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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막이 공사를 하기 전인 2006년 3월 새만금 어민들이 백합을 채취하기 위해 삼삼오오 경운기를 나눠타고 갯벌로 향하고 있다.
 물막이 공사를 하기 전인 2006년 3월 새만금 어민들이 백합을 채취하기 위해 삼삼오오 경운기를 나눠타고 갯벌로 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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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 새만금 간척사업 예정지인 옥구염전에 날아든 수천마리의 철새떼. 2002년의 모습.
 전북 군산 새만금 간척사업 예정지인 옥구염전에 날아든 수천마리의 철새떼. 2002년의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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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10시에 고창에 도착해서 자동차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 5시가 되면 고창 갯벌에 몰래 대합을 잡는 거야. 어떤 아줌마는 한 번은 주민에게 들켜서 도망치느라 혼났대."

과거 갯벌이 드넓게 펼쳐져 있던 전라북도 부안군 계화면(이하 계화도)의 풍경은 어디로 갔을까.( 여기를 누르시면 과거 계화도 갯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맨손 어업을 하는 아주머니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8일부터 19일까지 1박 2일로 머무르면서 살펴본 계화도에서는 갯벌의 흔적을 찾기 힘들었다. 갯벌이 있어야 할 곳에는 물이 차올라있거나 이미 메말라 풀들만 무성할 뿐이었다.

계화도의 갯벌은 이미 메말랐고 그 위에 풀만 무성하게 자랐다. 2006년 방조제 완공 이후 갯벌이 마르자 모래섞인 바람이 계화 주민들을 괴롭혔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풀을 심었다.
▲ 계화도의 메마른 갯벌 계화도의 갯벌은 이미 메말랐고 그 위에 풀만 무성하게 자랐다. 2006년 방조제 완공 이후 갯벌이 마르자 모래섞인 바람이 계화 주민들을 괴롭혔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풀을 심었다.
ⓒ 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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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 주민들이 갯벌을 살리자는 취지로 세웠던 '짱뚱어 솟대'가 메마른 갯벌 위에 서있다.
▲ 짱뚱어 솟대 계화도 주민들이 갯벌을 살리자는 취지로 세웠던 '짱뚱어 솟대'가 메마른 갯벌 위에 서있다.
ⓒ 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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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한 달에 한, 두 번 해수유통을 하는 몇몇 지역에서만 방조제 문이 열려 물이 빠지면 맨손으로 백합, 모시조개, 바지락 등을 잡는 그레질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가장 상품성 있었던 생합은 현재 사라지고 맨손 어업을 하는 인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이 지역에서 맨손 어업을 하는 아주머니들은 상당수가 홀로 살거나 나이든 노인들이다. 주민들 주장에 의하면 맨손 어업자들의 절반 정도는 보상금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대부분은 부안 읍내의 비정규직을 전전하거나 타 지역에 몰래 숨어서 생합을 캐내고 있다.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아주머니들조차도 많지 않다. 나머지 상당수 여성들은 일손을 놓고 노인정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는 것이 일이다. 

메마른 갯벌에 무슨 그레질을… 그레는 이제 창고 깊숙이

19일 오전에 만난 추귀례 계화면 부녀회장(54)은 계화도에 이제 얼마 안 남은 맨손어업자다. 추씨는 이날 새만금 갯벌에 오물을 투기하거나 갯벌지역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는 새만금사업단이 '생계대책'으로 계화도 주민 15명에게 내놓은 일자리다. 추씨 등 마을 주민들은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미 간척사업으로 메말라버린 갯벌을 지킨다.

