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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들 녀석과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이야길 하던 중에 아들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아빠는 우리 가족 빼고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예요?"
"응. 왜?"
"그냥. 궁금해서."
"그럼 넌? 너부터 말해봐."
"으~응. 난 링컨, 헬렌 켈러, 그리고 제인 구달."
"왜?"
"헬렌 켈러는 역경을 이겨냈고, 제인 구달은 동물을 사랑하니까. 나도 동물을 좋아하거든."

아들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복잡한 수식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아들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란 말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런데 이번에 아들이 나에게 빨리 말하라고 한다. 존경하는 사람 두 사람을 대라고 한다.

"응, 아빠는 김대중 대통령."
"또 한 명은?"

그러나 난 '글쎄'만 되뇌이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난 아들에게 존경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물론 간단명료하게 말이다.

"말과 행동과 생각이 일치하니까."

아들아,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는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시집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되게 하소서>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시집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되게 하소서>
ⓒ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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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아들은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김대중. 그가 인고와 질곡의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5개월이 다 되어간다. 노무현 대통령이 불의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 지 3개월여 만에 끝까지 이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다 간 사람, 김대중 전 대통령.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극단적이다. 한쪽은 죽일 듯이 잡아먹으려 덤벼들었고, 한쪽은 이끌어주는 사도처럼 따랐다. 그런데 그를 잡아먹으려 하는 자들은 그가 죽어서도 가만 놔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들쑤셔댄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안다. 훗날 역사가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난 지금 그를 읽고 있다. 아니 그를 읽고 있는 게 아니라 15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추모하는 시들을 읽으며 그를 떠올리고 그의 말과 가슴과 행동을 느끼려 하고 있다.

김대중,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김대중은 단순한 인간 김대중이 아니라 올곧게 한길을 걷다가 살아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길속에 약간의 흠점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가 가고자 한 큰길은 한길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평생을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과 발전, 분단체제 극복과 민족상생과 평화통일, 사회적 약자 보호와 인권옹호, 이 땅의 문화발전을 위해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불퇴전의 용기를 갖고 헌신한 분이셨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국장 기간 중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가 애도의 물결로 휩싸인 게 사실이다."  - 책머리에서

이땅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염원하는 이들에게 김대중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대명사로 상징화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고 눈물을 흘렸지만 변절하거나 변심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김대중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신념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설파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의 신념이 그를 힘들게 했고 핍박받게도 했다.

"김대중 선생은 격동과 시련의 한국 최현대사를 온몸으로 맞받아치며, 5차례 죽음의 고비와 6년간의 감옥살이, 그리고 55차례의 가택연금과 2차례에 걸친 10년간의 망명생활 속에서도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 신처럼 역사에의 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된 삶을 최후의 순간까지 감행한 세계적인 정치지도자였습니다. 아울러 일체의 정치보복을 반대하는 비폭력주의 평화운동가, 그리고 불굴의 정신으로 무장된 이 땅의 민주투사였습니다."
- 책머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역사는 한때 좌절이 있어도 영원한 후퇴는 없다. 절망하지 않는 국민에게는 패배가 없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이런 말 속엔 그의 진정성 있는 삶이 담겨있음을 절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그의 말처럼 살아왔다. 우리가 조금만 마음만 열고 그를 보려고 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진한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고 힐난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런 것에 일희일비 하지 않았다. 그게 김대중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황지우, 백무산, 김준태 등 이 땅의 시인 157명과 작가, 화가, 서예인 등 문화예술인 162명이 인간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의 생애와 철학, 삶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그의 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추모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1
자공이 물었다. 선생님,
한 생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뭘까요. 선생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그거? 용서하는 거야.

5
호모 에쎄, 에쎄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서서 보라,
여기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그를 묻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어떤 약속을 심는 것이다.

-황지우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중에서

시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는 평생 용서의 삶을 살았다. 그를 죽이려 하는 자들을 모두 용서하였고, 그를 핍박하고 온갖 비방을 일삼는 자들에게도 맞비방하지 않고 용서했다. 또한 지금 한 평의 땅에 묻혀서도, 아니 이전까지 화해와 용서, 평화를 심어라고 주고 같다.

서둘러 그대를 칭송하지 않으리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이 열린 지난 2009년 8월 23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운구행렬을 기다리던 한 시민이 추모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영결식이 열린 지난 2009년 8월 23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운구행렬을 기다리던 한 시민이 추모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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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대중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증의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많이 기대했고 무결점을 원했다. 그렇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그러지 못했다. 추모시집 속엔 그런 마음들이 종종 드러나기도 한다.

서둘러 그대를 칭송하지 않으리
이승의 잣대로 그대를 잴 수야 없지
그대는 나에게 한이고 아쉬움
이 아쉬움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지만
그대는 처음 죽은 사람도 아니고
이 더러운 현대사 속에서
이미 여러 번 살해당한 사람 (하략)

- 정희성 '금강산 건봉사 불이문 앞에서 그대 부음을 듣고'중 일부

애증의 모습으로 다가오면서도 가버린 그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는 이유는 뭣 때문일까. 가끔은 비난의 발언을 했으면서도 지금 그를 생각하는 건 왜일까. 어쩌면 작은 결점보다는 평생을 자신의 모든 걸 걸고 희생하면서 추구했던 이 땅의 민주주의 회복, 남과 북의 상생과 화해,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려는 마음, 이런 것들이 그를 그리워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지금 그를 추모하는 많은 글들을 읽으며 그의 웃는 모습, 우는 모습, 열변을 토하는 모습, 그리고 꽃들을 돌보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한 시대가 갔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죽음과 간 한 시대. 그렇다면 그는 한 시대를 떠메고 살아왔다는 말인데 한 시대가 갔으면 다른 한 시대가 와야 정상인데 어찌된 일인지 새로운 한 시대는 오지 않았다. 그런 시대의 모습을 시인 백무산은 이렇게 노래한다.

아, 한 시대가 가셨구나
아, 한 사람이 가셨구나

한 시대가 한 사람을 떠메고 가셨구나
한 사람이 한 시대를 떠메고 가셨구나
파란 많은 시대를
곡절 많은 시대를
피비린내 진동하던 야만의 시대를
훌훌 떠메고 가셨구나

그러나 어찌하여 사람들은 그를 보내지 못하는가
슬픔만은 아니구나, 길을 막고 눈물 흘리는구나
어찌하여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라고 울먹이는가 (중략)

한 시대가 갔으나 다른 한 시대는 오지 않고
한 사람이 갔으나 그를 마중할 사람은 오지 않고
머리를 찧으며 부끄러워했으나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하략)

- 백무산 '민주주의여 슬퍼하라! 그리고 우리를 다시 광장에 서게 하라'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우리들에게 행동하는 양심을 호소했고 부르짖었고 일깨웠다. 그러던 그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나머진 후인들의 숙제로 남겨놓고 떠나버렸다. 그런 그를 두고 소설가 현기영은 '다시는 못 볼 우리의 영웅, 우리의 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랬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벗이었고, 암흑의 암흑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로 일어났고 포효하던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난 지금 벗이고 영웅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을 마음이 담긴 글들을 읽으며 그리워하고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쉴 사람을.

덧붙이는 글 |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시집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되게 하소서> 저자 : 김준태 외
값 : 13,000원



님이여, 우리들 모두가 하나되게 하소서 -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추모시집

김준태 외 지음, 화남출판사(2009)


태그:#김대중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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