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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자 김두식 교수는 그동안 <칼을 쳐서 보습을>(뉴스앤조이), <헌법의 풍경>(교양인), <평화의 얼굴>(교양인), <불멸의 신성 가족>(창비) 등 주로 법, 국가를 이야기하는 책을 내 왔다. <헌법의 풍경>은 3만 권이 넘게 팔릴 만큼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계속 전공을 살려서 글을 써 나가면 더 사랑 받는 저자가 될 텐데, 굳이 교회라고 하는 좁은 동네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인자는 원래 타향에서 존경받더라도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법인데' 말이다.

그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책이었단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 현실이 그런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도록 몰아간 셈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슬픔, 절망,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내되, 그것을 넘어서서 희망을 만들어 보자고 조심스레 제안해 보기로 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김두식 저 / 홍성사 펴냄.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김두식 저 / 홍성사 펴냄.
ⓒ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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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교수가 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홍성사)라는 제목을 읽었을 때 처음 느낌은 이랬다.

"교회 속에 침투해 있는 세속적인 요소들을 솎아내고, 세상 속에서 착한 일을 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제목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앞부분은 그대로인데, 뒷부분은 "교회야, 잘났다고 세상 속에서 깝죽이지 말고 너나 잘해라" 이런 느낌이 든다. 글쓴이의 원래 의도, 출판사의 당초 뜻이 무엇인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교회가 바뀌어야 산다'는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 요즘 더 쏟아져 나온다. 이 책을 출판한 홍성사도 몇 년 전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라는 제목으로 교회 개혁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판한 적이 있다.

기독교 출판사뿐 아니라 일반 출판사에서도 이런 유의 책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교회 개혁 이야기가 흥행이 되는 것일까.

저자 김두식은 그런 흐름에 뛰어들 만큼 출판계에 안테나가 민감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안 보이는 사람, 약한 사람의 처지에 안테나를 세우고 사는 사람이다. 법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변호사, 한마디로 한국 사회에서 잘나가는 존재이지만, 그의 시선은 늘 낮은 곳에 머물고 그의 권위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쓰인다.

<평화의 얼굴>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약한 사람들, 너무 약해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고 신앙과 몸이 가리가리 찢긴 사람들을 열심히 편들어 준다. '이단들' 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순수하게 믿음을 지키려다가 이단으로 몰려 처참한 꼴을 당한 사람들이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에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세속적 모습을 드러낸다. 중간에는 교회와 세속의 권력이 결탁해서, 교회됨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작은 실험들을 처참하게 짓밟는 중세 유럽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뒷부분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을 받아주는 공동체, 약한 이들을 돌봐주는 공동체를 소망하는 저자의 마음을 드러낸다.

설교 베끼기에서 엉터리 성경 해석까지

그가 목격한 오늘 교회의 현실을 보자. 교회에 대형 환풍기 한 대 사 주고 장로가 된 '환풍기 장로', 목사가 혼자 이야기하고 교인들은 그저 듣기만 하다가 끝나는 '영화관식 구조', 남의 설교 베끼기에서 엉터리 성경 해석까지.

나와 좀 다르다고 함부로 이단이라 정죄하고, 재산 싸움할 때는 너무 쉽게 법정에 가면서 세습 문제 비판하면 '교회 문제는 교회 안에서 은혜롭게' 해결하자고 강변하는 이중성. 나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을 뒤섞어 버리고, 세상의 성공만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호도하며, 이도 저도 하다 안 되니까 '소명' 받았다면서 신학교 들어가서 목사로 나오는 행태. 교회 안에 너무 깊숙이 침투해 버린 세상의 모습들이다.

명나라 정벌이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조선에게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며 조선에 상륙한 일본 침략군 제1군은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뿐 아니라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이들은 포르투갈 신부 세스페데스와 함께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 낮에는 전쟁터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을 학살하고 밤에는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라크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자연스레 겹친다.