계화도에 얼마 안 남은 맨손어업자 추귀례 어머님이 19일 우다가와 아스카씨(30, 게이오대 박사과정)의 방문에 기뻐하고 있다. 추씨는 이 곳에서 최근 새만금 간척지에 들어가거나 쓰레기를 투기하는 것을 막는 일 등을 하고 있었다.
▲ 추귀례씨 계화도에 얼마 안 남은 맨손어업자 추귀례 어머님이 19일 우다가와 아스카씨(30, 게이오대 박사과정)의 방문에 기뻐하고 있다. 추씨는 이 곳에서 최근 새만금 간척지에 들어가거나 쓰레기를 투기하는 것을 막는 일 등을 하고 있었다.
ⓒ 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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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씨는 "이번달 조금 (조석간만의 차가 가장 작은 시기)때 아직 마르지 않은 갯벌에서 그레질을 해서 7만원 벌었다"면서 "조금 시기에 방조제 문을 열어주는데 한 달에 2번 정도라 그때만 갯벌이 드러나 그레질을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니 자연히 맨손 어업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던 시절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추씨는 "맨손어업을 하다가 직종을 변경해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들은 그나마 다른 일을 배울 수 있는 3-40대 여성들로 50여명 정도다"면서 "그들은 김공장, 빨래 공장, 인근 리조트에 취직했거나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5-60만원 정도 번다"고 말했다. 

그 중 일부는 맨손어업에 애착을 버리지 못하고 부안 곰소나 고창시 지역 갯벌에 원정을 가서 그레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창에선 그곳 지역 주민들에게 들키지 않게 일해야 한다. 고창 지역 주민들이 계화도 주민이 들어와 갯벌에서 그레질을 못 하도록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열흘 동안 타지에서 그레질 해보니까 골병 들고 고창 사람들에게 들킬까 무서워서 더 이상 (고창까지 가서 하는 맨손어업은) 못 하겠어. 어떤 때는 새벽 4시에 계화에서 나서서 7시에 도착해서 백합을 캐고 오는데 그렇게 일을 해도 하루에 4만원 벌고 왕복할 때 쓰는 기름값 빼면 2만원 정도니까 생계에 큰 도움이 안 되지. 그런데 지금도 위험을 무릅쓰고 고창까지 가는 아주머니들이 있어."

그러나 300여명에 가까운 나머지 맨손어업자 여성들은 아무 일도 못 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또 이들 대다수가 60대 이상 노인들이기 때문에 다른 일을 배우기도 어렵다. 계화 지역에서 맨손어업은 '평생직장'으로 그들에게는 원래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상당수 어민들은 갯벌이 죽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몸도 마음도 병들었고 상당수는 우울증 약을 처방받기도 했다.

강 아무개 할아버지 댁의 그레는 창고 깊숙이 놓여 있었다. 강씨 할아버지가 창고에서 그레를 꺼내 갯벌에서 그레질 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그레질 시범 강 아무개 할아버지 댁의 그레는 창고 깊숙이 놓여 있었다. 강씨 할아버지가 창고에서 그레를 꺼내 갯벌에서 그레질 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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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틀간 마을을 돌아보니 노인정에서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노인들이 곳곳에 있었다. 19일 오후, 상리마을에 위치한 한 노인정에 가보니 서너명 노인들이 힘없이 누워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둡고 그늘져 있었다. 한 할머니는 "이렇게 다들 와서 묻고 가도 수십번 대답해줘도 아무것도 안 변해, 우리는 평생 바다에서 그레질하던 사람들인데 이제 뭘 하겠어"라며 체념어린 말투로 한탄했다.

이날 노인정에서 만난 강 아무개(77) 할아버지는 창고 깊숙한 곳에 놓인 그레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그레질 안 한 지가 얼마인지 이제 기억도 안 난다"며 "공사가 완공되는데 이제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요양보호사로 50만 원 겨우 벌어... '새만금 사업'이 분열 부른 원인

지난 18일 저녁 부안읍에서 만난 이 아무개(66)씨는 2007년 이후 지금까지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새만금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씨는 "그냥 갯벌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해서…"라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기자에게 "갯벌이 말라버려 조개가 입을 벌리고 까져 있는 채로 죽어 있는 걸 본 적 있느냐"며 되묻기도 했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이씨가 한달에 벌어들이는 돈은 평균 50만 원. 그는 매달 1-2명의 노인들을 간호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계화도 주민이었던 그의 남편인 고씨는 택배업에 종사하며 아침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일하면서 겨우 150만 원을 번다. 그렇게 두 부부의 소득은 200만 원이지만 현재 고 3인 어린 자녀가 있어 교육비 걱정이 태산이라고 한다. 

