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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눈이 내린 아침
 새 눈이 내린 아침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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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를 찾는 여정은 알 수 없는 끝을 향해 달리는 완행열차에 올라탄 기분이다. 아침 햇살은 우리보다 앞서 도착하여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창을 쨍하니 두드린다. 피곤한 몸을 일으키는 새날이 느리게 시작된다. 오늘도 몸을 가다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준비해야 한다.

하루 동안을 비추는 햇살은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듯 지루하게 땅 위를 비춘다. 자칫 그 지루함에 빠지면 나태한 오후를 보내기 십상이다. 누구 하나 재촉하는 이 없는 숲 속, 지치고 용기 잃은 마음으로 잠을 자려 하면 온종일이라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늘이 어떤 빛을 비추건, 구름이 어떤 모양으로 다음 에르미타를 덮어주건 간에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는 오늘도 긴 여정에 발을 내디뎠다.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은 에르미타의 감정을 실어 줄 유일한 존재"

눈 속에서 촬영하는 에르미타
 눈 속에서 촬영하는 에르미타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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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며칠째인지, 계속해서 파란 하늘이 사진사 세바스티안을 당혹스럽게 했다. 파란 하늘이 그를 당분간 실업자로 놓아둘 생각인 듯했다. 파란 하늘도 충분히 드라마틱한 풍경을 자아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에 세바스티안은 흥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은 내 사진 속에서 에르미타의 감정을 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세계와 뚝 떨어져 살고자 했던 당시 에르미타 사람들의 감정이 푸른 하늘처럼 화려했을 거라고 생각해? 작고 초라한 에르미타 안에서 느꼈을 그들의 외로움은 밝고 파란 하늘에서는 묻어나지 않아."

카탈로니아 지방의 구름은 모두 산 위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산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50여 킬로미터를 달린 끝에 피레네 산맥 어디쯤인가 도착했다. 더 이상 좁은 산길을 차로 오를 수가 없어 우리는 장비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에르미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표지판도 얼마 동안을 가야 할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에르미타를 찾는 긴 여정
 에르미타를 찾는 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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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를 걸었을까? 무거운 장비를 들고 좁은 산길을 걷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 위에 걸린 구름이 언제까지 그 위에 머물러 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시간가량을 걸어 산에 오르자 춥고 외로운 에르미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미 산 위를 가리던 구름은 프랑스를 향해 북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하늘은 그렇게 푸름을 과시하며 저물어 버렸다.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내려오는 길은 더욱 삭막하고 거칠었다.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에 도착한 우리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밤을 산속에서 기다리며 또 다시 잠을 청해야만 했다. 캄캄한 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우리의 잠을 깨운 것은 킁킁대는 낯선 소리였다. 나는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커튼을 슬며시 젖히고 밖을 응시했다. 승합차 주변을 둘러싸고 대여섯 마리의 멧돼지들이 땅을 파헤치는 것이 어둠 속에서 보였다. 한참 동안 에르미타 익스프레스는 낯설고 광기 어린 소음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다시 잠이 들었다.

간밤에 잠을 설치게 하던 맷돼지는 다음날 아침 사냥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간밤에 잠을 설치게 하던 맷돼지는 다음날 아침 사냥군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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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깨어났을 때 주변은 이미 조용해져 있었다. 아침이 다시 밝았다. 하늘은 여전히 파란 광선을 거세게 땅 위에 내려치고 있었다.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도착하자 사냥꾼에 의해 사살된 멧돼지 몇 마리를 만날 수 있었다. 간밤에 신나게 땅을 파헤치던 그 멧돼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아티스트란 외로움을 즐기는 강인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매우 어린 아이 같고 조바심 많으며 쉽게 좌절하는 병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나흘째의 화창한 태양이 그의 얼굴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여행길에 만난 길동무들, 두려움의 존재 아닌 외로운 여행의 먼 인생 선배

