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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이 멈추는 곳 스톡턴 비치

풍경이 멈추는 곳
▲ 스톡턴 비치 풍경이 멈추는 곳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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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정글이야, 뭐야?"

새벽에 텐트 너풀거리는 소리에 깨었다가 가까스로 단잠을 청했건만 정글을 방불케 하는 새소리에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놈의 새 목청도 좋다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카라반 파크에 울려 퍼지는 천연 자명종 소리가 꼭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밤새 바람소리를 이기는 바다의 음향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날이 밝고서야 바로 캠핑장과 스톡턴 비치가 자그마한 모래 둑방을 사이에 두고 있음을 알았다.

쪽문을 통해 나서니 몇 걸음 만에 남태평양의 바다와 조우하게 된다. 정갈하고 잔잔한 스톡턴 비치의 정경은 어제 사륜구동으로 접했던 사막 해안과는 다른 느낌이다. 길게 이어진 부드러운 해안의 곡선미와 그리 과하지 않은 파장으로 발치에 와 닿는 물결이 정겹다.

꼬맹이들과 해변에서 노는 부모의 모습도 더없이 한가해 보인다. 잠시, 살포시 다가왔다가 맥없이 자취를 감추는 물살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정지 영상처럼 느껴진다. 그냥 이렇게 살다 갔으면...... 약한 물살에도 제 흔적을 지워내는 모래처럼 그렇게 순응하며 살다 갔으면...... 어젯밤 늦도록 대화를 나눴던 알렌을 떠올렸다. 나이 쉰둘에 세간을 차에 싣고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

그러나 역광을 받아 어스름한 형체로 남은 아내를 보며 새삼 깨닫는다.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떠나던 알렌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던 그 허전함의 정체를. 사물과 시간이 정지한 이 해변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를.

형형색색의 조개들
▲ 스톡턴 비치 형형색색의 조개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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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길을 걷던 해변의 산책을 뒤로 하고 퍼시픽 하이웨이를 따라 브리즈번(Brisbane)으로의 여정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에 나타난 브리즈번 숙소까지의 거리는 783Km. 한국에서 오늘 도착할 경숙·철호 부부와 합류하기로 한 곳이 브리즈번이어서 전 일정을 통틀어 유일하게 숙소 예약을 해두었다. 그래서 꼭 오늘 중 도착해야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오른 좌석 운전하기

"라운드어바웃, 라운드어바웃! "
"크게 돌아, 크게"
"차를 오른쪽으로 더 붙여요!"

운전이 다시 시작되면서 조수석의 아내가 무척 바빠졌다. 시드니에서의 며칠은 보도와 전철을 이용했고 어제는 신호나 교차로가 없는 사막지형에서의 질주가 대부분이었으니 아직도 호주 운전의 감을 찾지 못한 남편의 운전을 불안해하는 것이다. 불신하는 아내를 탓할 것만도 아닌 게, 차량을 처음 인수하던 날처럼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오른 좌석 운전이 여전히 부담스럽다.

특히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라는 회전교차로에서는 특별히 신경이 쓰였다. 진입차량에 우선권을 주는 '로터리(Rotary)'에 익숙해져 있어 회전차량이 진입차량에 우선하는 라운드어바웃에서는 매번 주춤거리게 된다. 무조건 자신의 오른쪽에서 오는 차에게 양보하면 된다는 단순한 원칙도 오랜 습성을 쉽게 극복하지는 못했다. 큰 교차로에서 우회전할 때 한국에서처럼 중앙선 오른쪽 차선으로 들어서려 한 적도 있었으니 몸에 익은 것의 무서움을 더 말해 무엇하랴. 그 후 우회전 신호를 기다릴 때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운전자에게 '크게 돌아, 크게'를 강조하는 것이 임무처럼 되어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도로에 종종 화살표를 표시해 놓고 'Keep Left'라 써놓는 것을 보면 이성이 습관을 이기지 못하는 외국인이 나 하나만은 아닌가 보다.

호주에서 운전하기 중 또 하나 어려운 점은 차선에 차폭을 맞추며 주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오른쪽 운전석에서 차폭을 가늠하다 보니 자꾸 왼쪽으로 차를 붙이게 되어 옆 차선의 차나 갓길 장애물에 부딪힐 듯 지날 때가 많다. 그러니 왼쪽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연신 차를 오른쪽으로 붙이라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그래서 터득한 게 눈으로 보이는 감 말고 어떤 '원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눈으로는 다소 오른쪽에 붙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측 전조등으로 차선을 밀면서 가면 그게 정중앙 주행이었다. 그리하여 내 오른팔에 중앙선이 스쳐가면 정상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리'라는 것도 결국 눈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대화에 빠지거나 잠시 한 눈을 파는 순간 이내 조수석에선 경보음이 울린다.

"제발 오른쪽으로 붙으라고욧!"