이씨에게 새만금 간척사업은 단순히 그의 삶을 경제적으로 빈곤하게 만든 문제, 그 이상이었다. 이씨는 "새만금 간척 사업이 개인의 이기심을 부추겨 지역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마을 주민 개개인에게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었다"고 말했다.

"2006년 이후 물막이 공사가 시작되고 갯벌에 항상 물이 차있으니까 선주들이 흡입기계(일명 뽐뿌배)를 사서 물이 차있는 갯벌 지역에 남은 바지락을 다 싹쓸이를 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방조제 문이 트여서 물이 빠져도 캐낼 게 아무것도 없는 거죠. 2006년 이전까지만 해도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역 주민들이 뭉쳐서 싸웠을 텐데 (선주들도 생존의 문제가 되니까) 뭐라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 정작 가난한 맨손어업 여성들은 박탈감 느끼고 생존의 위협을 느꼈죠. 그렇게 지역민들끼리 다투고 서로 미워하게 되었어요."

특히 그에게 큰 변화가 일어난 일 중 하나는 돈이 없어 경조사를 챙기지 못하는 일이었다. 2006년 물막이 공사 이전까지는 갯벌에서 일을 할 수 있었기에 계화도 주민끼리 큰 일이 생기면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양보호사로 이직한 이후 생계도 이어가기 어려워지면서 경조사를 챙기기 전에 돈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게다가 급히 돈이 필요할 때도 그 전처럼 쉽게 돈을 빌릴 수 없어 항상 불안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예전에는 육지 사람들이 왜 땅을 사고 돈을 모으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돈 필요하면 그냥 앞에 갯벌에 나가서 일하면 하루에 10만 원은 그냥 버니까. 우선 기본적으로 그레질이 너무 신나고 재밌어서 일이라고 생각도 안 들었고 힘든 줄 몰랐죠. 돈이 급하게 필요하면 옆집 사람한테 일, 이백만원은 서로 믿으면서 빌리고 갚을 수 있었구요. 그래서 돈 욕심도 없었고 모을 생각도 안 하고 살았는데 읍내에서 일하면서 매일 돈 걱정하고 살게 되니까 억장이 무너지네요."

이씨의 남편인 고씨가 운영한 갯벌 배움터 '그레'. 이 곳에서 고씨는 과거 주민들과 새만금 반대 투쟁을 벌였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이씨는 "아직도 갯벌에 미련이 남아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1년치 계약금을 냈다"며 "올 4월에 계약이 만료되면 그 때는 (이 사무실)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아쉬움을 남겼다.
▲ 백합아 다시 만나자 이씨의 남편인 고씨가 운영한 갯벌 배움터 '그레'. 이 곳에서 고씨는 과거 주민들과 새만금 반대 투쟁을 벌였으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이씨는 "아직도 갯벌에 미련이 남아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사무실 1년치 계약금을 냈다"며 "올 4월에 계약이 만료되면 그 때는 (이 사무실)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아쉬움을 남겼다.
ⓒ 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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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장 가진 유지만 배불리는 현실성 없는 보상 기준… 맨손 어업민들 절반 '빈손'

"똑같이 서류를 냈는데 나는 보상도 못 받았어. 보상금 못 받은 사람이 절반은 돼. 받아도 그 쥐꼬리만한 600만원. 우리한테 석달치 소득도 안 되는 돈도 못 받았는데 보상을 다했으니까 (정부는) 이제 우리보고 불법 어업한다고 하지."(정 아무개 할머니,56)

