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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가족은 로마의 초기 기독교인들이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켜낸 지하 세계를 찾아가기로 했다.

 

비토리오 에마뉴엘레 2세 국왕기념관(Monumento Nazionale a Vittorio Emanuele Ⅱ) 맞은편에서 160번 버스 승강장을 찾았다. 시내의 버스 종점에 서 있는 버스는 아직 승객들이 아무도 타지 않은 상태였다. 승객이 아무도 없으니 그 유명한 로마의 버스 소매치기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좌석에 여유 있게 앉아서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버스 출발시간이 가까워지자 버스에는 점점 많은 여행자들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버스는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앞 정류장에서 다시 많은 승객들을 태웠다. 그 중에 반 이상이 유럽에 배낭여행 온 한국 대학생들이었다. 내가 앉은 좌석 바로 옆에서도 로마에서 만난 듯한 우리나라의 남녀 대학생 2명이 로마 여행에서 얻게 된 정보를 서로 주고 받고 있었다. 나는 서울의 시내버스에 탄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바깥 풍경은 분명 살아있는 로마였다.

 

버스는 고대 로마의 거대한 성곽 아래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성곽은 고대도시 로마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였다. 로마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묘지가 부족하게 되었고, 이 고대 성곽을 기준으로 안쪽에는 산 사람들이 살고 바깥쪽에는 죽은 사람들이 묻혔다. 당시 성 밖은 '죽은 사람들의 도시'였다.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 받기 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로마 병사들을 피해 이 성 밖에서 몰래 집회를 가졌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들의 지하세계인 이 카타콤베(Catacombe)에 들어왔다. 그들은 로마병사들의 수색을 피하기 위해 땅속에 미로 같은 길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죽은 사람들의 장례까지 치렀다. 횃불을 들고 지하의 기독교인을 추격해 왔던 로마 병사들은 앞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우리는 사람의 인적이 드문 로마의 외곽 지역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과거 카타콤베를 왔을 때의 한적한 시골길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길 강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선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우리는 오늘의 지식 가이드를 따라 쏟아지는 햇빛을 피하며 10분 정도를 걸었다.

 

우리가 가는 카타콤베는 몇 년 전에 한참을 걸어서 찾아갔던 카타콤베 방향과는 어딘가 약간 방향이 달랐다. 이곳은 내가 전에 배낭여행 친구들과 길을 물어가며 찾아왔던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Catacombe di San Callisto)가 아니라 도미틸라 카타콤베(Catacombe Domitilla)였다. 나는 내가 가보지 못했던 카타콤베를 만나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지하묘지 카타콤베는 이탈리아 전국에 걸쳐서 분포하지만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곳은 역시 로마이다. 그리고 카타콤베 중에서 산 칼리스토 카타콤베와 더불어 가장 원형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 이 도미틸라 카타콤베이다. 도미틸라 카타콤베 주변에는 약 25개에 이르는 카타콤베가 있고 이들 카타콤베는 땅 속에서 무려 500km라는 믿기지 않는 길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카타콤베 입구의 야외 휴게실 벤치에 앉아 잠깐 다리를 쉬었다. 지식 가이드 아가씨가 정열의 목소리를 쏟아가며 카타콤베의 역사에 대해 정열의 목소리를 쏟았고 나는 젊은 아가씨의 열정에 감사하며 편하게 그 이야기들을 들었다.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벤치가 너무나 편했다.

 

우리는 카타콤베의 지하로 내려가는 건물로 들어섰다. 입장권을 사서 지하로 내려가려는데 카타콤베 관리인 아저씨가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 그의 말은 카타콤베의 동굴 속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몰래 몰래 사진을 많이 찍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카타콤베 관리인들이 엄격하게 규제하기도 하지만 어두운 지하묘지에서 사진이 잘 나오는 것도 힘들고 사진기 셔터를 누르면 플래시가 터지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것은 이미 포기했다.