길이 국립공원이고 국립공원에 길이 있는 비몽사몽의 세상에서 한 가지 조심할 일은 중앙선침범이다. 중앙선이라 해서 꼭 노란색으로 칠해진 것도 아니며 점선으로 이루어진 곳도 많으니 함부로 차선을 넘나들면 위험한 순간이 생긴다.
▲ 브리즈번으로 가는 길 길이 국립공원이고 국립공원에 길이 있는 비몽사몽의 세상에서 한 가지 조심할 일은 중앙선침범이다. 중앙선이라 해서 꼭 노란색으로 칠해진 것도 아니며 점선으로 이루어진 곳도 많으니 함부로 차선을 넘나들면 위험한 순간이 생긴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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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어려움의 연원은 내가 익히고 일상화한 것들과 다르다는 것에 있다. 영국의 전통주의와 독일의 합리주의 사이 희생양이라고나 할까? 1800년대 후반 독일 다임러 벤츠에 의해 자동차 양산이 본격화 될 때 다수의 오른손잡이가 기어조작하기에 편하도록 왼쪽에 운전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채찍을 쓸 때 옆사람이나 행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오른쪽에 마부가 앉던 마차 운용의 전통을 자동차에 적용했다. 이후 영국의 광대한 식민지역을 기반으로 한 오른쪽 운전석 체계와 유럽대륙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왼쪽 운전석 체계로 나뉘었고, 오늘날 나는 그 갈림의 후유증을 제대로 앓고 있다. 일제강점기 오른쪽 운전석에서 미군정 이후 왼쪽 운전석으로 전환되던 시기의 사람들도 같은 혼동을 느꼈을까?

그러나 통일과 획일의 편리함 속에서 자칫 간과하는 점이 있나 모르겠다. 현대과학기술의 총아인 우주왕복선의 로켓부스터 크기마저 로마시대 전통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합리를 기초로 전통을 버리라는 강요는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그 '합리'라는 것이 절대기준의 합리가 아닌 바에는 더더욱 그렇다.

오른쪽 운전석 자동차를 운용하는 그 어느 나라도 이 운행체계를 '불합리'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다름'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호주 자동차 여행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운전석 위치의 다름은 그저 기계장치의 차이를 느끼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영국을 모국으로 태동한 그네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체험하게 한다. 길 떠남의 이유가 일상과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호주의 고속도로

브리즈번으로 가는 '하이웨이(Highway)' 에서 한국과 다른 호주의 고속도로 시스템을 실감한다. 요금을 내지 않는 고속도로가 있는 것도 놀랍고 '나들목'이 따로 없는 점도 신기하다. 제한속도 100~110km의 쭉 뻗은 도로가 진행되다가 제한속도가 줄어들며 마을을 관통하고, 마을길을 벗어났다 싶으면 어느새 고속 주행이 가능한 길로 변한다. 딱히 우리 고속도로의 '휴게소' 같은 시설은 없으며 종종 '레스트 에어리어(Rest Area)'라 해서 간이화장실과 휴식탁자가 설치된 구역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식사를 한다든가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한다든가 하는 우리식 휴게소의 역할이 필요하다면 마을을 지나칠 때 해결해야 한다.

나들목이 특별히 없는 고속도로는 마을로 통한다. 물론 속도는 줄이게 된다. 사진처럼 종종 차선의 규격을 넘는 '오버사이즈'화물이 지날 때는 앞뒤로 신호차량이 함께 움직인다.
▲ 도로는 마을로 통하고 나들목이 특별히 없는 고속도로는 마을로 통한다. 물론 속도는 줄이게 된다. 사진처럼 종종 차선의 규격을 넘는 '오버사이즈'화물이 지날 때는 앞뒤로 신호차량이 함께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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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도중에 들른 캠시(Kemsey)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묘하다. 지구 저 아래편까지 먼 길을 왔다 생각했는데 결국 '서브웨이(Subway)'라니. 비록 토핑 고르는 것부터 음료 크기 주문까지 한국보다 자잘한 선택을 끊임없이 강요당하는(?) 차이점은 있지만 이 낯익은 체인점이, 자동차 운전석 방향과 고속도로의 상황이 우리와 다른 데서 느꼈던 문화적 충격을 상쇄한다.

식사 후 마을의 캠핑 마켓에서 취사용품용 연료를 더 구입하고 주유소에서 기름도 넣고 하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이들은 물류이동이 빈번한 브리즈번과 시드니 사이에 논스톱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만들지 않는 것일까? 비용 대 효과 때문일까, 아니면 길을 또 만들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생태 파괴에 대한 우려 때문일까? 아니면 도시나 마을이 듬성듬성 있는 호주의 지리적 환경에서 마을을 우회하는 도로를 만든다면 교통요충에 있는 마을들에 경제적 타격이 있기 때문일까?'