중세 기독교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보수 목사들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승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기독교 영웅처럼 떠받들며 용비어천가를 불러 댄다. 글쓴이는 기독교의 전통이 탐욕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상향성의 모습으로 변하게 된 뿌리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보고 있다.

그가 보기에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힘으로 하나님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때부터 십자가를 군기와 방패의 문양으로 사용한 것도 이런 맥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예수 없는 십자가, 희생과 섬김의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와 성공의 십자가는 이때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이후로 16세기 유럽의 교회는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이해관계를 극대화했다. 희생 제물이 필요했다. 수많은 반란자들, 엄청난 이단들이 배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끝은 죽음이었다. 발도파, 카타르파, 롤라드파, 후스파 등 무수한 이단들은 왜 이단일 수밖에 없었을까. 그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은 시각으로 보자면 오늘날의 개신교 역시 이단일 수밖에 없다. 그런 처지의 개신교가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하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는 교회를 참 사랑한다. 그래서 교회 현실을 보면서 슬픔과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슬픔과 절망의 바다에 빠지지 말고, 작지만 쉽지 않은 실험들을 하면서 새로운 소망을 품어 보자고 격려한다. 김 교수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교회, 보험회사에 빼앗긴 역할을 되찾는 교회,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교회, 다시 말해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 보잖다. 그런 마음을 이 책에서 나누려고 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쓰리면서도 서서히 따뜻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풍부한 독서량에 걸맞게 인용한 자료도 상당하다. 방대한 자료들을 논리적 일관성을 갖고 잘 꿰어서 쓴 글이니 동의 안 되는 부분이 거의 없다. 굳이 딱 한 군데 꼬집자면, 교회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마흔 조금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곱 군데나 돌아다녔다는 점? 농담이다.

난무하는 '기독교+거시기 단체'

"이 책은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제가 그동안 교회 때문에 느낀 슬픔,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혹시라도 이미 절망하여 교회를 떠난 분들께 이 책이 재도전의 용기를 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글쓴이의 머리말에서)
 "이 책은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제가 그동안 교회 때문에 느낀 슬픔, 절망, 그리고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혹시라도 이미 절망하여 교회를 떠난 분들께 이 책이 재도전의 용기를 줄 수만 있으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요." (글쓴이의 머리말에서)
ⓒ 김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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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유사 기독교 단체'의 급증 현상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기독교+거시기'(性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에서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하향성과 거시기가 지향하는 상향성이 본질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 기독교 정당, 기독교 로펌, 기독교 언론, 기독교…. 기독교+거시기들의 겉과 속이 달라도 너무 달라서 기독교 안팎으로 욕을 먹은 경우가 무척 많다.

개중에는 두 성향이 대립하지 않고 일치해서 가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너나 잘해" 한다. 이 글 처음에 '세상 속의 교회'라는 의미가 부정적으로 읽힌다고 쓴 것은 이 때문이다.

글쓴이의 염려에 다리 한쪽 슬쩍 들이민다면, 최근 들어 급증하는 '교회+거시기'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교회가 학교, 사회복지기관, 심지어 작은 은행, 생활협동조합까지 운영하려 한다. 교회 덩치가 조금만 커지면 금세 이런 곳으로 눈을 돌린다. 기독교의 문어발보다 교회의 문어발이 더 심각해 보인다.

대안이 무엇인가. 글쓴이는 '기독교+거시기'에 쏟을 힘으로 교회다운 교회 하나 제대로 만들어 보자고 한다. '다름과 약함과 아픔'을 품어주는, 그런 교회. 맞다.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시기에 소홀할 수는 없는 노릇.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노력과 거시기다운 거시기를 만드는 노력을 동시에 할 수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나름 꼬집긴 꼬집었는데 손끝에 힘이 별로 안 간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법학자 김두식이 바라본 교회 속 세상 풍경

김두식 지음, 홍성사(2010)


태그:#기독교, #김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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