 

이번 카타콤베 답사에서도 십몇 년 전에 내가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1990년대에 일본인 관광객 한 명이 길을 잃었고 한참 후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에 개별적으로 카타콤베 방문이 없어지고 반드시 가이드가 동행하도록 바뀌었고 지하 1층만 개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불신의 시대에 살았던 나는 이 이야기가 배낭족들 사이에 퍼진 유언비어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계단을 걸어 지하의 내부로 들어설수록 서늘한 청량제 같은 시원함이 온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카타콤베 지상의 찌는 듯한 로마의 날씨는 이미 남의 일이었다. 내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속 세계에 대한 기대와 함께 시원한 공기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현재 카타콤베는 지하 1층까지만 관람할 수 있고 그것도 일부 구간만 구경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카타콤베 지하 1층의 작은 예배당에 모였다. 지하에 만들어진 예배당임에도 불구하고 천장의 높이가 아주 높고 땅 속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지하묘지 입구 예배당의 신성함에 취해 있었다.

 

나는 바닥의 대리석 석재에 앉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리 앞으로 컴컴한 어둠의 세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해 관람로에는 길을 유도하는 전등불이 어둠 속의 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지정된 루트 이외의 길로 빠져 나가면 죽은 목숨이 되기 때문에 지하 묘지의 전등불은 생명을 인도하는 길이었다. 여행자들은 지하의 불빛만을 따라 계속 줄을 만들어 이동하고 있었다.

 

지정 관람로가 아닌 길은 굉장히 어두운 공포의 길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아득한 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저 길 위에 불빛 없이 나 홀로 남겨진다면? 아마도 내 몸은 공포 속에 타 들어갈 것이다. 내가 만약 어둠의 공포 속에 남겨진다면 나는 어둠 속에서도 생을 찾아 몸을 움직일지, 아니면 꼼짝 없이 죽음을 맞이할지 내 자신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지하묘지의 통로는 천장이 낮고 좁았다. 통로는 미로처럼 얽혀있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로였다. 카타콤베의 가이드는 목숨을 지켜주는 삶의 가이드이기도 했다. 아무리 전등불이 이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이드를 잘 따라가지 않으면 누구라도 길을 잃을 수 있었다. 걸음이 빠른 신영이가 갑자기 일행 중에 가장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순간, 아내는 위험하며 신영이를 심하게 나무랐다.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이어지는 지하묘지에서 몇 천 년 묵은 매캐한 냄새와 흙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손으로 흙을 만져보았더니 예상외로 흙은 얼음처럼 단단했다. 이 지하묘지의 흙은 주변의 습기를 흡수해서 더욱 단단해지는 흙이었다. 지하묘지에 시신을 묻고 이 땅의 흙을 덮어주면 흙이 시신에 남아있던 수분을 흡수해서 더 단단해지고, 시신 아래 부분의 흙도 단단해 진다고 한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한 시신을 묻은 묘의 밑을 파고 또 다른 시신을 묻었다. 서랍식으로 보이는 통로 벽변의 묘 중에서 위쪽에 묻힌 시신일수록 더 오래 전에 묻힌 시신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묘지가 계속 아래로 이어지면서 지하묘지에는 여러 층의 통로와 묘지가 만들어졌다.

 

통로 옆에 층을 이루는 벽면에는 수없이 많은 묘지 공간이 있었다. 어두운 묘지 공간 속으로 손을 넣어 보았다. 그 사이로 부드러운 먼지 같은 흙이 만져졌다. 이 흙 속에는 습기가 없고 서늘한 땅 속에서 그대로 부식되어 사그라진 기독교인들의 시신도 녹아 있을 것이다.

층을 이루는 벽면 공간의 묘지 중에는 아주 작은 공간의 묘지도 있었다. 어려서 죽은 아이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이다. 시신의 크기에 맞게 묘지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벽면의 묘지 공간 중 일부에는 석관이 놓여 있었던 흔적도 남아 있다. 로마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같이 세마포에 싸여서 이 지하 묘지 공간에 넣어졌다.

