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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에서 축제를 즐기기 위해 나가사키의 중화가를 찾은 사람들.
 빗속에서 축제를 즐기기 위해 나가사키의 중화가를 찾은 사람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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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는 지금 빛의 도시로 변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호화롭고 찬란한 등불이 거리를 수놓고, 대형 조형물이 시내 곳곳에 세워져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삿포로에 눈 축제가 있다면, 나가사키엔 랜턴 페스티벌(제등 축제)이 있다. 여기가 중국인지 일본인지 혹은 판타지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의 황홀한 빛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매년 중국의 춘절(중국식 설날, 음력 1월 1일)에 맞춰 개막되는 이 축제는 중국의 정월대보름인 원소절에 맞추어 보름 동안 이어진다. 일본 땅에서 왜 중국인의 설날이 나가사키 거주 화교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대축제가 되었을까.

일본은 에도 시대 초기(17세기 초)부터 미국 페리 제독이 대포를 실은 군함을 끌고 와 개항을 거듭 요구한 결과로서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958년에 이르기까지, 240여 년에 걸친 쇄국 시대가 이어졌다. 그러나 나가사키에서는 오히려 쇄국시대에 해외 문화가 꽃을 피웠다. 쇄국시대의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長崎), 쓰시마(対馬), 사츠마(薩摩), 마츠마에(松前) 4곳에만 한정하여, 각각 네덜란드와 중국, 조선, 류쿠, 아이누와의 무역을 허용했다.

나카시마 강변을 찬란하게 수놓은 노란 등불의 행렬. 나가사키를 빛의 도시로 바꾸는 랜턴 페스티벌의 풍경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나카시마 강변을 찬란하게 수놓은 노란 등불의 행렬. 나가사키를 빛의 도시로 바꾸는 랜턴 페스티벌의 풍경 중 최고라 할 수 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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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는 쇄국 시대 이전에는 포르투갈과의 교역을 통하여 서양문물과 기독교가 들어오는 창구가 되었고, 쇄국 시대에는 네덜란드 및 중국과의 교역이 허용되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에 국제도시로 번성했다. 따라서 나가사키에는 서양의 학문과 기술, 문화, 정보 등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고, 동시에 풍속이나 문화, 종교 면에서는 중국의 영향이 수백년을 넘어 현재까지도 나가사키 사람들의 삶과 문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요코하마, 고베와 나란히 일본의 3대 중화가를 품고 있는 나가사키는 중국과의 인연이 매우 깊은 도시다. 중국과의 교류가 가장 번성했던 때는 나가사키 총 인구 6만 명 가운데 1만 명이 중국인이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랜턴 페스티벌(음력1월1일) , 정령 띄우기(8월), 백중맞이 (음력 7월15일), 오쿤치(10월) 등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축제와 행사, 나가사키 짬뽕 등 지역 명물 요리에도 중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시내에는 십 수 개에 달하는 다양한 사찰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중국인이 세운 중국풍 절도 상당수다. 또 무역과 장사를 위해 나가사키에 온 중국인들은 쇄국정책에 의해 일본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면서 한정된 구역에서 중국인들끼리 거주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때 형성된 중국인 주택지 터도 화재로 인한 소실과 복원, 개수 등을 거쳐 현재까지 중국인들의 역사를 전해주는 유적지로 남아있다.

나카시마 강변을 수놓은 노란 등불과 함께 올해 처음 선보인 오브제 '료마와 오료'.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항상 선두에 서는 막부 시대 말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는 올해 나가사키의 최대 브랜드다.
 나카시마 강변을 수놓은 노란 등불과 함께 올해 처음 선보인 오브제 '료마와 오료'.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로 항상 선두에 서는 막부 시대 말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는 올해 나가사키의 최대 브랜드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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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설날은 양력 1월 1일이다. '오쇼가츠'라 불리우는 일본의 설날은 보통 연말인 12월 29일부터 새해 1월 3일까지는 쉬는 것으로 돼 있다. 더 긴 경우는 그보다 앞서 휴일이 시작되어 1월 6일까지 휴일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중국인의 설날인 '춘절(春節)'은은 한국인의 설날과 같이 음력으로 1월 1일이다. 중국인들은 정월 초하룻날 전날 밤을 가족과 함께 모두 모여 잠을 자지 않고 새해를 맞이한다. 그리고 대보름이 되면 신들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여, 밤에 구름이나 안개가 끼어도 정령을 볼 수 있도록 등불을 밝힌 사람들의 행렬이 줄지어 마을을 천천히 행진하는 제등축제가 예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나가사키에서 살아온 화교들도 이러한 풍습에 따라 '춘절제'로서 나가사키 신치 중화가에서 소박하게 그들만의 명절을 치러왔으나, 1994년부터 나가사키 시가 화교들의 설날 풍습과 축제에서 힌트를 얻어 규모를 확대해 시 주최의 '랜턴 페스티벌(Lantern Festival)'을 시작했다. 일년 내내 각종 축제가 펼쳐지는 나가사키이지만, 랜턴 페스티벌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우선 음력 정월 초하룻날 저녁 5시 반이 되면 시내의 1만 5천 개의 제등에 일제히 불을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용춤, 사자춤, 민속악기 연주회, 중국 기예 공연과 황제 퍼레이드, 규슈 각 지역에서 온 캠페인 레이디들이 대집합하는 고향자랑 대회 등이 무려 15일에 걸쳐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진다. 각종 상품과 별미를 맛볼 수 있는 먹거리 노점도 함께 잇달아 늘어선다.

