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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때 개교한 나의 국민학교 모교는 지금은 농약회사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단밀초등학교 일제 때 개교한 나의 국민학교 모교는 지금은 농약회사의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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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2동 684번지. 내 본적이다. 나는 단밀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단밀국민학교는 궁벽한 시골 학교 중에서는 아주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27년 10월 1일 개교하였으니 지금부터 약 82년 전에 학교 문을 열었다. 이만하면 대단한 역사와 전통을 뽐내는 학교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도 이 학교가 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35회 졸업생인 내가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든 게 1968년의 일인데, 그로부터 24년이 더 지난 1992년 3월 1일 단밀국민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그 모교를 2010년 1월 15일에 찾아가 보니 학교 운동장은 온통 농약 회사의 거대한 집하물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고, 교사(校舍) 역시 거의 폐가 수준으로 뒹굴고 있었다. 깨어진 유리창, 페인트칠이 벗겨진 건물 외벽, 온갖 물건들로 아수라장이 된 복도 등 나의 유년 시절을 추억하게 해주는 모교는 그저 '귀곡산장'일 뿐이었다.

교문도 없었다. 교문이 있던 자리에는 '교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물론 교적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발견할 수 있는, 말하자면 이 학교와 무관한 일반인은 찾기 어렵고 다만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졸업생이라야 볼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그만한 크기로 건립되어 있었다. 교적비를 읽어본다.

단밀국민학교

1927년 10월 1일 개교하여 졸업생 3151명을 배출하고 1992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1995년 경상북도 교육감

나는 65년에 걸쳐 이 학교를 졸업한 3151명의 졸업생 중 1명이다.
    

개교일, 폐교일, 졸업생 수를 밝혀준다.
▲ 단밀초등학교 교적비 개교일, 폐교일, 졸업생 수를 밝혀준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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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국민학교 교사, 교감, 교장을 역임하셨다. 나는 본래 단밀국민학교에 입학했지만 나중에 아버지가 인근 구천면 위성국민학교로 전근을 갈 때에는 따라서 전학을 했다. 그 후 다시 단밀국민학교로 옮겨와 졸업을 했다.

하지만 위성국민학교도 찾아가 보니 단밀국민학교나 매 일반으로 폐교가 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만이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을 하고 있을 쁀이었다. 학교 인근 황량한 벌판에 외로이 남아 겨울 찬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공부하는 아이들' 동상은 유난히 보는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이 학교에도 역시 교문이 있던 자리에는 교적비가 서 있어 찾아오는 졸업생들의 감회를 새롭게 해주고 있었다.

폐교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여전하다.
▲ 경상북도 의성군 구천면 위성초등학교 폐교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여전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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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어린이' 두 명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 학교 인근 황량한 잡풀 사이에는 '공부하는 어린이' 두 명이 쓸쓸하게 남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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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학교는 폐교가 되어 교적비를 남긴다.
▲ 위성초등학교 폐교 교적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는데, 학교는 폐교가 되어 교적비를 남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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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 교문 바로 앞 집에서 살았다. 아침 종소리가 들리면 책가방을 들고 운동장으로 쫓아들어가도 되었으니 말 그대로 "학교종이 땡땡땡" 노래처럼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위성국민학교 앞의 집도 지금은 철거되고 흔적도 없었다. 그 자리에는 대신 건영화물 창고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위성국민학교 교문 바로앞의 집에 살았는데 이제 그 집은 철거되어버렸고  그 자리에는 건영화물 창고가 들어서 있었다. 전봇대와 고목 사이에 작은 교적비가 보인다.
▲ 살던 집은 없어지고 위성국민학교 교문 바로앞의 집에 살았는데 이제 그 집은 철거되어버렸고 그 자리에는 건영화물 창고가 들어서 있었다. 전봇대와 고목 사이에 작은 교적비가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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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다닌 것은 아니지만 잠시 재학(?)했던 국민학교도 찾아보았다.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의 화산국민학교이다. 이 학교는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나이 이전에 다녔던 곳이다. 입학 학령 이전에 학교를 다녔다고 하면 그런 경험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나는 3세부터 비공식 국민학생이었다.

우리 가족은 이 때 경상북도 영천시(당시는 영천군) 화산면 화산국민학교 정문 바로 앞 집에 살았는데, 위성국민학교 정문 바로 앞 집이 셋집이었던 것과 달리 화산국민학교 정문 바로 앞 집은 사택이었다. 아버지가 출근을 하면 나도 따라서 학교로 들어가 1학년 교실에 앉아서 공부를 했다. 수업 시간을 다 지켰고, 숙제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달, 마침내 코피가 터져서 결국 중퇴(?)를 했다.

그 당시 사택에서 학교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그리고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그런데 정작 2010년 1월 15일에 가서 보니 불과 20미터밖에 아니 떨어진 정말 지척지간이었다. 또한 오르막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숨이 헐떡거릴 정도도 아니었다. 세 살 나이 때 보니 그것이 그렇게도 멀고 높게 느껴졌던 듯싶다. 그런 지경에 교실에 앉아서 수업까지 받았으니 코피가 터질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폐교 되지 않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기는 했어도 정식으로 다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모교라고 할 수는 없다.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화산초등학교 폐교 되지 않고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수업을 받기는 했어도 정식으로 다닌 것은 아니었으므로 모교라고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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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를 흘리며 학교로 들어서는 내 어릴적 모습을 추억하면서 교문 앞에 선 채 잠시 회상에 잠겼던 나는 금세 눈앞을 홀리는 듯한 아지랑이가 환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고목 사이로 멀리 보이는 학교 건물도 그러려니와, 돌아서서 두 눈 생생하게 확인한, 그 아득한 지난날에 살았던 집이 지금도 옛태를 고이 간직한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택으로 달려가 안을 들여다보고, 낡아서 바스라질 듯한 창틀도 만져보고, 갖가지 건축 자재들이 엉망으로 쌓인 마당을 거닐어 보기도 하면서 나는 어릴적 추억에 잠겼다. 뜯긴 채 열린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부 구조도 옛날 그대로인 듯했다. 물론 1950년대 초반의 과거 그 사택 그대로인 건물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집'이 지난날의 바로 '그 집' 그 자체라고 믿었다. 한겨울 차디찬 바람이 쌩쌩 부는 화산초등학교 정문앞에 선 채 낡아 허물어질 듯한 지난날의 사택을 바라보던 나는 농촌에서 자라나 국민학교를 다닌 까닭에 추억의 모교들이 모두 폐교 신세로 전락해버린 현실에 눌려 애잔하게 일어났던 쓸쓸함이 문득 반쯤은 안개처럼 걷혀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오랫동안 폐가 앞에 서서 그 낡은 사택의 지붕 위로 화산초등학교가 아직은 생생하게 살아서 하늘 가운데에 파랗게 떠있는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바라보았다. 

학교처럼 사택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학교에는 아이들이 있지만 사택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 화산국민학교 사택 학교처럼 사택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학교에는 아이들이 있지만 사택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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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폐교, #의성, #영천,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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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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