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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스카이 블루', 그 곳을 찾아갈 때는 길치라도 안심하시라.
 안면도 '스카이 블루', 그 곳을 찾아갈 때는 길치라도 안심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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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방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떠난 여행
 바다가 보이는 방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며 떠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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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이 블루'를 찾아갈 때는 길치라도 안심하시라. 포구에서 바다로 직진하라는 4차원 내비게이션도 골칫거리는 아니다. 그 곳의 주인님은 집에서 나설 때, 안면도에 들어섰을 때, 전화를 해 준다. 고남 방향으로 쭉 달리면서 꽃지와 샛별 해수욕장을 지나고, 장곡이라는 두 번째 팻말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라고. 점쟁이 팬티를 입었을까? 운전하던 남편은 주인님이 예언한대로 말했다.

"바다라면서? 이 길 맞어? 산으로 가는데?" 

이 여행은 단 한 가지, 그저 바다가 보이는 방이면 충분하다. 겨울 바다를 거닐고 싶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은 품지도 않았다. 8개월 된 꽃얄리군은 내 '덕후'(오타쿠)가 된 지 오래, 나는 10kg이 넘는 아기를 안고서 샤워를 하고, 머리도 감을 수 있으며, 블라우스 단추를 채울 수도 있는 초능력자로 진화하고 있다.

짐을 풀고 방 안에서 바다를 보았다. 나는 각오를 지키기 어려운 얕은 인간, 바다 가까이로 가고 싶었다. 꽃얄리군도 부추겼다. 혼자 서고 한 발자국씩 떼기도 하는 아기는 잠자코 한 곳에 있지 못한다. 쉴 새 없이 옮겨 다녀야 할 꽃얄리군이, 이유식을 받아먹으며 창에 붙어 서서, 끊임없이 옹알거렸다. 밥알까지 튀기면서 정열적으로 바다에게 말 걸었다.

바람은 매웠지만 본능적으로 저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바다.
 바람은 매웠지만 본능적으로 저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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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은 매웠지만 식구 넷이서 희희낙락했다. 완소제굴은 겨울 방학 숙제 한다며 조개도 줍고, 해변도 달렸다. 내가 본능적으로 저 끝까지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기를 안은 남편이 "꽃얄리군 콧물 흘리는데?" 했다. 나는 밥벌이 할 때 말고는 화장실 갈 시간조차 빠듯한데 아기가 감기 걸려서 앓으면 코딱지만한 자유도 귀해지겠지.

방에서라도 해 지는 모습을 봐야 했는데 놓쳐 버렸다. 안에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채널이 아주 많이 나오는 텔레비전, 청춘의 어느 한 때처럼 바다에서 젖어온 양말을 드라이기로 말리는 추억 놀이, 다락 같은 2층에 어떻게 침대를 올렸을까 하는 탐구 생활, 동화에 나올 듯한 창문을 통해 내다보는 어두운 바다. 

우리가 묵는 방 '지브라'는 얼룩말 무늬 컨셉과 복층 구조.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켜면, 그 때부터 진짜 매력을 볼 수 있다. 방안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그 나무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예사롭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지리산에서 쏟아지는 별을 볼 때도 이런 뭉클함이 있었다. 텔레비전을 끄고, 넷이서 나무 주위에 모여 얼쩡거리며 놀았다.

스카이 블루의 방 '지브라'는 얼룩말 무늬가 컨셉이다. 아이들이 좋아한다.
 스카이 블루의 방 '지브라'는 얼룩말 무늬가 컨셉이다. 아이들이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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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있는 키 큰 나무 한 그루.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켜면, 그 때부터 진짜 이 방의 매력을 볼 수 있다.
 방 안에 있는 키 큰 나무 한 그루. 형광등을 끄고 스탠드를 켜면, 그 때부터 진짜 이 방의 매력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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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진짜 그림자는 마음을 움직였다. 정약용 산문집에 국화 그림자 이야기가 나온다. 국화꽃이 핀 담장을 쓸고, 초를 켜서 꽃 그림자를 감상하는 게 수묵화를 보는 듯하다고. 아, 그 서정적인 감동을 조금 알겠다. 세상에 온 지 1년이 안 된 꽃얄리군도 마음이 동했나. 자꾸 나무로 다가서라고 손짓 하면서 헤실헤실 웃었다.

"엄마, 꽃얄리군 좀 봐. 완전히 동네 바보 형 같아."

어릴 때는 동네 바보 형이나 누나도 시설에 격리되지 않고 함께 놀았다. 뒷산에다 본부를 만들고, 큰 나무 밑동에는 보물이라며 배추나 무를 서리해서 숨겨놓았다. 우리 아이는 특별한 장난감 없이 해가 질 때까지 놀고, 또 놀고, 그렇게 놀면서 자라는 세계를 모른다. 잘 생긴 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타잔놀이도 했다.

"여보, 어릴 때 타잔 놀이 해 봤지?"
"내가 타잔이었어."