나가사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가 하마노마치(浜の町) 아케이드에 세워진 수많은 조형물 중 하나인 월하노인 상. 월화노인은 인연을 맺어주는 중국 신이다. 운명의 두 사람의 발목을 붉은 실로 묶어 이어지게 한다는 전설이 있어 커플들이 좋아하는 인기 조형물이다.
 나가사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가 하마노마치(浜の町) 아케이드에 세워진 수많은 조형물 중 하나인 월하노인 상. 월화노인은 인연을 맺어주는 중국 신이다. 운명의 두 사람의 발목을 붉은 실로 묶어 이어지게 한다는 전설이 있어 커플들이 좋아하는 인기 조형물이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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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가에서는 물론,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가 하마노마치(浜の町) 아케이드와 나가사키역 광장 등에는 높이 1~3m에 이르는 중국풍의 대형 조형물이 등장한다. 십이지, 용, 월하노인, 중국 전통 이야기 속의 인물들과 소림사 소년, 각종 물고기와 동물 등의 오브제와 함께, 올해 새롭게 등장한 오브제는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1위인 사카모토 료마와 그 아내 오료의 부부상이다. 해마다 한 편씩 일년 내내 매주 일요일 저녁 8시 NHK를 통해 방영되는 대하드라마의 올해의 주인공은 사카모토 료마이기 때문에, 나가사키의 어느 축제에도 올해는 료마가 빠지지 않을 듯 하다.

나가사키 랜턴 페스티벌은 그 기간과 규모, 프로그램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즐길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혹시나 나가사키에 오는 한국인들을 위하며 몇 가지 포인트를 소개한다. 먼저 나카시마(中島)강 공원에 가장 먼저 가야 한다. 메인 행사장은 미나토 공원과 중앙공원 등이지만, 그곳은 주로 공연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주말이나 휴일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평일에 가는 편이 좋다. 랜턴 페스티벌의 백미는 나카시마 강변에 늘어선 곱디고운 노랑 빛 등불의 황홀한 풍정이다. 강변을 따라 료마 부부상과 십이지 동물의 오브제, 그리고 수많은 재미있는 볼거리와 최대 8m에 이르는 대형 조형물이 서있다. 사진을 찍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공간이다.

랜턴 페스티벌의 메인 행사장인 미나토 공원에 설치된 등불과 대형 오브제들. 본래 소박하게 중화가를 중심으로 화교들끼리 지내던 설날 행사와 춘절제 제등 축제를 나가사키 시가 일본의 축제화하여 규모를 확대, 랜턴 페스티벌이 되었다. 1994년부터 현재 17회째를 맞이한다. 10월의 오쿤치와 함께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마쯔리(축제).
 랜턴 페스티벌의 메인 행사장인 미나토 공원에 설치된 등불과 대형 오브제들. 본래 소박하게 중화가를 중심으로 화교들끼리 지내던 설날 행사와 춘절제 제등 축제를 나가사키 시가 일본의 축제화하여 규모를 확대, 랜턴 페스티벌이 되었다. 1994년부터 현재 17회째를 맞이한다. 10월의 오쿤치와 함께 나가사키의 대표적인 마쯔리(축제).
ⓒ 나가사키 랜턴 페스티벌 실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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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옛날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에 온 중국인들이 귀국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중국인 주택지 터를 천천히 걸어서 여행하기를 권한다. 혁명의 시대, 중국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국민적 영웅이었던 쑨원이 쫓기는 몸으로 세계 각지를 돌던 중에 일본에서도 혁명동지를 모으고, 화교들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활동을 펼친 바 있다.

그 쑨원이 아홉 번이나 나가사키를 방문했다. 중국인 주택지 터에 있는 복건회관(福建会館)에 가면 쑨원 동상과 쑨원이 나가사키를 방문한 당시의 단체사진이나 신문기사 등 중요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근처의 사당이나 시내 도처의 중국 사찰에서는 수백 수천 개의 초에 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는 주홍빗 촛불 기도의 풍정도 펼쳐진다.

중국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설날에 맞춰 행해졌던 용춤. 나가사키의 용춤은 가을 축제인 '오쿤치'에서도 공연되는데, 나가사키의 양대 축제를 대표하는 춤이다.
 중국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설날에 맞춰 행해졌던 용춤. 나가사키의 용춤은 가을 축제인 '오쿤치'에서도 공연되는데, 나가사키의 양대 축제를 대표하는 춤이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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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에서는 중국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설날에 맞춰 행해졌던 용춤이나 중국 특유의 타악기만을 사용한 리듬에 맞춰 추는 약동감이 넘치는 사자춤이 압권이다. 용춤은 약 20m에 달하는 용체를 흔드는 것으로 비를 내리게 하거나 구름을 부르고 달을 삼켜버릴 듯한 모습을 표현하는 매우 흥겨운 곡예다. 축제기간 중 토요일에 진행되는 황제 퍼레이드도 볼 만하다. 청조시대 설날에 황제가 왕후와 함께 거리로 나와 민중과 함께 새해를 축하하는 모습을 재현한 퍼레이드로서 황제 부부가 탄 가마를 중심으로 150명이 호화로운 중국의상을 입고 가마 부대로 행진을 한다.

