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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정다운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철이 들고 나이가 늘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왠지 모를 포근함과 안온함, 또 어떤 동경(憧憬) 같은 것을 작용시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누구에게나 고향이 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도 있고, 고향에 붙박힌 채로 사는 사람도 있다. 또 시골이 고향인 사람도 있고 도시가 고향인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시골과 연결짓는다는 점이다. '고향'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정서를 유도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울이 고향인 어떤 친구는 자신에게도 고향은 있지만, '고향 정서'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친구에게도 특유의 고향 정서, 다시 말에 시골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향수 같은 게 있어서 역으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또 어떤 친구는 자신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시골 어딘가에 고향을 두고 있는 듯한 일종의 '향수 본능'을 느낀다고 말한다. 비록 시골에 고향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조상들의 고향에서 연유하는 것일지도 모를 마음이 곧 '농경민족'의 정서이며, 또한 그것이 '전원회귀'에 대한 꿈을 갖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알게 모르게 농경민족의 정서가 작용해서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도 고향(시골)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정다움을 지니게 되고, 자연 속에서 흙과 더불어 살고 싶은 소망도 갖게 되는 것 같다.

 

 누구에게나 내재된 '흙의 심성'

 

 

 사람들의 내면에는 본래 '흙의 심성'이라는 것이 있다. 순박함과 양심을 지니고, 도덕과 윤리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진실과 정직을 추구하며 순리를 따라 살려는 마음을 한가지로 묶어 '흙의 심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흙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색깔과 풍경과 소리와 냄새들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다. 또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흙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전원회귀의 마음이 있다. 이 마음속에는 흙의 심성을 회복하거나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 지순한 가치지향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해마다 적어도 한 번씩은 흙과 또 내 생명의 원천에 대해 짧게나마 명상의 기회를 얻곤 한다. 예수 그리스도님의 수난을 기념하는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 모든 천주교 신자들은 이마에 재를 받는 의식을 거행하면서 사제에게서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참조)는 말씀을 듣는다.

 

 그 말씀은 '고향에서 왔으니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는 뜻이기도 할 터이다.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내가 '피조물'임을 깨닫고, 조물주가 마련하고 배려하신 은총의 섭리 안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흙은 내 고향이다. 흙은 자연 자체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이들 중에도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는 철리(哲理)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를 떠나서 그 철리를 가슴 깊이 수용하고 흙의 심성을 유지하며 살려는 이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지닌다. '개발'과 '경제'라는 현실 가치로만 자연을 대하지 않는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명언이 단순히 '자연에서 산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몸이야 어디에 있든지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지니고 '흙의 심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며 살라는 뜻일 터이다. 전원회귀의 마음, 흙의 심성은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고귀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흙빛',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

 

 

 한때 고향을 떠나 산 시절이 있었다. 군대생활 3년이야 누구나 다 겪는 통과의례였지만, 군 제대 후 고향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몇 년 동안 객지 생활을 했다. 서울의 건설공사장, 경남 마산의 화력발전소, 경기도 남양만의 간척공사장 등을 전전하다가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인 1980년 가을에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982년 등단 이후에는 줄곧 고향(충남 태안)에 붙박힌 채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고향을 지키는 작가'라는 별칭도 얻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직후부터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라고 했던 정지용의 시 '고향'의 첫 구절이 내 뇌리에 맴돌기 시작했다. 나는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상한 모순에 빠져들었고, 위기의식을 겪는 기분이었다. 종횡무진 횡행하는 '개발 귀신'의 날갯짓에 고향 바다 '천수만'을 통째로 잃어버린 아픔도 있었지만,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에 그런 현상을 겪는 것만은 아니었다.

 

 더욱 절절히 체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흙의 심성', 그것의 매몰과 상실이었다. 1981년 고향에서 '흙빛문학회'를 창립했고, 1983년 초 동인지 '흙빛문학'을 창간했다. '흙빛'이라는 명칭은 내가 제안했다. 그리고 1985년 '흙빛문학' 제3부터 표지 날개에 '흙빛'의 뜻을 정의하는 말을 올리기 시작했다.

 

 흙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모체이자 생명이다.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 흙은 그리고 진실과 정직의 표상이다. 흙은 거짓을 모른다. 인간이 사랑하며 땀을 들이는 만큼 값하여 준다. 그러면 '흙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자연의 빛이며 우리 고향의 빛이다. 모든 생명을 감싸주는 모성의 빛이며 인간 본성의 빛이다. 더불어 그것은 정서의 빛이며 사랑과 평화의 빛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읽어가고 있다. 물질문명과 콘크리트 문화에 밀리고 압도되어 흙과 멀어지고 있다. 흙의 심성과 정신에 상통하는 그것들, 진정한 삶의 가치들이 지층 깊은 심연 속으로 매몰되고, 쇠멸의 길을 가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이 때로는 분노의 빛이 되기도 하고, 신음과 절규의 빛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 흙을 되찾아야 하고, 흙빛을 되살려야 하고, 흙빛의 심성과 정신 속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야 한다. 흙빛의 의미와 이미지를 일깨워 기리며, 참되게 사랑하여야 한다. 그것이 분노의 빛, 신음과 절규의 빛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랜 세월 고향에 몸을 놓고 살면서 스스로 흙빛이 되고 흙빛을 체현하고자 했다. 비록 문단의 변방에서 문학 활동을 할망정 문학과 내 삶을 일체화하려 했고, 더 나아가 하느님 신앙과 내 삶을 일체화하려 했다. 다시 말해 내 생명의 원천이며 본향인 흙(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지니고, 흙의 심성을 구체화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흙의 심성이 언제나 내 문학의 주제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하느님 신앙의 가장 구체적 표현이기도 했다.

 

 '고향'이라는 말이 가진 '모성'의 질감

 

 

 고향이라는 말은 일단 '흙'의 이미지를 함유한다. 고향이라는 말에서 흙 냄새를 느끼는 사람은 그 의미를 깊고 너르게 파악하는 사람이다. 흙의 심성을 갈망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고향은 모성(母性)과도 관련 있다. 사람들은 고향이라는 말에서 알게 모르게 어머니의 체취를 느낀다. 어느 면에서 고향과 어머니는 동질일 수도 있다. 그것에 유난히 민감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개 고향이라는 말 앞에서는 유순해진다. 어쩌면 그런 심성의 작용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고향을 그리워하여 명절에는 기를 쓰고 고향을 찾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고향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다. 나같이 고향에서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고향(농촌)에서 사라진 것들을 많이 알고 있는 만큼 그것들에 대한 기억을 소중히 여긴다. 갖가지 풍습과 풍정 등 사라진 것들은 많을지라도, 명절에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이루는 민족 대이동의 장관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고향이라는 단어에서 모성의 질감을 얻고 생명의 본향, 영원한 고향을 생각하며 '흙의 심성'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의 지순한 가치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물질문명이 범람하고 '콘크리트 문화'가 우리의 삶을 압도하고 있는 시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자연을 마구 유린하려는 천박한 개발 논리와 경제 제일주의가 판을 친다. 7·80년대 개발독재 시대의 시각과 가치관이 난무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흙의 심성을 잃어가고 '고향 상실'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사라지지 않는 한, 흙의 심성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노력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인간 생명의 본향을 갈망하는 정신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고향은 '생명'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계 월간지 <성서와함께> 2월호 '새로 봄 / 고향, 새 희망의 원천' 특집 난에 게재된 글입니다.  


태그:#고향, #흙, 생명, #개발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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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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