네 번째 격주 토요일에 진행될 예정이다, 박화강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비롯해 성염(전 교황청 대사), 공이송(전 광주일보 편집국장), 신경림(시인), 연관스님(실상사), 윤장현(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 이호철(소설가), 함태식(산악인), 임봉재(카톨릭농민회장)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공동대표로 나서 만인보의 걸음을 이끌게 된다.

"자연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을 것"
[인터뷰] 지리산 만인보 박화강 공동대표
지리산만인보 공동대표
▲ 박화강 지리산만인보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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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성찰도 중요하지만 사회에 대한 성찰도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변화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특별히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다시 잡혔으면 합니다."

28일 화엄사에서 만난 지리산 만인보 박화강 공동대표(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는 만인보의 의미를 설명하며 "자연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를 성찰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정책 입안자들이 자연은 개발하고 정복하는 대상이 아닌 공존하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어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성찰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국민들이 개발을 통해 이용하려 식으로 산을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이는 개인의 성찰을 통해서 지리산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할 것입니다. 주변에 지리산을 이용과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은데, 자연관이 바뀌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

그는 최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케이블카 발주 용역 등 현안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이 크다면서 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전임 이사장으로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보이고 있는 모습에 대한 고언이었다.

박화강 공동대표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의 압박에 의해 쫓겨났다.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들에 대한 퇴임 압박에 밀려난 것이다. 이후 고향 보성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있지만 국립공원의 생태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여전했다. 

다른 일에는 특별한 관심을 안 둔다는 그가 지리산 만인보를 위해 나선 것도 자연 생태의 보전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남을 배려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결국 지금의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다고 말한 그는 그런 부분을 치유해 보자는 마음으로 나선 길이기도 했다. 

"모든 산이 그렇잖아요. 돈이 있고 없고나 신분의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품고 있지 않습니까. 산처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면 갈등도 해소되고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

박화강 공동대표는 "평소에도 걷기와 산행을 즐겨하는데, 걷기는 자기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면서 "지리산 만인보를 통해 아픈 마음과 내면이 치유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느린 걸음을 통해 자연을 가까이서 느껴보면 산과 강의 중요성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고 결국 그것이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 해소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만인보 홈페이지 http://www.slowjirisan.net



태그:#지리산만인보, #케이블카, #지리산댐,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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