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칼바람 같은 추위가 계속 이어집니다. 아무리 추워도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의 특성상 한겨울이지만 눈을 구경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이곳은 가끔 아는 분으로부터 아니면 먼 지역에 사는 친구로부터 전해 듣는 눈 소식이 전부입니다.

 

매서운 한파가 며칠 째 계속 되던 날, 외출을 했습니다. 휴일이지만 함께 어울려 다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모처럼 어떻게 시간을 내서 남편과 함께 저의 고향 읍내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추운 기온에도 시장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는 분들도 계셨고, 일찌감치 가게 문을 닫은 곳도 많았습니다.

 

예전엔 고향 장터를 어머니를 따라 자주 갔습니다. 유일한 나들이였다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장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이곳저곳에서 기억 속의 장면들이 하나둘씩 떠올랐습니다. 장날마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해장국과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기분 좋아 하셨던 아버지, 그런 모습이 싫어 옆에서 잔소리 하며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어머니, 곳곳에서 아는 동네 분을 만나면 자잘한 얘기 주고받으며 한참을 서 계셨던 모습, 생선가게, 옷가게, 어묵공장, 화장품 노점의 그 작은 생활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일 때문에 몇 군데를 돌다보니 아침도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습니다. 추위를 녹여줄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서 가끔씩 들리는 칼국수집에 들렀습니다. 낯익은 할머니의 모습, 예전엔 지금의 내 모습과 같은 아주머니였는데 세월이라는 것이 많은 변화를 준 것 같았습니다.

 

칼국수 두 그릇을 시켜놓고 양은주전자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보리차를 한 잔 마셨습니다. 구수한 보리차가 정감을 더해주었습니다. 한참 후, 따끈한 칼국수가 나왔습니다. 보기만 해도 온몸이 추위에 녹아내리는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새해가 시작되던 초,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추수가 끝나고, 모처럼 내다 팔 작물들을 들고 장에 나가신 어머니는 새벽부터 나오느라 아침밥도 못 드시고 아침 시간을 보내셨고, 제대로 물건 값도 다 받지 못했지만 얼른 다 팔고 집으로 갈 생각에 사겠다는 사람에게 제값보다 훨씬 싸게 팔았다고 했습니다. 추워서 그런지 평소엔 생각 없던 칼국수가 한 그릇 먹고 싶어서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장날엔 자리가 없어 못 먹고 돌아서야 할 정도로 손님들이 많습니다. 다들 모처럼 장날 구경 나온 시골 할아버지나 할머니, 어머니도 그 틈에 끼여 칼국수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칼국수도 못 드시고, 그냥 그 곳을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천원 어치의 칼국수를 달라고 하니 주인은 황당해 그럴 수 없다고 하고, 어머니는 그냥 가게를 나오신 겁니다. 오백원 차이였지만 어머니는 오백원이 비싸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날 따라 먹고 싶어서 들렀던 칼국수, 이천원 어치를 주지 않아 그냥 나오고 말았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웃어 넘겼습니다.

 

이천원 어치의 칼국수가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을 놓고 어머니의 이천원 어치 칼국수를 생각하니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편과 이천원 어치에 대한 생각을 나누며 시원한 국물까지 후루룩 마시고 나서 가게를 나왔습니다.

 

배도 부르고 뜨끈한 국물로 몸도 녹이고 나니 쉽사리 발길을 돌릴 수 없었습니다. 생선가게에 들러 생태 한 마리를 샀습니다. 혼자 쓸쓸히 계실 어머니를 위해 동태국이라도 끓여 드시게 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차를 돌려 고향집에 들렀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내놓았습니다. 배가 불러 먹지 못하겠다고 해도 한사코 내 놓으시며 먹길 권했습니다.

 

차마 칼국수를 먹고 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가서 칼국수를 같이 먹었어야 했는데 칼국수 먹으려고 장터에 들렀던 것이 아니어서 이래저래 마음만 무거웠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 멀어져 가는 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보면서 미안함이 밀려왔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고, 남편은 다음엔 꼭 한번 어머니 모시고 칼국수 먹으러 가자고 합니다. 이천원 어치의 칼국수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 앞으로 칼국수만 보면 이천원 어치가 생각날 것 같습니다. 단순한 이천원 어치가 아니라 그것은 아마 어머니의 생활이 담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 이 추위가 다가기 전에 제가 칼국수 이천원 어치 밀어서 맛있는 한 끼 대접해 드릴게요.


#칼국수#어머니#추억#그맛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