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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글 : 오드리 설킬드
- 옮긴이 : 허진
- 펴낸곳 : 마티 (2006.5.25.)
- 책값 : 2만 원

(1) 주부습진에 걸리며 읽는 삶

아기는 엎드려 자기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아기는 한참 자다가 슬슬 몸을 돌리며 엄마아빠하고는 거꾸로 엎드려 있습니다. 자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합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아기를 눕히지 않으면 언제나 이 방 끝 저 방 끝까지 굴러가 있습니다. 저는 떠오르지 않으나, 아마 저도 우리 아기하고 똑같이 어렸을 때에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잠을 잤으리라 봅니다.

지난주부터 제 두 손을 제대로 쓰기 어렵습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 접히는 자리가 쩍쩍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쥘 때마다 따끔하고 물잔이나 병을 손아귀로 쥐기 힘듭니다. 새끼손가락이 다칠 때에도 무슨 물건을 쥐기 어려웠는데, 이 자리가 갈라져도 참 힘듭니다. 그러나 집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픔을 견디면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엊그제 알아보니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갈라지는 일은 주부습진입니다.

주부습진이라니. 주부습진인가. 주부습진이구나. 무언가 다른 데가 아파서 이러나 하고 걱정했는데, 주부습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을 놓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집일은 조금도 줄 턱이 없는데, 이제부터 주부습진이면 어찌 견디면서 살아가나 근심입니다.

하기는, 날마다 두 시간 남짓 아기 옷가지 빨래를 하는 삶을 열아홉 달째 꾸리고 있으니 주부습진에 안 걸릴 수 있겠습니까. 안 걸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집 아기는 으레 이렇게 자고, 한참 놀다가도 이렇게 엎드려 있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집 아기는 으레 이렇게 자고, 한참 놀다가도 이렇게 엎드려 있기를 좋아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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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어떠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주부습진에 안 걸렸을까요.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아니, 우리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오래 물을 만지며 더 많은 집일을 했으니 저보다 더 어렸을 때에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신 데가 없었을 테며, 손이며 발이며 온통 주부습진으로 쩍쩍 갈라졌겠지요.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을 떠올려 봅니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던 날부터는 손빨래가 줄었다지만, 오로지 맨손으로 여름이며 겨울이며 이불과 옷가지를 주물러댄 나날이 어머니 손에 오롯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이 어떠한 손이었던가는, 저 스스로 우리 어머니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삶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딱히 빨래기계를 안 쓰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굳이 내 옷가지를 빨래기계를 써 가며 빨아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서, 스물한 살에 혼자 집을 나와서 살아갈 때부터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물예닐곱 살까지는 겨울에도 찬물로 손빨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꾸리는 살림살이에 빨래는 그리 안 많아, 주부습진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산 뒤에도 두 사람 몫 빨래는 얼마든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 이때에도 주부습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빨랫거리를 쉴새없이 쏟아내는 아기를 낳아 키우며 비로소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아이키우기는 빨래만이 아니니까요. 오줌을 싸거나 똥을 지리면 그때그때 치우고 씻기도 닦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먹이고 입 닦고 하면서 하루 내내 잠잘 때를 빼놓고는 손이 마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키우기를 온통 어머니한테만, 그러니까 여자한테만 맡기고 살고 있으니, 남자들이 주부습진에 걸려서 아파하고 힘겨워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나라 글쓰고 사진찍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으레 남자요, 예술이나 문화 한다는 여자들 또한 여느 남자와 매한가지로 집일은 돌보지 않거나 집일은 남한테 맡기며 예술하고 문화에만 모든 힘과 품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들한테서도 주부습진 때문에 '창작하며 힘들어요'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예술인 과학인 체육인 연예인 …… 들은 주부습진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이 주부습진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추거나 영화로 찍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주부습진뿐이겠습니까? 빨래하기를 시로 쓰고 소설로 쓰며 영화로 찍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아이키우기를 동화로 쓰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동시로 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인다거나 아기한테 죽을 먹인다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지요? 기껏(?) 나온다는 창작품은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아름답게 그리는 모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자리를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삶으로 받아들일 틈이 없으니까요.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을 할 때에 '집일 이야기'를 반드시 그려내거나 담아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네 창작밭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네 창작꾼들 삶과 눈길이 너무 한쪽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밥을 안 먹고는 못 살고 물을 안 마시고는 못 살며 바람을 들이쉬고 내뱉지 않고는 못 사는데, 사람이라는 목숨이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을 헤아리면서 그려내거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키운 삶과 손길을 못 보고, 또 내가 키우는 삶과 손길을 못 봅니다.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곧바로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지어낼 수도 있으나, 굳이 머리로 지어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보고 느끼고 담아내어 펼치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프랑스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멀리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에서도 우리 동네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얼마든지 '우주를 만나'거나 '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맙게 얻으면서 누리는 목숨인가를 느낄 수 있으면, 늘 즐겁고 신나게 일하며 놀 수 있습니다.

