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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사동, 마을 뒷산이 사슴이 누워 있는 것과 같다 하여 와녹사(臥鹿沙) 마을이라고도 한다. 도동에서 울릉터널을 지나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에 '와녹사마을 사동1리' 표지석이 나온다. 표지석의 서너 배가 넘는 자연암반이 받침돌을  대신하고 있다.

울릉도 해안도로가 시작되는 곳 사동, 평화로운 어촌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표지석을 이고 있는 자연암반에 눈길을 두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100여년 전에 있었던 울릉도수 배상삼의 억울한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고 있을까?

배상삼은 살인범들에 의해 100여 년 동안 '포악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일본군과 작당하여 울릉도를 망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울릉도에는 배상삼의 억울하게 죽었다는 얘기가 전설 같이 전해져 왔고, 2007년판 <울릉군지>에 사건의 전말이 실리게 되었다.

하지만 배상삼의 억울한 죽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은 노인 몇 분의 기억에 남아 전해올 뿐이다. 배상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 흔적을 찾아가 보자.

기단석에 배상삼의 죽음을 밝히는 비밀이 새겨져 있다.
▲ 와녹사마을(사동1리) 표지석 기단석에 배상삼의 죽음을 밝히는 비밀이 새겨져 있다.
ⓒ 김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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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때부터 울릉도는 금단의 섬이었고, 1883년에 고종황제의 명으로 재개척되면서 합법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의 벌목이 횡행하고, 기근으로 개척민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정부의 지원으로 개척민이 집단으로 이주했으나,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가 상주하지 못했다. 이때 평해군수 겸 울릉도 첨사 조종성은 개척민 가운데 배상삼을 울릉도수로 임명하여 관리케 하였다. 도수 배상삼은 일본인의 벌목을 금지하고, 부자들의 식량을 풀어 기근을 해결했다. 개척민은 배상삼을 믿고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벌목을 금지당한 일본인과 식량을 빼앗긴 부자들은 배상삼을 원수로 여겼다. 배상삼을 시기하던 개척민 가운데 3명이 배상삼을 살해키로 하였다. 그러나 거구에 장사인 배상삼을 완력으로 제압하기는 어려워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 동지를 규합할 것
2. 배도수의 비행을 조작하여 개척민과 배도수를 이간질 시킬 것
3. 거사당일 거목이나 쥐똥나무 방망이 1개씩을 휴대하게 할 것
4. 만약에 대비하여 고춧가루를 준비할 것
5. 목침 1개씩을 소지할 것

주모자는 홍재유를 포함하여 8명으로 늘었고 태하동의 성황당 제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성황제를 마치고 관사에는 배상삼이 참석하는 보고회가 열렸다. 보고가 진행되던 중 배상삼의 눈에 고춧가루가 뿌려졌고 이어 목침과 몽둥이가 날아들었다. 힘이라면 뒤지지 않는 배상삼도 안 보이는 눈으로 어쩔수 없었고, 죽음을 맞이했다.

배상삼이 죽자 8명의 살인자는 왜인에 기대어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종말은 매우 비참했다. <울릉군지>는 사건 이후 8명에 대한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배도수 암살 후에는 왜인들의 도벌과 행패가 극심하여 개척민들은 온갖 고초를 당하였으며, 8인은 의기가 양양해져 왜인들에게 아부하면서, 밀상(密商)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나 8인은 그 후 목매어 자살하거나 익사하거나 산에서 추락사 하는 등 대부분이 비명횡사 하였고, 그 가운데 1명만 와석종신(臥席終身)하였으나, 그 사람도 90여 세까지 살면서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면 상에 정화수를  떠 놓고 소나기를 맞으며 절을 하는 것이 여러 번 목격되었다고 한다."

수명을 다해 편안히 죽었다는 '와석종신'의 주인공은 홍재유이다. 홍재유는 동료들의 비참한 죽음을 겪으며 두려움에 살게 되었다. 어느날 홍재유는 일본 오이타현의 아오노도몽(青の洞門) 전설에 나오는 스님 젠카이(禅海)와 같이 참회를 하며 마을앞에 있는 바위를 정으로 깨기 시작했다. 홍재유의 이야기와 함께 울릉도에 구전되고 있는 아오노도몽 전설은 일본 오이타현에 전해오고 있다.

아오노도몽은 주인을 살해한 머슴 이치구로(市九郞)에 대한 전설이다. 이치구로는 깨달은 바가 있어 스님이 되었고 이름을 젠카이로 바꾸고 평생을 참회하며 살아가기로 하였다. 어느날 오이타현의 협곡 야바케(耶馬渓)에 이르렀는데 협곡에 설치된 잔도는 마을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잔도가 위험해 많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젠카이는 협곡에 마을을 잇는 동굴을 뚫기로 하고 정과 끌로 바위를 깨기 시작했다. 20여년이 지나 동굴은 완성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젠카이의 뜻을 기리기 시작했다.

배상삼을 죽인 홍재유가 참회하며 정으로 깼다는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석축 위로 홍재유가 살던 마을이 있었으나, 마을은 없어지고 관광숙박시설이 들어서 있다.
▲ 와녹사마을(사동1리) 표지석의 받침돌 배상삼을 죽인 홍재유가 참회하며 정으로 깼다는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다. 석축 위로 홍재유가 살던 마을이 있었으나, 마을은 없어지고 관광숙박시설이 들어서 있다.
ⓒ 김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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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녹사마을 표지석을 이고 있는 자연암반이 아오노도몽과 같은 곳이 될 수 없다. 100여년 동안 덧씌워 졌던 배상삼의 억울함을 밝히는 장소일 뿐이다.

이제 작은 표지석이라도 세워 배상삼의 넋을 위로하였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배상삼의 억울한 죽음을 울릉군지에 실은 손태수 편집위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태그:#배상삼, #배성삼, #울릉도, #울릉도재개척, #홍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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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수호대 대표, 문화유산 해설 기획과 문화유산 보존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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