남편이, 그 옛날 동네 바보 형으로 밝혀지는 순간에 아이와 나는 뻥 터졌다. 마주보면서 웃었다. 뒹굴면서 웃었다. 그러나 우리 사이는, 셋이서만 살다가 식구가 한 명 늘어난 순간부터 위태위태해졌다. 좋다가도 툭, 하면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 삐친 마음을 서로 모른 척 할 때도 많았다. 역시나 완소제굴은 아기를 안고 있는 내게 한 방 먹였다.

"엄마, 꽃얄리군 왜 데려왔어?" 고모(아기 돌봐주시는 분)한테 맡기고 오면 되지."

열 살 터울로 동생을 본 아이는 아직도 저항 중이다. 존재감 100%의 사춘기 소년, 한 밤 자러 오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이불에 드라이버(어떤 쓰임새를 예상하고 챙긴 걸까?)까지 가져오는 까칠남. 내가 뭐라고 태클을 걸기도 전에 인상부터 써서 기선을 제압하고서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초강경 자세.

내가 뭐라고 태글을 걸기도 전에 인상을 쓰고 기섭을 제압하는 완소제굴군, 그는 언제 동생의 존재를 인식할까나.
 내가 뭐라고 태글을 걸기도 전에 인상을 쓰고 기섭을 제압하는 완소제굴군, 그는 언제 동생의 존재를 인식할까나.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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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한밤중에 아이와 둘이서 바다로 갔다. 무슨 말을 주고받을지, "엄마는 꽃얄리군만 예뻐해"라고 뒷담화를 할까. 그러나 전화기로 들려오는 남편과 아이 목소리는 드높았다. 폭죽놀이를 할 건데 나오지 말고 구경만 하라고. 이윽고 소박하게 솟아오르는 폭죽, 완소제굴은 언제쯤, 저 자리에 끼지 못한 동생의 존재를 인식할까나.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으려는데 형광등을 켜는 게 아까웠다. 간밤에 본 어룽어룽한 나무그림자는 완소제굴이 자는 2층의 침대까지 뻗어 있었다. 아이는 집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자기도 꽃얄리군처럼 사랑해 달라며 눈물을 쏟고, 아기를 안고 있어도 내 품으로 파고드는 처절함이 빠진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하늘빛을 닮아 바다는 칙칙하고, 하얗게 덮여가는 해변은 원시의 느낌이 났다.
 하늘빛을 닮아 바다는 칙칙하고, 하얗게 덮여가는 해변은 원시의 느낌이 났다.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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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맞게 눈까지 내렸다.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하늘빛을 닮아 바다는 칙칙하고, 하얗게 덮여가는 해변은 원시의 느낌이 났다. 통유리 문을 열어 발코니에 쌓인 눈을 들여다봤다. 맨 눈으로도 눈 결정체가 보여서 꽃얄리군과 완소제굴 손바닥에 올려줬다. 눈은 아이들의 따스한 체온에 스르르 녹았다.  

나는 창문까지 열어놓고, "좋다! 좋다!" 감탄했다. 밥 하던 남편은 "나갔다 와. 대신 전화기 갖고 가. 애기 울면 전화할 테니까 바로 와"라고 했다. 젖을 먹는 데다가 엄마 '덕후' 놀이에 흠뻑 빠져 있는 아기가 보일 반응은 너무나도 뻔했다. 그래도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남편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내달렸다.

방 안에서 보는 바다는 고요했다. 전날 남긴 사람들의 흔적은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내 눈앞의 바다는 '달겨드는' 파도를 껴안으려 짐승처럼 포효했다. 그래, 아이와 싸울 때에 촛불처럼 타 들어가면 안 된다. 파도처럼 들고 나야 한다. 날마다 말끔한 얼굴이어야 한다. 느닷없이 뛰어들어도 어색하지 않은 바다처럼, 와락 안길 수 있는 '육체파' 엄마여야 한다.

그러나 안다, 안다. 어떤 여행을 해도 나는 자라지 못했다. 아무리 큰 깨달음을 얻어서 일상으로 돌아와도, 아이들 손바닥에 올려놓은 눈처럼, 처음의 의연함은 짐작할 수 없게 사라진다. 그래도 기억하려 애써야지. 바다도, 악을 쓰고 발버둥을 치며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아이랑 한 판 붙고 난 뒤에 우거지상을 펴지 않으면, '찌질이'가 된다는 것을.

아이가 와락 안길 수 있는 '육체파' 엄마여야 한다. 아이랑 한 판 붙고 난 뒤에 우거지상을 펴지 않으면, '찌질이'가 된다.
 아이가 와락 안길 수 있는 '육체파' 엄마여야 한다. 아이랑 한 판 붙고 난 뒤에 우거지상을 펴지 않으면, '찌질이'가 된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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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월 22일에서 23일까지 다녀왔습니다.



태그:#안면도, #겨울 바다, #스카이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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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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