축제와 나들이에서는 먹거리와 지역 특산물이 빠질 수 없다. 나가사키의 명물은 복숭아 카스테라, 나가사키 짬뽕, 카쿠니 만쥬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두가 맛과 제조법은 철저히 일본화하고 나가사키 향토 상품화되었으나, 그 유래는 중국에 있다는 점이다. 카스테라는 물론 서양문물의 대표적인 영향이지만 거기에 중국에서 옛부터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진 복숭아를 끌어온 것이 복숭아 카스테라다. 카쿠니 만쥬는 돼지고기를 세 번 쪄서 양념해 찐빵 사이로 끼워넣은 나가사키 특산품이다.

청조시대 설날에 황제가 왕후와 함께 거리로 나와 민중과 함께 새해를 축하하는 모습을 재현한 황제 퍼레이드.
 청조시대 설날에 황제가 왕후와 함께 거리로 나와 민중과 함께 새해를 축하하는 모습을 재현한 황제 퍼레이드.
ⓒ 나가사키 랜턴 페스티벌 실행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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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짬뽕 역시 중국으로부터 유래했으나 철저히 일본화한 면 요리로서, 일본은 홋카이도, 하카타를 대표주자로 해 전국적으로 라면이 유명하지만 나가사키에서만큼은 짬뽕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라면집은 기를 펴지 못하는 편이다. 여기서 짬뽕은 한국의 그것과는 전혀 맛이 다르다. 국물이 없는 짬뽕도 있으며 이름만 같은 짬뽕이지 전혀 다른 요리이다. 그 종류도 수십 가지에 이른다. 풍부한 해산물 재료가 특징이다.

축제가 끝나는 음력 정월 보름날에는 중국인들의 풍습에 따라, 나가사키 시내 중국 사찰 숭복사에서도 선착순 500명에게 중국인이 정월 보름날 먹는 경단을 무료로 시식할 수 있게 한다.

축제 이외에도 나가사키는 현재 사카모토 료마를 주인공으로 한 각종 자료관과 전시회가 준비돼 있으며, 쇄국시대와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서양 학문과 문화, 종교, 첨단 기술과 인재, 거대한 뜻을 품은 수많은 선각자와 영웅들의 집합소였던 나가사키의 근대사를 견학할 수 있는 도보여행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마치 한국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나가사키에도 이미 수년 전부터 올레길(나가사키 사루쿠,長崎さるく)이 형성되어 있다. 국제도시 나가사키를 느낄 수 있는 글라바엔과 데지마, 오란다 자카 등도 가볼만한 도보 여행 코스다.

나가사키 구 중국인 거주 주택지내 복건회관 안에 건립된 중국 혁명의 지도자 쑨원의 동상. 2001년 중일우호의 의미로 상해시에서 기증. 쑨원은 혁명세력 결집과 화교들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여행에서 나가사키에 아홉 차례나 방문했다.
 나가사키 구 중국인 거주 주택지내 복건회관 안에 건립된 중국 혁명의 지도자 쑨원의 동상. 2001년 중일우호의 의미로 상해시에서 기증. 쑨원은 혁명세력 결집과 화교들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여행에서 나가사키에 아홉 차례나 방문했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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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는 배움의 여행을 원하는 나그네라면, 일본이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던 때 전시 방공호 터나 원자폭탄 피폭으로 인한 상흔을 간직한 모뉴먼트 등도 시내 곳곳에 산적해 있으니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원폭투하 폭심지 공원이나 평화공원, 원폭자료관은 물론이고 이전에 소개했던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데이트 코스로 평화자료관을 찾은 독특한 커플이 있었다. 

나가사키는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리고 있다.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렸다>는 유명한 엔카가 있을 정도로, 나가사키에는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 한국처럼 7~8월의 집중호우기간이나 6월의 장마기간이 따로 없이 일년 내내 장마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시내 곳곳의 축제 현장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특히 14일 오후 5시 30분의 제등 점등식이나 메인 행사장인 미나토 공원에는 어마어마한 수의 관광객이 운집했다.

마침 발렌타인 데이와도 겹치는 날이어서 데이트 나온 젊은 커플과,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 노부모를 모시고 나온 가족 단위의 관광객과 지역 주민들이 한데 얽혀 여기저기서 사진기의 플래시가 터지고 환성도 함께 터져 나왔다. 지금 여행을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걷기 좋은 운동화를 신고 가방에 우산 하나 챙겨 넣어 나가사키 랜턴 페스티벌과 올레길 여행에 나서 보는 것은 어떨까.  


태그:#나가사키, #랜턴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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