내 생각은 마을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경제적 관점에서 그랬으리라는 쪽인데 아내에게 물으니 생태적 이유가 아닐까 대답한다. 일리는 있다. 시야가 탁 트인 직선도로를 달리다가 울창한 삼림지대를 만나고 해가 들것 같지 않은 왕복2차선 좁은 길을 달리노라면 흡사 국립공원에 난 길에서 드라이브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길을 내느라 뭉개는 초지와 삼림의 규모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어쩌면 이들은 속도보다 소중한 자연의 가치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선생을 모셔라

낯선 길을 움직일 땐 시인성이 좋으면서 규정속도를 준수하는 차를 골라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꾸준히 뒤따르는 방법도 좋다.
▲ 독선생을 모셔라 낯선 길을 움직일 땐 시인성이 좋으면서 규정속도를 준수하는 차를 골라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꾸준히 뒤따르는 방법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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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이후의 주행은 제법 안정감이 생겼다. 뻥 트인 길에서 무리하게 속력을 내거나 낯선 길이라고 소심해져 지나치게 서행하는 일을 막기 위해 소위 '독선생'을 모시는 방법을 썼다. 차체가 작아 전방시야를 확보하기 좋고 흰색이나 밝은 색으로 시인성이 좋으면서 규정속도를 준수하는 차가 나타났을 때 나와 아내는 '독선생'이라 불렀는데 이런 차를 좇아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꾸준히 따라가는 일을 '독선생을 모신다'고 표현했다. 낯선 곳에서 전방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지 않고 안전운전하기에 좋은 방법이다.

일몰의 아름다움을 차안에서 맞고 도로옆 공원 식탁에서 사발면으로 저녁을 해결하는 분투에도 불구하고 브리즈번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고속도로에서 진입차량이 주행차량보다 우선하며 맹렬히 달려들기에 벌써 퀸즐랜드(Queensland)주에 진입했구나 싶었는데(주마다 도로교통법이 약간씩 다르다) 브리즈번까지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들어와야 했다.

호주에서 3번째로 큰 항구도시로 퀸즐랜드의 주도(州都)인 브리즈번의 야경은 휘황하다. 대개 지역의 인상은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이미지가 남는데 밤에 도착한 브리즈번은 이런 기억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허물은 어둠 속에 가려지고 조명의 현란함이 부각되던 지금의 화면으로. 그러나 이런 휘황함은 조명 때문만이 아니라 800여 Km에 가까운 먼 길을 무탈하게 달려왔다는 안도와 한국에서 오늘 날아온 경숙 부부와 합류하게 되었다는 기대가 만들어낸 빛일 수도 있다.

퀸즐랜드의 주도인 브리즈번의 밤풍경.
▲ 브리즈번의 야경 퀸즐랜드의 주도인 브리즈번의 밤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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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만난 그들과 밤늦도록 밀린 대화를 나눴다. 한국에서도 수시로 얼굴을 보는 사이지만 먼저 떠나온 며칠이 만든 차이와 앞으로 함께할 여정의 공유가 이끌어 내는 화제는 끝이 없다. 이제 네 명의 구성원이 다 모였다. 진정한 아웃백으로의 한 걸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인물소개

아웃백 여정을 함께 할 구성원들. 위로부터 오창학, 이은주, 최철호, 최경숙
▲ 등장인물 아웃백 여정을 함께 할 구성원들. 위로부터 오창학, 이은주, 최철호, 최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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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학, (팀리더) 자동차 지구여행을 꿈꾸는 사람. 늘 낯선 곳을 그리는 일상의 몽유병자. 성실한 직장인이면서 사륜구동으로 오지를 찾아 헤매는 다음 까페 '오프로드 캠핑(cafe.daum.net/offroadcamping)'의 운영진(닉네임 '돌쇠')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은주, (재정 및 일정관리) 오창학의 아내. 서당개 삼 년의 경지인지 타고난 천성인지 모르겠으나 길 떠남에 두려움이 없고 운전에 능하다. 셈과 닦달에 능해 재정 및 일정의 관리와 기록에 관한 임무에 정통하다.

최철호, (촬영감독) 꼬맹이들과 단편영화를 만든 이래 졸지에 영화감독으로 등극한 인물. 타고난 야외생활자이면서도 일종의 비행기 공포가 있어 여행을 두려워하는 그가 삶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대장정에 나섰다. 착하고 낙천적이면서 맡은 임무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성격의 소유자로 '프로정신'이 뭔가를 보여주는 인물.

최경숙, (항법, 취사) 최철호의 아내. 오창학의 후배. 네 사람의 매개인. 국제운전면허를 들고 오긴 했으나 그녀의 운전 실력을 경험한 이래 그냥 쉬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주변의 권고를 받아들여 뒷좌석 코드라이버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부족한 운전실력에 반해 독도법에는 능함) 또한 야영일수가 많아 취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여정에서 전라도식 손맛과 꼼꼼한 성격이 큰 역할을 했다.


태그:#호주, #호주 아웃백, #자동차 여행, #대륙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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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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