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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달이 둥~실(제주 새별오름)
 정월대보름달이 둥~실(제주 새별오름)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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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 들불을 놓는 놀이가 있다. 이름 하여 제주들불축제. 그런데 오름이 기생화산의 제주방언이고 보면, 그 오름에 불을 놓는다는 건 꼬마화산에 생명을 불어넣어 활화산으로 돌려주는 일 아닌가.  

이런 매력적인 축제에 빠질 순 없는 법. 축제 셋째 날, 그러니까 정월대보름날에 점심으로 작년에 아내가 정성껏 말려둔 아홉 가지 묵나물로 나물밥을 해먹고는 서둘러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역시, 오름에 불 놓기는 나에게만 매력적인 건 아닌 모양인지 새별오름 일대는 이곳 제주로 이사 온 이래 결코 본 적이 없었던 '군중'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제주도에 매년 연말연시와 설, 추석 명절 말고도 항공권 전석이 매진되는 때가 이 축제기간이라더니 조금도 과장이 아닌 모양이다. 

좌우 천막에서 다양한 시식거리들이...(제주들불축제)
 좌우 천막에서 다양한 시식거리들이...(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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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을 쫓는 아이... (제주들불축제)
 연을 쫓는 아이...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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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새별오름으로 향하는 긴 맞음 길에는 각종 먹거리와 제주특산품 홍보부스가 늘어서 축제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차와 제주보리로 만든 막걸리에 돼지불고기나 말린 귤까지 시식코너가 다양한데, 단연 우리를 놀라게 한 건 굴비였다. 굴비 반 토막을 시식케 한 배짱도 그렇거니와 길에 서서 먹는 추자도 굴비의 그 맛이 기가 막혔다. 

그리고 적지 않은 간식거리를 섭취한 후 올려다본 하늘에는 크고 작은 연들이 비행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지난해의 액운을 불태우고 오늘 오름에 새 생명을 가져다줄 성화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풍성한 먹거리와 하늘을 나는 연들뿐만 아니라 먹장구름 사이로 조금씩 힘을 내고 있는 파란하늘과 3일 동안 고기만 구웠다는 축협에서 일하는 후배 녀석의 투덜거림도 다 좋아보였다.

그렇지만 세계 어디를 가도 축제를 축제답게 하는 건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이곳에 찾아온 사람들 자신이다. 큰 배낭을 둘러메고도 씩씩하게 돌아다니는 도보여행자들, 잔뜩 들뜬 얼굴로 낯선 문화 사이를 기웃거리는 외국인들, 왁자지껄 즐겁기만 한 단체여행자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은 가족 방문자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술렁거림이 이 축제가 꽤 좋은 축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다양한 여행자들... (제주들불축제)
 다양한 여행자들...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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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 (제주들불축제)
 달집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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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오름 아래쪽에 세워둔 거대한 달집에 올 한 해 소망을 적은 소원지를 매달았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우리들의 소망은 참 다양하면서도 소박하다. 앞선 사람들이 매달고 간 소망들을 소리 내어 하나씩 읽어본다.

"유럽여행 안전하게 잘 다녀오도록 해주세요."
"목포시 000 000 00번지 땅 매입 할 수 있게…."
"대박 기원! 임용 합격!" 
"나도 민지처럼 춤 잘 추게 해 주세요."  
"사랑 받았으면 좋겠다."

그곳에서 멈춘다.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두 번이나 다시 읽어보지만 얼른 심경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많이 외로웠을까. 이 소망을 남기고 간 그 사람.

내가 그이의 심경을 느껴보려고 애쓰는 사이에 중앙 무대에서는 축제행사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온 고등학생 아카펠라중창단의 노래공연과 중국 구이린(계림) 꼬마들의 전통춤과 무술 공연이 끝나면서, 태평소를 앞세운 주최 측의 폐막주제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달집점화와 오름불놓기를 위한 '성화불' 채집이 시작되었다. 그를 위해 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 정령이 등장했다. 

씻김굿: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 정령 (제주들불축제)
 씻김굿: 설문대할망의 막내아들 정령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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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제주에는 신들이 참 많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1만8천에 이른다고 하니 인디아에 버금가는 신들의 고향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신들이 많은 만큼 신화도 많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신화 중의 하나인 '설문대할망'의 신화가 오늘 축제에 등장할 모양이었다.

