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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틴숲에서 최후를 맞이한 폴란드군 장교들의 죽음을 장엄한 톤으로 담아내고 있는 마샬공화국 우표.
 카틴숲에서 최후를 맞이한 폴란드군 장교들의 죽음을 장엄한 톤으로 담아내고 있는 마샬공화국 우표.
ⓒ 김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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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의 숨은 조력자(助力子)인 소련의 활약상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자.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에 이미 소련과 독ㆍ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면협약에 따라 폴란드의 부그강과 나레프강을 따라 이어진 경계선 동쪽은 소련이 차지하고 독일은 서쪽을 차지하는 것으로 상호간에 업무협조를 해 놓고 있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를 전격침공하자 소련군은 독일이 폴란드를 뜨겁게 요리하는 동안 자신들은 먹잇감이 식기만을 기다렸다가 먹기 좋을 만큼 식은 9월 17일 껍데기만 남아 있는 폴란드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폴란드 영내로 식은 죽 마시듯 진격해 들어 왔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부그강변에서 진격을 멈추고 독일과 사이좋게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였다.(하지만 이들의 밀애(密愛)는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침공으로 끝나게 된다.)

이 시기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 서쪽 지역에서는 유태인에 대한 인종청소가 시작되고 있었고, 소련군이 점령한 동쪽지역에서는 전시 소집된 폴란드군 예비역 장교들을 소련 KGB의 전신인 NKVD가 카틴(Katyn) 숲에서 잔인하게 집단사살 해버리는 카틴 숲 학살사건이 발생하는 등 폴란드는 두 점령자들에 의해 말 못할 고초를 겪어 나가게 된다. 

 1. 독ㆍ소 불가침 조약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2가지가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체코는 손쉽게 집어삼킨 독일이었지만 폴란드의 경우는 문제가 좀 복잡했던 것인데, 첫 번째 산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즐거운 만찬을 이번에도 가만히 구경만 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두 번째 산은 폴란드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거대한 붉은 곰 소련이었다.

 특히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더라도 소련과 국경을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히틀러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고민끝에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바로 독ㆍ소 불가침 조약의 체결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모스크바에서 독일외상 리벤트로프와 소련 인민위원회 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가 조인한 독ㆍ소 불가침조약은 겉으로는 상호불침략, 일방국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경우 다른 일방국은 그 제3국을 원조하지 않으며, 상호간에 정보교환 및 협의를 위하여 접촉하고, 쌍방 모두 일방을 직ㆍ간접의 적으로 삼는 국가집단에는 참가하지 않으며, 상호간의 분쟁은 평화적으로 처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뒤로는 폴란드의 분할 점령과 동유럽에서 독소세력권을 획정한 비밀의정서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사이좋게 나눠먹게 되었지만, 애시당초 근본이 맞지 않던 두 집단(나치당과 공산당)은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서로 결별하고 기나긴 전쟁을 벌여 나가게 된다.  

2. 카틴(Katyn) 숲 학살

 전반부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빈사상태에 빠진 폴란드 동쪽 지역을 식은 죽 먹듯 삼켜버린 소련군은 포로로 붙잡은 폴란드군 장교들을 카틴(Katyn) 숲으로 끌고가 잔인하게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카틴 숲 학살을 자행하게 된다.

이 카틴 숲 학살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자행된 3대 학살사건(일본의 난징대학살 : 20여만명, 독일의 홀로코스트 : 700여만명)중 하나로, 학살당한 폴란드군 장교들의 숫자는 관련 자료마다 적게는 수천명에서 많게는 2만명까지 다양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들이 전시소집된 예비역장교들로서 폴란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실질적인 엘리트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카틴 숲 학살은 냉전시대 악명을 떨친 KGB의 전신인 NKVD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소련의 영구적인 폴란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장차 반소(反蘇)운동과 폴란드 민족운동을 벌여나갈 가능성이 농후한 이들 폴란드군 장교들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같은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이 카틴 숲 학살을 자신들의 소행이 아닌 독일의 소행으로 날조하고 덮어씌웠다가 1990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야 비로서 자신들의 만행을 시인하고 폴란드에 공식적인 사과를 하게 된다. 현재 카틴 숲에는 학살당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어, 약소국 폴란드의 설움과 아픔을 후세들에게 대변해 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월간공군



태그:#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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