"보상금에 무슨 등급이 있나. 갯벌은 그냥 모두의 건데. 양식장 있는 사람이 제일 돈 많이 받고 그 다음에 배있는 사람이 받고. 갯벌이 간척지가 되면 가장 손해 보는 이들은 맨손어업 아주머니들인데 정작 그 사람들한테 600만원 주면 다행이지. 난 못 배워서 시키는 대로 서류 냈고 뭐가 뭔지도 몰랐는데 결국 보상금 받지도 못 했어. 여기 못 받은 사람도 수두룩해."(이 아무개)

계화도 주민들에게 '보상금'이라는 단어는 금기어다. 이 지역 어느 누구도 제대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맨손 어업을 하는 여성들의 절반 이상이 보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해 피해가 가장 막심했다. 이유는 정부가 내놓은 보상금 기준이 어촌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1991년 그 당시 전북도지사는 포패증(맨손어업을 증명하는 서류)을 신고한 사람에 한해서 보상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맨손어업을 하는 주민들 상당수는 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거나, 신청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보상금제도의 불합리성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가구당 신고 인원도 2명까지만 허용되었고 방조제 밖에서 생합을 캤던 어민은 방조제 '선외' 어업을 했다는 이유로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사실상 방조제 선내, 선외 기준 없이 그레질을 했던 맨손어업자들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맨손 어업자들에 대한 보상금액은 현실성이 떨어졌다. 1-4등급까지 나누어 많게는 1030만원, 적게는 320만원이 보상금으로 지급되었다. 보상금을 받은 이들은 평균 600만원을 받았는데 함한희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사실상 맨손어업을 하는 여성의 평균소득은 1993년 183일 작업에 700여만원, 2003년도 기준으로 261일 갯벌 작업기준으로 2100여 만원을 벌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상금도 3년에 걸쳐 수차례 나누어 지급했다.

그 탓에 맨손어업 여성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공유 소유인 갯벌에 소유권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지급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소유권 기준으로 보상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양식장 가진 사람이 가장 큰 돈 받고 그 다음에 선박 주인, 맨 마지막에 맨손어업자에게 돈이 지급되었다. 그 탓에 양식장을 소유하고 있던 대다수 외지사람이 새만금 간척 사업에 대해 가장 많은 보상금을 받는 수혜를 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유권 및 재산권 등록의 개념이 불분명했던 계화도 주민들은 어촌지역의 문화를 모르는 정부의 보상금 기준에 따라 가차 없이 밀려났다.

이씨는 "보상기준도 터무니없지만 보상금 때문에 지역 주민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이제 갯벌이 메말라 버린 이 시점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눈물을 글썽였다.

2006년 방조제 완공 이후 급속도로 갯벌은 사막화가 진행되었으며 지난 1박2일동안 기자가 돌아본 갯벌에선 특유의 '비린내'와 '짠내'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특히 사막화가 진행된 탓인지 아예 죽은 조개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과거에는 맨손 어업 여성들에게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은 이미 메말라 그들의 삶을 할퀴고 있었다.

새만금 물막이 공사를 막기 위해 계화 여성어민들이 고군분투하며 투쟁한 내용을 담은 이강길 감독의 다큐멘터리 '살기위하여'.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갯벌에서 여성 어민들은 그레질을 할 수 있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추귀례씨다.
▲ 살기위하여 새만금 물막이 공사를 막기 위해 계화 여성어민들이 고군분투하며 투쟁한 내용을 담은 이강길 감독의 다큐멘터리 '살기위하여'. 이 당시까지만 해도 갯벌에서 여성 어민들은 그레질을 할 수 있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추귀례씨다.
ⓒ 엄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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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간척사업

새만금 간척사업은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에 총길이 33km의 방조제를 축조해 총면적 40,100ha의 토지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80년대 후반 사업이 결정되어 91년도부터 보상이 이루어졌다. 지역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6년 3월 새만금 간척 사업을 재개하라는 대법원 판결이 났고 4월에는 부안에서 물막이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6월에 방조제가 완공되었다. 그 이후 급속하게 갯벌의 사막화가 진행되었으며 올 4월 부안 방조제 개공식이 열릴 예정이다.

