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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들판치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눈이 내리고 난 뒤의 들판에서는 외길 따라 길게 이어진 전봇대조차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한쪽 어깨가 폭삭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조차 색다른 풍경으로 되살아난다. 눈에는 그처럼 인간이 만든 조악한 조형물조차 예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인간들이 무절제하게 벌여놓은 '개발:새발'의 흔적을 살짝 덮어 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의 세상은 도대체 얼마나 더 아름다웠을까.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풍경 중에 하나 역시, 눈 내린 날의 들판 한가운데 있다.

 

1980년대 중반, 나는 생애 가장 험준한 고비를 넘고 있었다. 방황 끝에 군에 입대한 그 해 11월 초, 신병훈련소에서 첫눈을 맞았다. 훈련을 받기 시작한 지, 겨우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전엔 첫눈이 그렇게 일찍 내리는 건 줄도 모르고 살았다. 그리고 11월이 그렇게 추운 달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루 24시간 엄격한 통제 아래 놓여 있던 그 시간, 연병장 한 구석에 서서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올려다보던 나는 내겐 눈송이가 가진 무게조차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나는 한없이 미약한 존재였다. 그때부터 하루 종일 눈밭에 뒹굴다 못해 한밤중 비상 소리에 놀라 깨어 일어나 맨살에 얼음찜질을 해야 하는 훈련소 생활이 시작됐다.

 

그런 혹독한 훈련 끝에 경기도의 한 부대에 배치된 게 12월 중순. 중대 행정병으로 이등병 생활을 시작한 지 역시 3일째 되던 날, 동계혹한훈련 중의 하나로 천리행군을 떠났다. 민간인 시절엔 듣도 보도 못한 훈련이었다. 내무반에 들어서자마자 천리행군이 어떤 것인지, 천리행군을 무사히 마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그 교육의 절반이 행군에서 낙오하면 그날로 군대 생활 종친 걸로 생각하라는 엄포와 호령이었다. 천리행군은 3일 밤과 낮을 잠 한숨 자지 않고 내쳐 걸어서, 부대 반경 수십km 지역을 돌고 돌아 다시 부대로 되돌아오는 훈련이었다. 고참들은 부대에 갓 들어온 졸병이 그 훈련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천리행군을 떠나던 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부대를 떠났다. 나는 그때까지도 3일 밤낮을 자지 않고 걷는다는 게 어떤 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첫날은 훈련소 군기로 겨우 버텼다. 하루 종일 눈길을 걷는데 그 길이 그 길 같았고, 자칫 행군에서 뒤처질까 겁이 나 주변 경치 따위 살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눈을 팔다간 눈길 위에 나자빠지는 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오로지 앞선 병사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행군 24시간째 되던 다음 날 새벽,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건 나만 그런 게 아니어서 여기저기 대열에서 벗어나 느닷없이 길가 고랑에 처박히거나, 도로 한가운데로 스르르 걸어 나가 몽유병 환자처럼 제멋대로 걷기 시작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그때마다 뒤에 서서 걷던 고참이 앞선 졸병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텅텅 철모를 후려치는 소리가 싸늘한 밤공기를 가르며 들려왔다. 이를 악물고 버틴다고 하지만 나 역시 반쯤 감긴 눈으로 걷고 있었는데, 용케 대열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3일째 되던 날 새벽, 어디를 걷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은 몽롱하고, 몸뚱이는 말미잘처럼 흐느적거렸다. 쓰러지면 두 번 다시 일어서지 못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곳, 경기도의 어느 후미진 마을이라는 것 외에 특별한 것이라고는 달리 눈 씻고 봐도 없는 그런 평범한 마을들 중에 하나였을, 그런 곳에서 나는 환각에 빠진 듯 환상에 젖은 듯 미칠 듯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다. 그때 이미 나는 기계처럼 걷고 있었고, 다만 두 눈만 살아 지척을 분간하고 대열을 유지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길은 3일째 계속되는 그 길, 눈길이었다. 그때까지 앞서 밟아온 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같은 상태에, 그런 곳에서 어쩌다, 그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는지는 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동이 터오기 직전, 푸르스름한 대기 아래 뽀얀 살결을 드러내듯 눈앞에 펼쳐져 있는 그것은 분명 눈 덮인 하얀 길이었다. 그 길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고요한 들길을 깨우며 규칙적으로 옮겨 딛는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그 길을 내가, 이틀 밤을 잠 한숨 못자고 버텨온 내가 마치 꿈을 꾸듯 걷고 있었다. 내 두 눈은 필시 빨간 핏발로 가득 차 있고, 내 두 발은 한쪽으로 밀린 살 때문에 물집이 가득 잡혀 있었는데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는 따뜻했고 눈 덮인 길은 한없이 고와서, 그 모두가 하루종일 볕을 쪼인 솜이불처럼 부드러웠다. 어쩌면 나는 너무 지친 나머지 그냥 그 길 위에 포근히 드러눕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계속 걸었고, 길은 점점 더 강렬한 빛으로 일어서 마침내 내 망막에 지울 수 없는 화인을 남겼다. 아마도 나는 그때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 건지 조금 더 많이 깨달았던 것 같다.

