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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 자전거 여행]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제주도 여행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오전 9시에 겨우 눈을 떴다. 내처 자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그래도 뭔가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장딴지와 오른쪽 어깨가 유난히 욱신거렸다. 장딴지가 아픈 것은 평소 잘 쓰지 않던 근육이라서 그런 것이고, 오른쪽 어깨가 아픈 것은 배낭의 짐이 한쪽으로 쏠린 까닭일 것이다. 이날 최저 기온이 영상 1도, 최고 기온이 영상 3도. 음, 서울 날씨에 비하면 꽤 온화한 편이다. 하지만 제주도 날씨로는 꽤 추운 편이란다. 문제는 바람이다.

 바람에 쓰러진 도로 표지판. 자전거나 자동차가 달릴 때 쓰러진 게 아니라 다행이다.
바람에 쓰러진 도로 표지판. 자전거나 자동차가 달릴 때 쓰러진 게 아니라 다행이다. ⓒ 성낙선

대충 씻고 짐정리해서 숙소를 빠져나온 시간이 9시 40분경. 현관을 나서는데 바람이 제법 거세다. 하지만 몸이 휘둘릴 만큼은 아니니, 어떻게든 견뎌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제주시내 탑동 근처의 자전거대여점을 찾아갔다. 이때만 해도 이번 여행에 자전거를 가져오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자전거여행이 가능할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자칫 자전거는 짐이 될 뿐이다. 게다가 자전거를 포장하는 비용을 감안하면 차라리 제주도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는 게 더 경제적일 수도 있다는 계산을 했다. 자전거를 비행기에 실으려면 반드시 포장을 해야 한다. 포장비로 김포공항에서는 2만 3천원, 제주공항에서는 1만 5천원을 받는다.

 하루 동안 여행을 함께한 자전거. 펑크만 나지 않았어도, 꽤 훌륭한 동반자가 됐을 것을...
하루 동안 여행을 함께한 자전거. 펑크만 나지 않았어도, 꽤 훌륭한 동반자가 됐을 것을... ⓒ 성낙선
대여점의 자전거는 A, B, C 세 등급으로 나뉜다. 업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내가 방문한 대여점의 자전거는 A가 중저가 산악자전거로 하루 대여료가 1만5천원, B가 유사 산악자전거로 하루 대여료가 1만원이다. C는 5천원이다. 나는 이틀 동안 제주도 일주도로(1132번 도로, 180km)를 한 바퀴 돌 생각으로 대여료 3만원을 지불하고 A급 자전거를 빌렸다. 그 외에 헬멧, 우비, 짐가방 등도 함께 빌렸는데 그런 건 다 공짜다. 추가 금액을 지불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빌리면서 내가 가진 짐 중에 꼭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모두 대여점에 맡겼다. 그리고 나머지 짐들을 싹 정리해서 자전거에 옮겨 싣고 나니 몸도 마음도 가볍다. 이틀이 아니라, 단 하루 만에 일주도로를 휙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이틀 동안에 일주도로를 돌고 올 것이라고 했더니, 대여점 직원이 말렸다.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최소한 3일은 잡아야 다 돌 수 있단다. 뭐, 그냥 내처 달리기만 할 거라고 하는데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러다 안 되겠다 싶으면 중간에 다른 교통수단을 잡아타고 올 거라고 했더니 비로소 안심을 하는 표정이다.

 일주도로 풍경. 따로 자전거도로가 나 있지 않은 곳도 있다. 주의해서 자전거를 타야 한다.
일주도로 풍경. 따로 자전거도로가 나 있지 않은 곳도 있다. 주의해서 자전거를 타야 한다. ⓒ 성낙선

마지막으로 바퀴에 바람이 충분한지를 점검하고 나서 출발했다. 오전 10시 30분경. 방향은 시계 방향으로 잡았다. 보통 제주도 자전거여행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그 방향으로 가야 바다를 가깝게 접할 수 있고, 주변 경치도 훨씬 더 아름답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람이 시계 방향으로 부는 까닭에 어쩔 수 없었다. 대여점 직원도 '오전 8시에 앞서 떠난 다른 자전거여행자들 역시 바람 때문에 방향을 바꿨다'며 시계 방향으로 돌 것을 권했다. 결과적으로 시계가 도는 방향으로 진로를 잡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제주시를 벗어나 조천을 향해 갈 때쯤, 뒷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저속으로 달릴 때는 몰랐는데, 바람을 등에 지고 속도를 높여 달리는 중에 뒷바퀴가 잘 제동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레이크 레버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는 데도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다. 난감했다. 그렇다고 갈 길이 멀고 바쁜데, 대여점이 있는 제주시까지 되돌아갔다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 앞 브레이크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일주도로 풍경. 해안도로는 아니지만, 이렇게 더러 바다가 보일 때도 있다.
일주도로 풍경. 해안도로는 아니지만, 이렇게 더러 바다가 보일 때도 있다. ⓒ 성낙선

주저앉은 '애마'... 펑크 난 자전거를 끌고 터벅터벅 걷다

이날의 난관은 다른 데 있었다. 조천을 지나 얼마 안 가 평대리에서 자전거가 주저앉았다. 뒷바퀴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리기에 내려서 살펴봤더니 엄청난 속도로 바람이 새나가고 있었다. 펑크가 난 것이다. 제주도에 와서 정말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일이 심하게 꼬인다 싶었다. 이제 펑크를 때우기 전까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

허허벌판,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도로 위에 서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급한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자전거 대여점에 SOS를 보냈다.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 싶어 전화를 했는데, 근처 마을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 오토바이 수리점이나 자전거점포에 수리를 맡겨야 한단다.