 

나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왜 이토록 묘지들이 통로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고 보니,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층을 이루는 묘지에는 묘의 뚜껑 역할을 하는 대리석 석판이 붙어 있었다. 이 석판 위에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암호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카타콤베 지상 입구의 벽면에서 보았던 석판이 묘지의 가림막 역할을 하던 석판의 관람용 복제품이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사용되었던 묘지 석판은 도굴꾼에 의해 사라졌고 이로 인해 벽면 묘지 공간은 대부분 휑하니 드러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벽면의 공간에 만들었던 지하묘지는 방과 같은 모양으로 크게 만들어지기도 했다. 한 방의 묘지는 한 기독교인 가족들의 묘로 사용되었다. 그들은 순교한 사람들도 있었고 기독교인으로서 자연사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 방들은 개미굴과 같은 미로를 통해서 여기저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하묘지의 방에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의 첫 글자 모음인 물고기(ΙΧΘΥΣ)등이 그려져 있었다. 그들의 믿음이 고대 문자로 표현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이 고대문자를 보면서 박해를 피해 이 땅속에 숨어들었던 기독교인들의 강렬했던 정신력과 맥박이 느껴지는 듯했다. 기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라도 그들의 고난에 가득 찬 삶에 경건한 감동을 느끼게 된다.

 

개미굴의 중간 중간에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던 공간이 남아 있다. 우리 가족과 오늘의 지식 가이드, 그리고 한국인 자유여행자들이 이 어두운 공간 속의 불빛 아래 모였다.

 

"어느 날, 내가 아는 가이드 한 분이 한국인 신혼여행팀을 데리고 이 카타콤베에 오게 되었지요. 하루 일정이 조금씩 늦어지던 신혼여행팀은 카타콤베 폐관시간 20분 전에 겨우 입장했어요. 그런데 인생을 약속했던 신혼여행팀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녀의 이야기는 생생한 사실이었다. 그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이 집회공간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전원이 나가면서 전구의 불빛이 모두 꺼져 버린 거예요. 주변은 말 그대로 칠흙 같이 어두워졌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의 길을 찾아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이었죠. 카타콤베에 수십 번 드나들었던 가이드도 어디로 나가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혼여행 온 신랑과 신부는 공포 속에 빠져 들었죠."

 

그런데 가이드 아가씨의 그 다음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카타콤베 입구의 관리인들이 뒤늦게 들어간 관광객들이 나오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전원의 스위치를 올렸죠. 그들이 지하의 예배공간에서 공포 속에 떨었던 시간이 약 20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20분의 시간 속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요. 그렇게 다정다감하던 신혼여행객들이 공포 속에서 좌절하더라는 겁니다. 그리고 싸우고. 입에 담지 못할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나는 어둠의 공포에 질린 그들이 어떤 말로 싸웠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인간 본성이 일생의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시간에 튀어나온 것이다. 그들이 나눈 말은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좀 해 봐. 괜히 너 때문에 허겁지겁 이곳에 들어왔다가 이 꼴이 되었잖아! 내가 여기 안 온다고 했잖아. 다 너 때문이야.'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그런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너 조용히 못 할래, 이 xxx이'

 

갑자기 공포의 지하세계에 전등불이 다시 들어왔다. 그들은 어떤 표정이었을까? 이 믿음의 공간 속에서 서로 손을 맞잡은 신랑, 신부가 서로를 위로하며 상대를 감쌌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들은 평생 기념할 축복이 되었을 시간을 욕설 속에 날려버렸다.

 

우리는 한참 동안 지하묘지 속을 걸었다. 그곳은 인간의 세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밖의 지상세계로 올라왔다. 바깥세상은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대명천지였다. 나는 놀라운 경험을 한 것보다도 내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하늘에 감사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탈리아, #로마, #카타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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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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