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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면은 전라북도 부안군의 작은 어촌 마을이다. 그럼에도 2006년 새만금 방조제가 완공되기까지 부안읍 내 수산시장 어패류 공급의 대부분을 담당하던 주요 지역이었다. 백합, 김, 대맛조개 등 서해안의 대표 어패류가 이곳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 69년 대한민국 1호 계화간척산업으로 육지와 연결되기까지 이곳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때문에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계화도'라고 부른다.

지난 18일 오후 4시께 계화도 선착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매서운 바닷바람으로 눈을 제대로 뜨기조차 어려웠다. '혹시 바다에 나가는 배가 있을까'라는 기자의 기대는 곧 사라졌다. 40,50여 척에 달하는 배들은 그대로 정박해 있었고, 몇몇 배들은 수리 중이었다. 잠시 선주들이 모여있는 작은 컨테이너 박스를 찾았다. 간단한 인사를 건넸지만, 시큰둥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박영만(48) 어촌계장이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환경단체니, 학생이니, 교수니,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와서 조사하고, 취재하고 했지만 한계가 있는 거지. 정부도 못하는 일인데….우리한테는 도움이 안돼, 그러니 말만 늘지, 뭐."

그래도 서울에서 멀리 내려온 기자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선주 민아무개씨가 선뜻 다음날 아침에 배를 태워주시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화도 일대에는 이튿날 아침까지 풍랑주의보가 내려있었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 이후 계속된 어종고갈, 일부만 이득

계화도 선착장, 거센 바람 때문에 배가 묶여있다.
 계화도 선착장, 거센 바람 때문에 배가 묶여있다.
ⓒ 김새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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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아침 9시께, 찬 바닷바람 속에 장화까지 갖춰 입은 40대 한 아저씨가 입에 담배를 물고, 멀리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작년까지 횟집을 운영했다던 고재규(48)씨에게 '요즘 생계가 어떤지 물으니 한숨부터 내쉬었다.

"뚝막이 공사한 이후에 많이 줄었지. 예를 들어 10명이 10군데에서 하는 것을 10명이 5군데에서 잡이를 하니 분배가 줄어버리지. 몰리니깐 잡히는 게 줄어. 긍께 힘들어지는 것이여."

박영만 계장은 계화도의 전체 어업고가 예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지는 않았다고 했다. 문제는 그동안 상품성이 높아 많은 어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생합이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민들이 만든 새만금 갯벌 생태지도'를 만든 민아무개씨는 액자에 담긴 자신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하나 하나 가리키면서 설명했다. 생합, 대맛조개, 꽃게 등 서해안의 대표적인 어패류들의 산란지였던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에 방조제가 생기면서 죽뻘(어패류가 서식할 수 없는 갯벌)이 들어와 어패류들의 산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어종이 고갈되면서 새만금 연안 어부들의 생업 자체가 더욱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해수 유통 안 되면 새만금도 시화호처럼 오염 심각해져

어민들이 직접 만든 새만금 갯벌 생태지도이다
▲ 어민들이 만든 새만금 갯벌 생태지도 어민들이 직접 만든 새만금 갯벌 생태지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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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상황에서 지난 2000년 새만금 사업공사가 잠시 중단됐을 때, 주민들과 환경단체들 사이에서 꾸준히 논의됐던 해수유통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이 때문에 주민들의 불안은 다시 커지고 있다.

해수유통이란 배수관문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것을 말한다. 현재는 방조제가 완공되어 자연적인 해수유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전체 새만금의 수질은 그 예전에 비해 나빠졌다. 이러한 상황에 전라북도는 막대한 사업비를 이유로 배수관문을 통한 해수유통이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작년 12월 환경부가 새만금 목표수질 3등급을 위해 '해수유통'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새만금위원회에 전달하면서, 해수유통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중앙과 지방정부사이의 서로 다른 방침 탓에 주민들만 더욱 난처한 지경에 빠져있다. 당초 계화도 주민들은 해수유통을 강하게 주장했다. 고씨는 "해수유통 안 하면 시화호의 경우처럼 악취와 오염으로 3년도 못 버티고 다 없어질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연을 살리기 위해서 되돌려놔야 한다는 이야기를 도청에선 다 커트해 버린다"며 "정치인들의 표심으로 (우리만) 이용되고 있는 셈"이라고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밀물과 썰물로 인해 물이 순환되어야 새만금 갯벌에 사는 어패류들이 철마다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방조제로 인해 이것이 어려워지게 됐고, 그나마 배수관문을 통해 해수를 유통시키고 있지만 이마저 완벽하지는 않다. 이 상황에서 해수유통을 못하면 어민들의 생존권은 위협받게 된다.

생존권이 달린 문제지만 대부분의 선주들은 체념하는 분위기였다. 작은 배를 가지고 있는 김운식(50)씨는 "우리야 (해수유통이 되면) 좋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방법이 있나"라며 "20년간 선거철만 되면 정치하시는 분들이 이리저리 말 바꾸는데, 우리가 말해봤자 안돼, 안돼"라고 고개를 저었다.