'설문대할망'은 탐라 섬의 창조신이자 어머니인데, 제주 앞 바다가 무릎에서 찰랑거릴 만큼 큰 신이었단다. 그가 처음 제주에 내려와서 보니 마땅히 앉을 만한 곳이 없어 입고 있던 헌 치마로 흙을 날라 놓았는데 그것이 한라산이고, 앉을 때 엉덩이가 아파 뾰족한 부분을 덜어내자 곧 백록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 헌 치마에 난 구멍 사이로 흙이 떨어져 생겨난 부분이 360개에 이르는 오름이란다.

이렇게 제주의 지형을 창조하신 설문대할망에게는 500명의 아들이 있었다한다. 하루는 아들들이 사냥을 나간 사이 설문대할망은 아주 큰 솥에다 죽을 쑤었다. 그런데 500명분의 죽을 쑤는 일은 창조여신에게도 힘든 일이었을까. 할망은 죽을 젓다가 그만 죽 솥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를 알 리 없는 500명의 아들들은 허기져서 사냥에서 돌아왔고, 모두 죽을 나누어먹었다. 그런데 죽을 다 먹고 나자 아주 큰 뼈가 나온 것이다. 그때서야 자신들이 한 짓을 알게 된 그들은 내내 통곡을 하다 모두 바위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라산 영실기암의 오백나한상이라 한다.

그때 막내아들은 어머니가 빠진 죽을 먹어버린 한을 풀길이 없어 제주 서쪽 끝에 있는 무인도인 차귀 섬이 되었다는데, 오늘 그 막내아들의 정령이 어머니 설문대할망의 씻김굿을 위해 등장한 것이다.

달집과 오름에 불을 놓으러 가는 횃불들의 행진 (제주들불축제)
 달집과 오름에 불을 놓으러 가는 횃불들의 행진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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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들의 행진 (제주들불축제)
 횃불들의 행진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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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놀이 (제주들불축제)
 들불놀이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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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성화대에서 생명의 불을 채집한 그가 하얀 천을 가르며 나아오자 제주의 예쁜 아이들이 횃불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성화대 위로 둥실 보름달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3일간의 축제 기간 내내 자욱했던 안개와 먹장구름을 뚫고 정월대보름달이 둥실 떠오른 것이다. 마치 신화의 땅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소망을 직접 들어주기 위해서라는 듯.

씻김굿이 끝나자 미리 신청한 100여명의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오름을 향해 행진했다. 그리고는 오름 아래에 한 줄로 정렬했다가 일시에 달집과 오름에 불을 놓았다. 때 맞춰 미리 오름에 설치해둔 화약들이 터지며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휘영청 밝은 달밤에 달집과 오름에 불을 놓고는 타오르는 불꽃과 번져가는 들불을 보며 올 한 해의 평화와 안녕을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청정 제주 하늘에 굳이 저 화약덩어리들을 쏘아 올려야 했을까…. 사실 난 조금 불만이다. 그래도 탄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이들 얼굴에 피어나는 붉은 꽃들은 예쁘다.

(제주들불축제)
▲ 정월대보름달이 둥~실.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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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들불축제)
▲ 정월대보름달이 둥~실.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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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불길이 달집을 삼키며 타오르는 사이 무대에선 강강술래가 울려나왔다. 사람들도 하나둘 강강술래를 부르며 풍물패가 만들어내는 둥근 원으로 모여들었다.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내외국인 할 것 없이 풍물패를 따라 손에 손을 잡았다. 그리곤 뛰고 발 구르고 춤을 추며 난장을 돌았다.

어느새 아내도 춤판에 뛰어들고, 난 발가락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으며 사진기를 든 채 시민기자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그때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틀 전에 왔다던 원어민 영어강사 패거리들이 내 카메라에 잡혔다.

(제주들불축제)
▲ 강강술래 (제주들불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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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흥이 머리끝까지 오른 모양인지 아직 찬 밤기운에도 뻘뻘 땀을 흘리며 발을 구르고 팔을 치켜들면서 넘쳐 솟구치는 즐거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들만이 아니라 모두들. 모두가 그렇게 마음을 열고 어우러지고 있었다. 2010년 제주정월대보름 들불축제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내년을 기약하며. 이제 제주 오름에 들불을 놓고 제주의 신들을 만나고 싶은 이 있거든, 내년까지 기다리시길. 만약 그이가 '육지사람'이라면 꼭 한 달 전에 비행기나 배편을 예약하시길, 꼭.


태그:#제주들불축제, #정월대보름, #길은사람사이로흐른다, #새별오름, #설문대할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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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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