 (2)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읽기

겉그림.
 겉그림.
ⓒ 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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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레니 리펜슈탈은 2003년에 숨을 거둡니다. 백 살에다가 두 살을 더한 삶을 꾸린 이이는 처음에는 춤꾼이 되고자 했으나 다리를 다쳐 춤꾼이 되는 꿈을 접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감독이라는 또다른 길을 찾습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영화감독으로 걷던 길은 독일 정치권력을 붙잡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소용돌이를 거치며 송두리째 가로막힙니다. 유럽을 불태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당신이 찍은 영화 필름이며 집이며 사회활동이며 모조리 잃거나 빼앗깁니다. 전쟁통에 여러모로 아끼며 돌봐 주던 사람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이름에 얽히지 않겠다며 등을 돌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 빚과 소송에 시달리면서도 가느다란 삶줄기를 놓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하나만큼 다를 뿐이라 하는데, 날마다 죽고픈 마음이었을 텐데 갑갑하고 슬퍼서라도 죽을 수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마음속에는 뜨거움이 늘 솟구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촬영기를 붙잡을 수 없는 몸으로 사진기를 쥐어든 레니 리펜슈탈은 '촬영기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사진기로 풀어내는 응어리'로 이어갑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쥔 레니 리펜슈탈한테는 지난날과 똑같은 '짓궂은 뭇칼질로 범벅된 글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밑바닥에서도 짓밟히는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을 터이나, 이러한 '죽음보다 못한 삶'에서도 삶자락을 붙잡습니다. 이리하여, "90대가 된 지금(1990년대)도 레니는 다이빙을 즐긴다. 레니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최고령 다이버일 것이다. 무언가에 매혹되는 능력과 더 나은 사진을 향한 노력은 전혀 줄어들 줄을 몰랐다 … 그 엄청난 열정과 추진력, 길고 날씬한 다리를 보면 (아흔을 넘긴) 레니는 아직도 소녀 같다. 레니는 처음 다이빙을 한 이후로 수년간 해저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다. 또다시 사라져 가는 존재를 기록할 운명이 주어진 듯했다. 그래서 레니는 열렬한 환경보후주의자이자 자크 쿠스토의 지지자이며 그린피스의 회원이 되었다(530∼531쪽)."고 합니다.

우리 이웃동네에 여든일곱 나이로 수채그림을 그리는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틈틈이 할머님 댁을 찾아뵈며 인사를 올리고 말씀을 귀담아듣곤 합니다. 할머님은 당신 딸아들한테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걱정 없이 마지막 삶을 이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할머님으로서는 '당신이 손을 놀리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도움 손길을 받을 까닭이 없다면서, 여든일곱 나이로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면서, 이 가르침삯으로 살림을 꾸립니다.