가장 가까운 마을인 세화리까지 20여 분을 걸어갔다. 뛰어가도 시원찮을 판에 펑크 난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다니, 내 자전거 여행 이래 최대의 굴욕이었다. 세화리에 들어서 처음 발견한 오토바이 수리점에서는 자전거 펑크 수리를 거부했다. 근처에 자전거점포가 있으니 그리로 가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주도에서는 오토바이 수리점에서도 간단한 자전거 수리를 해준다고 들었는데, 그건 사실과 달랐다. 하긴 자전거점포를 옆에 두고 오토바이 수리점이 자전거 수리까지 도맡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제주도의 자전거도로.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분리되어 있다. 원래는 경운기가 다니도록 만든 길이다.
제주도의 자전거도로. 자동차가 다니는 길과 분리되어 있다. 원래는 경운기가 다니도록 만든 길이다. ⓒ 성낙선

진짜 문제는 자전거점포에 있었다. 길을 물어 겨우 찾아간 자전거점포에 주인이 없었다. 유리문에 '출장 중' 딱지가 붙어 있기에 거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아저씨, 발음이 이상했다. 좀처럼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제주도 사투리가 섞인 말로 뭐라고 몇 마디 웅얼거리는데, 오겠다는 건지 못 오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확답을 들으려 했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 버린다.

인내심을 가지고 1시간을 기다렸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나중에 참다 못해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땐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피하는 게 분명했다. 방법이 없었다. 이제는 망치로 때려서라도 내 손으로 직접 자전거를 수리해야 했다. 자전거를 매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다행히 내실에 가는귀를 잡수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사정을 설명하고 바로 뒷바퀴를 해체했다. 좀 있으려니 매장 주인의 부인인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아주머니 말씀을 듣고 비로소 아저씨가 병원에 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제야 저간의 사정이 이해가 됐다.

수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수도며 세숫대야며, 압축식 공기 펌프까지 장비는 훌륭했다. 튜브를 꺼내서 세숫대야에 담가 보니 무려 네 군데에 구멍이 나 있었다. 어떻게 한꺼번에 네 군데나 펑크가 난 것일까? 더군다나 한 군데는 나머지 세 군데와 완전히 반대쪽에 구멍이 나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펑크 수리에 30분이 걸렸다. 세화리에서 펑크 한 번 때우는 데 전부 2시간이 걸린 것이다. 맥이 쭉 빠졌다. 어떻게 해서든 오늘 서귀포까지 가야 내일 안으로 제주도 일주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일정의 1/3 지점밖에 안 되는 세화리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시계가 벌써 오후 2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제주도에선 펑크 걱정 말라"고 말했는데... 죄송합니다

 제주도
제주도 ⓒ 제주관광공사
표선을 못 가서 뒷바퀴에 다시 이상이 생겼다. 내려서 확인해 보니, 타이어에 탄력이 부족했다. 또다시 바람이 빠져나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원인은 두 가지. 세화리에서 펑크를 제대로 때우지 못했거나, 세화리를 떠난 이후 어딘가에서 또 펑크가 난 것이다. 어쨌거나 이 상태로 표선까지 가서 다시 펑크를 수리해야 한다는 건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표선에서 처음 마주친 오토바이 수리점에서도 자전거 수리를 거부했다. 세화리에서와 똑같이, 근처 자전거점포를 찾아가란다. 그렇게 해서 다시 물어물어 자전거점포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이곳의 자전거점포 역시 아저씨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점포 문까지 걸어 잠가 속수무책이었다.

한겨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전거점포를 찾아올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문을 닫은 점포 앞에 서 있으려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에 자전거도로가 아무리 잘 닦여 있다 한들, 고장 난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최소한의 대책은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이쯤 되니, 제주도 역시 결코 '펑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난해 초여름 제주도 자전거여행을 마치고 나서 블로그에다 제주도에선 펑크 걱정일랑 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떠벌였던 게 실은 모두 뻥이었다.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이 모두 최소한의 수리도구조차 갖추지 않은 채 자전거여행에 나선 내 잘못이다. 화를 낸다고 해서 눈앞의 문제가 해결될 리 만무. 할 수 없이 오토바이 수리점으로 돌아가 튜브에 바람만 가득 넣은 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디든 바퀴에서 바람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만 달려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바람은 매우 더디게 빠져나갔다. 하지만 바퀴가 탄력을 잃으면서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표선을 지나서 드디어 얼굴을 내비친 한라산. 정상에 눈이 덮여 있는 것이 보인다.
표선을 지나서 드디어 얼굴을 내비친 한라산. 정상에 눈이 덮여 있는 것이 보인다. ⓒ 성낙선

힘은 힘대로 들고 속도는 좀처럼 나지 않는 상태로 겨우 남원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후 5시. 조금 무리를 해서 달리면 서귀포까지는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원에서 서귀포까지는 대략 20여 킬로미터. 펑크 난 자전거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귀포에 도착하는 건 무리였다. 이날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가 지도상으로도 80킬로미터가 넘는다. 그래도 브레이크 고장에 펑크가 연발하는 자전거를 타고 달린 거리로는 꽤 멀리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너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자리에 누우면 바로 잠에 곯아떨어질 것 같은데 막상 자리에 누우니 그렇지도 않았다. 연속해서 펑크가 난다는 건, 그 자전거에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애초 계획한 자전거여행을 이런 식으로 중동무이 내는 것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전전반측했다. 그렇게 제주도의 밤이 깊어갔다.

 바람에 쏠려 한쪽으로 나뭇가지를 뻗은 소나무들. 제주도에서는 바람을 피할 길이 없다.
바람에 쏠려 한쪽으로 나뭇가지를 뻗은 소나무들. 제주도에서는 바람을 피할 길이 없다. ⓒ 성낙선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자전거여행#남원#표선#세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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