"새만금 간척사업, 지역 주민이 배제된 정부 주도 개발방식이 문제"
[인터뷰] 게이오 대학 박사과정 우다가와 아스카씨

새만금 간척사업이 어떻게 계화도 지역민들의 지역 문화를 변화시키는지 살펴보기 위해 2008년부터 계화리에서 머무르며 연구하고 있는 우다가와 아스카(30, 일본 게이오 대학 박사과정)씨. 그는 19일 기자와 나눈 대화에서 지역 주민이 배제된 정부 주도 개발방식이 새만금 간척사업에서 드러난 문제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1박 2일 동안 기자와 함께 동행하며 계화도의 생활상의 변화를 상세히 설명해주기도 했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이야기 가운데 일부분이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영향이 지역 주민에게 끼친 문화적 변화가 무엇인지 사례를 들어달라.
명절 때 이 지역의 자녀분들이나 손자들이 찾아오는데 그 때 살펴보면 6-70대 노인가정과 4-50대 가정의 자녀들 사이에서 학력차이가 매우 극명하게 드러난다. 계화 지역민들은 간척 사업이 있기 전에는 매우 부유했다. 새만금 간척사업의 영향을 받기 전에 자녀를 다 키운 6-70대 노인의 자녀 중 상당수는 서울의 명문대 출신이거나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이들로, 박사학위 소유자도 종종 볼 수 있다. 반면 4-50대 가정의 자녀들은 대학조차 못 간 경우가 많다. 그만큼 계화도 지역 사람들이 간척 사업 이전에는 교육비 걱정 없이 자녀들을 교육시켰는데 현재 계화도 주민들의 벌이로는 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일본의 경우 지역문화가 아직도 보존이 잘 된 경우가 많은데 어떻게 가능했나.
일본은 한국과 역사가 다르다. 원래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체제인, 즉 봉건 영주체제의 전통을 강하게 이어받아 현재도 지역 사회에서는 지방 유지의 입김이 중앙의 힘보다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 사회를 분열시키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경우 아무리 (중앙)정부가 결정한 정책이라도 거부권을 행사한다. 사실 일본 지역사회는 정부 정책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웃음)

그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지역사회 일원들이 정부가 지급하는 세금 외에도 그들이 지역사회에서 돈을 모아 지역을 꾸려가기 때문이다. 자본 독립이 이루어진 셈이다. 또한 지역 유지들은 어디까지나 지역민과 고유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인다. 지역민들 주도로 자본력을 키워서 스스로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업을 찾아 사회 변화에 발맞추어 간다.

-그렇다면 한국의 개발방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개발방식의 차이는 역사적, 문화적 차이기도 하고 한국 방식이 추진력도 있어 긍정적인 점도 많다. 다만 새만금 간척사업의 경우는 한국의 업다운 방식이 부작용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개발 방식은 업다운 방식이기 때문에 지역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중앙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정부는 지역 문화를 고려하지 않고 개발을 하고 지역 주민들도 오랜 관습이 남아 있어 정부의 조달과 지시를 기다리게 된다. 가령 한국은 문화재 지정을 받아야 지역 문화재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부가 문화재 지정을 해서 지원을 하면 정부의 간섭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특히 지역사회가 주체적으로 전환하려는 힘을 키우고 정부도 지역 사회의 주도성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사실상 계화도 주민들의 보상금문제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이들의 직업전환을 도울 수 있는 지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노력이 적었다. 일전에 정부에서 계화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일부 교육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지역민들의 문화와 맞지 않아 실패했다고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엄민기자는 11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계화도 , #맨손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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