예술쟁이로 한삶을 마감한 레니 리펜슈탈 님과 이웃동네 그림할머님을 나란히 견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뭇 다른 길을 걸었고, 서로 다른 넋으로 예술(영화나 사진하고 그림)을 붙잡기도 했지만, 한 분은 예술길에 어린 날부터 젊음과 늙음을 모두 바쳤다면 다른 한 분은 어머니로서 살림살이 꾸리기를 예순 넘어까지 한 끝에 비로소 느즈막하게 당신 예술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꿋꿋하게 당신들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고 지는 이름이 아닌, 당신들 뜻과 길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길로 돌아본다면,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당신이 세상살이와 세상흐름을 옳고 바르고 싱그럽고 곱게 보여주거나 이끌 만한 길동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쏟거나 바칠 만한 짝꿍은 있었으나, 이 짝꿍들 가운데 레니 리펜슈탈이 한창 뜨거운 젊음을 불사를 때에 슬기롭고 눈밝도록 거든 사람은 없었구나 싶습니다. 따끔하게든 부드럽게든, 히틀러가 움켜쥐던 그무렵 독일 삶터를 바르게 읽고 바르게 도와줄 벗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와주지 않고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잽싸게 얼굴과 몸짓을 바꾸면서 레니 리펜슈탈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새롭게 살아남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건 일을 하건 했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헤아리면, 다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사람 얼굴과 이름에 기댈 뿐, 레니 리펜슈탈 마음속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 삶터를 튼튼하고 씩씩하게 일구는 길로는 접어들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니 리펜슈탈도 나이 예순을 넘긴 다음 만나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아간 길동무가 있었기에, 늘그막에는 당신 젊은날 매무새에서 한껏 거듭나며 새로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끊이지 않는 뭇칼질에도 견디어 내는 힘이나, 끝없는 손가락질을 살며시 흘려보내면서 빙긋 웃을 수 있는 느긋함을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머나먼 나라 사람이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기에, 참말로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분이 늘그막에는 느긋하며 한결 즐겁게 마지막 삶을 꾸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650쪽이 넘는 두툼한 책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꽃이 아닌 우등불 같은 뜨거움을 늘 가슴속에 담으면서 활활 태운 레니 리펜슈탈이었다고 느낍니다. 이 뜨거움이 있기에 히틀러 나치당 정권에서는 '사회와 정치를 읽지 못한 바보'였으면서도 영화예술 새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쓴 오드리 설킬드 님은, 두툼한 책 마무리를 지으며,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577쪽)?" 하고 묻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세상을 못 읽고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있겠으나, 레니 리펜슈탈한테만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여느 세상사람들은 레니 리펜슈탈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조용히 뉘우치면서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새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저 영화예술 하나에만 온힘을 바친 레니 리펜슈탈이었기에, 당신이 일군 창작은 창작 그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한편, 이러한 창작은 훌륭하지만 이러한 창작 뒤켠에는 또다른 삶이 있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으시오 하고 일러 줄 수 있는 어르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이켜보면, 이처럼 넓고 푸근하게 껴안으면서 부드러이 일깨워 주는 어르신은 우리 사회에도 몇 사람 없습니다. 처음부터 착하기만 하거나 잘나기만 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터전이 아니라, 처음에는 얄궂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며 미웁기도 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깨닫고 배우면서 우리 터전을 일구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넌 잘못했어. 넌 나빠. 그러니까 넌 죽어야 해.' 하는 말마디로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 이 일은 이렇게 되었구나. 다음 일은 다르게 해 보자.' 하면서 부둥켜안으며 기다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두툼한 평전하고, 리펜슈탈 사진책 하나를 함께 놓아 봅니다.
 두툼한 평전하고, 리펜슈탈 사진책 하나를 함께 놓아 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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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가 있고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 님을 감싼다거나, 마음씨는 짓궂고 눈썰미는 형편없으며 친일부역을 했지만 문학은 아름답다며 누군가를 우러르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 마음이 되자는 소리입니다.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일 때에, 농사꾼이 이 논밭을 그냥 내버려 둘까요? 그예 내팽개칠까요? 참 농사꾼은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을 기름진 논밭으로 돌려놓으려고 여러 해에 걸쳐 땀을 흘리고 흙을 갈고 풀을 심고 갈아엎기를 되풀이합니다. 짧으면 대여섯 해, 길면 열 몇 해에 걸쳐 바보밭이나 묵정밭을 기름지며 좋은 밭이 되도록 힘씁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따스한 사랑과 넉넉한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 가르고 저리 가르는 금긋기가 아닌, 모두 아름다우며 고운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일깨우며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야지 싶습니다.