'보상' 문제 이후 계화도 마을공동체 분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은 바람으로 배를 탈 수 없게된 기자는 계화도 청년회 사무실로 향했다. 10여평 규모의 사무실에선 7명의 선주들이 카드 놀이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이들 틈에서 조심스레 일부 선주들에게 '보상' 문제를 꺼냈다. 기자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 선주는 "누가 우리가 '보상' 받았다고 하더냐,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어 기자가 "인터넷에서 어업포기조건으로 보상을 받았다는 글을 봤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택시기사에게서 계화도 선주들이 보상금 많이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또 다른 선주가 "자꾸 바깥에서 언론이고 인터넷에서 '보상'받았다고 하니깐 저기 창북리만 하더라도 계화도 선주들 보상금 받고 부자 된 줄 안다니깐, 우린 바깥에서 나쁜 놈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선주 김판용(49)씨는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 앞에 있던 종이컵을 가지고 열심히 설명했다.

"정부에서 내부 감축 시행령이 떨어졌어. 배가 당시 벌어들이는 것까지 합하면 7천에서 8천의 값어치를 하는데 정부고시가 2천에서 3천까지였어. 그것을 넘어가면 탈락하는 거지. 그래서 팔 사람들은 어거지로 그 가격 밑으로 써서 팔아버렸지. 개인물건을 팔아서 돈 받는 게 무슨 보상이야. 그건 돈 주고 산 거지, 정부가 인수해간 거야."

선주들이 당시 받은 것은 '어업권 보상'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어업권'을 돈 주고 사는 것은 보상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보상은 앞으로 어업권으로 인해 벌 수 있는 이익을 제대로 파악해서 주는 것이다.

어업권 보상과 관련해 전라북도 새마을개발계의 한 관계자는 "91년 10월 22일을 기준으로 어업을 한 선주에 대해서 폐업에 대한 보상금으로 배를 산 비용과 함께 영업이익을 제시했다"고 밝혔다. 이는 법령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어 그는 '보상' 문제와 관련해서 하루에도 많은 민원이 들어온다고 밝혔다. 보상금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묻자 그는 "20년이 지나서 보상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지역 간 갈등만 발생하는 것"이라며 자세한 언급은 피했다.

이 '보상' 문제 때문에 외부에서는 '보상금 많이 받고 잘사는 선주'라는 인식이 퍼졌고, 계화도 안에서도 마을 주민들 간에 갈등의 골이 생기게 됐다. 이곳 어촌 계장의 말에 따르면, 이들 선주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대략 4000만 원에서 5000만 원 수준이다. 배를 가지고 있지 못한 주민들로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정도의 상당한 금액이다. 이 때문에 주민사이에서도 보상문제로 조금씩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바지락, 백합과 같은 조개류를 잡기위한 '배기계'(흡입기)에 관해 선주들과 일반 맨손잡이를 하는 마을주민 간에 갈등이 있다. 계화도에서 나와 부안읍에서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이아무개씨는 선주들에 대한 '박탈감'을 숨기지 않았다.

"2006년에는 20만 정도 잡혔는데 2008년과 작년에는 아예 없어졌어. 물속에서 산란을 많이 하고 양이 늘었다 해도 가라앉아버렸어. 그런데 기계를 쓰는 건 2006년 이전이었다면 못하는 일이었어. 지역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

그의 말에 의하면 '흡입기' 사용은 조개류의 산란장소를 파괴하고 맨손어업 하는 사람들이 적은 양이나마 캐낼 수 있는 조개류마저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선주들은 이 '흡입기'로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바지락을 얻는다고 했다. 이 장비가 없다면 어업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빚을 내서라도 장만했지만, 요즘에 이 역시 많이 잡히지 않아 빚만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마을 안에서의 갈등, 하지만 생존권 위협은 같아

계화도 주민들이 작업을 하는 계화도 앞바다의 모습
▲ 계화도 계화도 주민들이 작업을 하는 계화도 앞바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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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방조제 사업이 결국 오랜 시간 함께 했던 계화도 주민들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주민들 사이에 '박탈감'이라는 감정이 생기고, 빈부 차이가 벌어지면서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새만금과 계화도 지역의 보상금을 챙겨간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지역 사람이라는 것.

새만금 사업은 91년부터 시작해서 이미 20년동안 진행해 온 장기 국책사업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상처받은 것은 계화도 지역 주민뿐이다. 그동안 많은 갈등과 변화를 겪어온 주민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부의 무원칙적인 태도에 체념한 듯하다.

계화도 어촌계장 박영만씨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비판했다.

"새만금을 보는 시각은 계화도, 부안, 전라북도, 대한민국 다 달라요. 계화도 사람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도민은 아니고 부안군민 정도나 됩니다. 전라북도에서는 새만금 연안 주민은 주민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새만금 문제에 정작 주민들의 이야기는 다 빠져 있는 것이죠."

계화도 어촌계장 박영만씨가 계화도 사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계화도 어촌계장 계화도 어촌계장 박영만씨가 계화도 사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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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새롬 기자는 오마이뉴스 11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계화도, #새만금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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