 

그날 해가 질 무렵 드디어 부대 뒷산의 산길로 접어들었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이 이미 앞서 간 병사들의 발길로 빙판처럼 단단하게 다져져 있었다. 미끄러지거나 헛디디면 바로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져야 하는 길이라 매우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미 눈 덮인 길의 미학에 빠진 나는 그 길마저 황홀한 기운에 휩싸여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부대 안에서는 이번 훈련에 빠진 내무반 말년 병장이 졸병들의 무사 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병장은 무사히 돌아온 졸병들을 반기면서, 자신이 졸병들을 위해 돼지두부찌개를 끓여놓은 것을 자랑했다. 마침 맛난 저녁 식사를 고대했던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찌개를 냄새조차 맡지 못했다. 중대 본부에 들러 몇 가지 행정적인 업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찌개는 양동이째 사라지고 없었다. 중대 인사계(상사)가 이게 웬 떡이냐며 당신들 술안주로 접수해 가신 뒤였다. 병장은 "개새끼 제대하면 그 날로 죽여 버린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고, 졸병들은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거들지 못한 채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그 날 이후로, 물론 이미 예정돼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내 군대 생활은 급격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겪었던 일 그 무엇 하나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고 해서 그때 천리 눈 길 위에 펼쳐졌던 그 아름다웠던 기억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27개월 군 생활 동안의 어두웠던 기억 속에서도 그 여행은 여전히 내 의식의 밝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그 길이 그리워, 다시 한 번 더 그 길을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길이 어디쯤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시 행군 중에 지나쳤던 큰 도로와 도시는 대충 어디가 어딘지 기억에 남아 있지만, 그 기억의 한편에 자리 잡은 눈 덮인 오솔길은 설령 그 이름을 안다 해도 다시 찾아가기 어려운 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내가 그 길을 찾아낸다 해도, 두 번 다시 그때 그 풍경에 젖어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내 스무 살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그처럼 가혹한 군대 생활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지금의 내 감성이란 게 그때 그 시절을 절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무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그때 그 길이 그립다.

 

용문역에서 용문사까지

 

얼마 전(23일), 경기도 덕소와 양평을 지나 용문까지 들어가는 전철이 개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전철에 몸을 실었다. 용문은 내가 근무했던 부대에 근접한 곳이다. 용문이 당시 천리행군에 포함되었던 지역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곳 어딘가 눈 덮인 길 위에서 내가 걸었던 길의 흔적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다. 사실 눈 덮인 길이란 게 굳이 어느 특별한 장소일 필요는 없었다.

 

전철 안은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일요일 아침나절이라 절반이 등산객이었고, 또 다른 절반이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아 나선 노인들이었다. 모두들 새로 전철을 개통했다는 소식에 가벼운 호기심을 안고 있었다.

