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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엿장수로 먹고 살 수 있을까. 팔십 평생을 엿장수로 살아온 윤팔도. 한때 떵떵거릴 정도로 수익이 많기도 했으나 젊은 날 술판에 모든 돈을 내던지고 말았다.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벌이 밖에 못하던 엿장수 일에 아들놈이 끼어들었다.

 

처음에는 대학물까지 먹은 놈이 엿장수를 하겠다고 해서 죽어도 안 된다고 혼을 냈다. 그러나 회사를 다니던 아들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나도 엿 팔라요"라며 엿판에 뛰어들었다.

 

 

아들 일권은 젊은 날에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엿불림 소리도 듣기 창피했고, 날마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아버지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60년 넘게 한 우물만 파고 매달려온 아버지가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직장일이라는 것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탓이리라.

 

무엇보다 아버지의 엿불림이 사라질 것 같아서 아버지의 대를 잇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성악을 전공해서 그런지 가락을 곧잘 따라한다고 기뻐한다. 아들은 아버지가 엿불림 문화재로 지정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상술도 좋았다. 엿판에 뛰어든 지 4년 만에 매출이 열 배 이상 뛰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전국 장터를 돌아다니며 벌어봐야 한 해에 2천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아들 일권씨가 전국 폐백음식점과 기업, 호텔을 돌아다니며 유통망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엿을 브랜드화하고 웰빙 엿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06년에는 인터넷 홈페이지도 만들어서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 해 매출액만 2억 원이 훌쩍 넘었다. 만족할만한 수치다. 그런데 아들의 꿈은 더 크다. 그의 목표매출액은 2백억 원이다. 목표가 달성되지 않으면 또 어떤가. '엿장수 마음대로' 아닌가.

 

남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는 사람들은 모두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역경이 다가와도 불굴의 의지로 일어서고, 남들이 괄시하고 천대하는 일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체면만 중시하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반성이 들었다.

 

하나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TV에서 집채보다 더 큰 돌을 몇 십 년 동안 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돌이 보통 돌이 아니다. 수천 년에서 수만 년이 넘는 희귀한 돌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농사일하면서 틈틈이 삽질을 해왔다고 한다. 수십 대 트럭분의 흙을 파왔지만 아직도 돌의 깊이를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들까지 파보겠다고 한다. 말 그대로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할만하다.

 

남들이 보면 이런 사람들을 고집불통으로 부를 수도 있겠으나 이들은 한결같이 다른 일에 눈 돌리지 않고 한 우물만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이들의 삶을 엿보면서 '나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고문헌 :  <한국의 고집쟁이들, 박종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블로그 정철상의 커리어노트(careernote.co.kr)과 다음뷰에도 게재되었습니다.


태그:#엿장수 윤팔도 부자(夫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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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개발연구소 대표로 대구대, 나사렛대 취업전담교수를 거쳐 대학, 기업, 기관 등 연간 200여회 강연하고 있다. 《대한민국 진로백서》 등 다수 도서를 집필하며 청춘의 진로방향을 제시해 언론과 네티즌으로부터 ‘젊은이들의 무릎팍도사’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정교수의 인생수업’이라는 유튜브를 운영하며 대한민국의 진로성숙도를 높이기 위해 맹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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