왜 초등 여섯 해, 중고등 여섯 해, 모두 열두 해에 걸쳐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겠습니까. 대학교에 보내려고 가르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목숨이 올바르고 싱그러우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고 차근차근 섬돌을 디디듯 가르치고 일깨웁니다. 이 열두 해 동안 한 아이는 엉뚱한 길로 빠지거나 샛길로 접어들기도 할 텐데, 이렇게 흔들리거나 떠돌 때에 우리 어른들은 지긋이 바라보며 포근히 감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손놓고 기다리지 말고, 손을 맞잡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지켜보며 팔짱낀 채 지켜보지 말며, 어깨동무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삶이란, 이이를 헐뜯는다든지 추켜세운다든지 깎아내린다든지 섬긴다든지 하자는 삶이 아닙니다. 이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받아들이고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삶은 어떤 모양 어떤 몸짓인가를 깨닫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우리들 가슴속에는 어떠한 뜨거움이 어떠한 크기로 어느 때에 있는지를 돌아보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 삶을 우리들부터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 사랑하자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지나온 발자취뿐 아니라 바로 오늘과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흐트러지거나 흐리멍덩하지 않도록 다스리며 다독이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발자국을 찬찬히 짚으며 내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는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춤사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몸짓을 가만히 헤아린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땀방울을 오롯이 살피며 내 땀방울은 어떠한가를 오롯이 살핀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간기를 살피니, 이 책은 1996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 나라에는 2006년에 옮겨졌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은 2003년에 죽었습니다. 당신이 아흔다섯 살일 때에 나온 책인데, 레니 리펜슈탈 할머님은 당신 삶을 낱낱이 파헤치고 되짚으면서 다룬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나서, 당신 마지막 일곱 해는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일구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을 다루는 평전이라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써서 함께 읽고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웃동네 사람들은 스콧 니어링 난날을 기리면서 '당신이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저는 스콧 니어링도 그렇고 레니 리펜슈탈도 그렇고 우리 이웃동네 그림할머님도 그러한데, 모두들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숱한 이야기를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당신들 모두가 고마운 이슬떨이요 스승이요 길동무입니다.

리펜슈탈은 당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한테서 멀리 떨어져, 이 '벌집' 하나를 짓고 누바족 사람들하고 조용히 아프리카에서 살아갈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리펜슈탈은 당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들한테서 멀리 떨어져, 이 '벌집' 하나를 짓고 누바족 사람들하고 조용히 아프리카에서 살아갈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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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길디긴 이야기 꾹꾹 눌러담기

2006년에 읽은 책을 지난해에 다시 한 번 읽고 다섯 해 만에 느낌글을 적바림합니다. 2006년 무렵, 이 책을 펴낸 '마티' 출판사에서 다른 책을 내놓았는데 오탈자가 다섯 군데 나오는 바람에 애써 찍은 책을 모조리 거두어들이고 다시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느낌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오탈자를 스물다섯 군데 찾았는데, 자그마치 650쪽이 넘는 책을 또다시 거두어들여 새로 찍는다면, 1인 출판을 하는 사장님이 알거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650쪽짜리 책에 오탈자 스물다섯 군데라면 퍽 적게 나온 셈입니다.

드디어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쓰는구나 하고 지난 다섯 해를 돌아봅니다. 다섯 해 앞서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썼다면 아무래도 '다섯 해만큼 덜 배우고 덜 깨닫고 덜 생각한' 채로 느낌글을 썼으리라 봅니다. 다섯 해가 지난 오늘이라 해서 더 배우고 더 깨닫고 더 생각하며 느낌글을 쓴다고 내세우기 힘들지만, 다섯 해를 곰삭일 수 있는 세월이 고맙습니다. 아마, 앞으로 다섯 해를 더 곰삭인 다음 이 책을 새로 돌아본다면, 그만큼 저 스스로 '오늘은 읽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그때에 읽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 맞이할 다섯 해를 생각하면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에서 제 가슴으로 살며시 파고든 대목을 하나하나 눌러담아 봅니다.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도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든 책입니다. 이 책을 마주하고 싶은 분이라면, 다른 책도 마찬가지인데, 며칠 만에 다 읽으려 하든지 한두 달 만에 끝내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천천히 새기고 돌아보면서 1900년대 첫무렵부터 1900년대 끝무렵까지 우리 세상 이야기를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은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낸 한 사람 발자취이자 20세기 인류문화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20, 118, 129쪽] 여기서 리펜슈탈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장비와 최고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 있다 해도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리펜슈탈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곳에 배치함으로서 각 촬영기사들이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 레니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직접 그런 영화를 위한 발라드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졌다. 무용을 할 때처럼 말이다 … 레니는 마을 여관에 방을 잡고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머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이런 계획을 털어놓자 여관 주인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 하지만 레니는 겁먹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레니는 하루 종일 거리나 산허리에 띄엄띄엄 모여 있는 집들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했고, 특히 여자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주가 지나자 차가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고, 레니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돌려가며 보여주자 곧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보려고 애썼다.

수잔 손택은 <The people of Kau>를 비롯한 레니 리펜슈탈 사진을 놓고 '나치 냄새가 난다'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수잔 손택은 <The people of Kau>를 비롯한 레니 리펜슈탈 사진을 놓고 '나치 냄새가 난다'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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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마티(2006)


태그:#책읽기, #레니 리펜슈탈, #책삶, #삶읽기, #아이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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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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