눈을 소복히 맞은 고양이 시체(위)와 하늘 위를 날던 매(아래)
 눈을 소복히 맞은 고양이 시체(위)와 하늘 위를 날던 매(아래)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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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많은 만남이 이루어진다. 기분 좋은 만남이 있고 그렇지 않은 만남이 있다. 스페인의 여행길은 많은 동물 친구들로 가득하다. 한 번은 눈 위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 죽어 있는 고양이를 만났고, 사진을 찍는 동안 호기심으로 찾아오는 동네의 양치기 개들과 사냥꾼의 개들도 종종 만났다. 하늘 위를 나는 매를 만나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숲에서 식사하다 작은 새 로빈을 만나기도 한다. 에르미타 여행 7년째인 그는 그동안 우리가 마주치는 동물의 이름들을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숲속의 사슴(왼쪽)과 로빈이라는 이름의 작은 새(오른쪽)
 숲속의 사슴(왼쪽)과 로빈이라는 이름의 작은 새(오른쪽)
ⓒ 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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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엔 귀한 만남도 있다. 숲을 산책하는 사슴들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행운이 따를 것만 같았다. 안개 길을 떠돌다 눈앞에 움직이는 존재가 느껴져 조용히 동작을 멈추면 마법처럼 걷히는 안갯속에서 의연한 자태의 말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감상할 수 있었다.

에르미타 안의 유골
 에르미타 안의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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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 곁에 묻힌 유골을 만나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의 존재가 아닌 외로운 여행에서 만나는 먼 인생의 선배라고 했다.

길에서 만난 젖소의 시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위 사진). 송아지의 탄생을 지켜보던 순간(아래 사진).
▲ 생과 사 길에서 만난 젖소의 시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위 사진). 송아지의 탄생을 지켜보던 순간(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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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산길을 꼬불꼬불 달렸다. 산 중턱 작은 마을 입구에 젖소가 한 마리 발이 묶인 채 죽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 죽은 소를 뒤로하고 산의 정상에 오르자 누런 암소 한 마리가 갑자기 주저앉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끼를 낳고 있는 암소였다. 소 한 마리가 떠나고 다른 소 한 마리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에르미타를 터좋은 화장실로 여기는 마을의 개(위). 눈 앞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자 의연한 자태의 말들이 나타났다(아래).
 에르미타를 터좋은 화장실로 여기는 마을의 개(위). 눈 앞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자 의연한 자태의 말들이 나타났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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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안은 이들을 모두 에르미타 여행의 길동무라 부른다. 무료한 여행에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에르미타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무수한 만남들이 존재하고 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포즈를 잡는 잭 러셀
 사진을 찍을 때마다 포즈를 잡는 잭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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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만남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시에는 잘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야기는 완성되기 마련이다.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이란 없음을 뒤늦게 깨닫게 해주곤 한다. 다시 에르미타 익스프레스의 하루가 저물었다.

"제발 내일은 눈이 내렸으면 좋겠어. 하얀 눈과 인디고 블루의 잿빛 하늘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에르미타를 찍어 주머니 속에 챙겨가는 거지…."

아련하고 속절없는 바람이지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만난 늑대과의 동물
 눈 속에서 만난 늑대과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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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커튼을 열고 밖을 보니 산속은 온통 하얀색으로 가득했다.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며칠 동안의 밝은 날씨를 보상이라도 하듯 날은 온통 찌푸려 있었다. 세바스티안이 승합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때였다. 문 앞에 늑대 한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우리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늑대와 눈을 맞추었다. 늑대는 숲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몇 걸음,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의 모습은 사라졌다. 한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은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세바스티안은 눈 위를 조용히 밟으며 에르미타를 향했다. 늑대가 어디에선가 그를 관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지은경 기자는 지난 2000~2005년 프랑스 파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경상남도 외도 전시 기획을 마치고 유럽을 여행 중입니다. 현재 스페인에 머물고 있으며, 미술, 건축, 여행 등 유럽 문화와 관련된 기사를 쓸 계획입니다.



태그:#에르미타, #세바스티안, #스페인, #길동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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