 

용문역사는 다소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역 근처에 아직 흙투성이 들판이 질펀하고, 낡고 키 낮은 건물들이 가득한데, 저 혼자 높고 단단한 돌무더기를 반들반들하게 쌓아올린 꼴이어서 조금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 낯선 역사를 나서서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여행객들을 지역 주민들 역시 낯선 표정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역사를 벗어나 큰 길을 가로질러 마을 뒤편 개천이 흐르는 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다행히 천변 위로 눈 덮인 산책로가 있었다. 이 땅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산책로였다. 번잡하지 않아서 좋았다. 날이 추워서인지, 산책을 나온 주민들이 몇 되지 않았고, 자동차 소음보다는 동네 안쪽 길 개짓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서 정겨웠다. 물론 이 길이 그때 그 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때 내가 걸었던 길 중에 그와 비슷한 길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눈 덮인 길은 어디나 다 아름다우니, 굳이 똑같은 길이 아니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산책로에 이어 마을 안길을 조금 더 걸은 뒤에는, 용문버스터미널을 찾아가 용문사까지 운행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해서 용문사 일주문에 들어섰을 땐, 어서 오라는 듯 머리 위로 점점이 눈이 내렸다. 그 눈이 절 마당에 들어섰을 땐, 천지를 가득 메운 희뿌연 눈발로 변해 더 이상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초 용문사에서 상원사를 거쳐 연수천계곡을 따라 내려오려던 계획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그렇게 눈 속 산사, 갑자기 세속의 발길이 끊어진 그곳, 대웅전 앞에 길 잃은 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대로 눈을 맞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언제 그칠지 알 수 없는 눈발 너머, 눈 내려 쌓이는 비탈길을 건너다보고는 어리석게도 눈을 맞으며 돌아갈 길을 앞서서 걱정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 눈 내린 들길과 산길을 밤새워 걷던 날의 기상은 다 어디로 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두 배는 더 북적였다. 느닷없이 쏟아진 눈으로 일제히 하산을 서두른 등산객들이 전철 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들 모두 산 기운을 듬뿍 받아서인지 시끌벅적 호방한 모습이었다. 큰 소리가 서로를 자극했던지 급기야 전철 안에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호연지기에 약간의 취기를 뒤섞은 상태, 사소한 실랑이 끝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싸우려는 자와 뜯어말리려는 자들이 삽시간에 한 덩어리가 되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꼴이라니, 그 시간 그 장소가 아니었더라면 그 역시 정말이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서울도 갑자기 내린 눈으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철역을 빠져나와 도로 위로 발을 내려놓으려다 움찔했다. 아스팔트를 가득 덮은 검고 질척한 눈, 그것은 이미 눈이 아니었다. 땅에 떨어지는 순간, 오가는 차와 사람들의 발길로 짓이겨지고, 땅 위의 온갖 이물질들과 뒤섞인 채, 이미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미끌미끌 더러운 오물로 변해 있었다. 도로건 인도건,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용문행으로 잘 씻은 이 두 발을 다시 이 더러운 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하나.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은 그 검은 길을 따라 난 길 중간에 있었고, 저녁 식사를 거른 내 위장은 뱃속에서 발톱을 치켜세운 채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길 위에 다시 내 두 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간단한 여행 메모

용문행 전철은 용산역(중앙선)에서 출발해 회기역(환승역) 등을 거쳐 간다. 회기역에서 용문역까지 약 1시간 정도 걸렸다. 주말에는 30분 단위로 열차가 운행됨으로 사전에 시간을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용문사를 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용문역사 앞 곧게 난 길을 따라 올라오다 사거리 왼쪽에 위치한 버스 터미널로 가면 된다. 버스 카드로 환승이 가능하므로 매표소에서 굳이 표를 사지 않아도 된다. 길음역에서 용문사까지 전철과 버스 요금 모두 합쳐 편도 2400원이 찍혔다.

 

용문역 바로 옆에 '볼랫길'이라는 이름의 도보여행길(약 6km)이 있다.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용문사 가기 전에 그 길을 먼저 걸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볼랫길은 용문역 3번 출구로 나가, 용문양묘사업소로 이어지는 길을 찾으면 된다.

 

열차에 자전거를 갖고 타는 것이 가능하다. 열차 양쪽 끝칸에 싣는다. 다만 평일 출퇴근 시간인 오전 7시에서 10시, 오후 5시에서 8시까지는 탑승을 금하고, 어느 요일이든 탑승객이 많은 용산역이나 청량리역, 회기역 등에서는 탑승을 자제해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태그:#용문, #용문사, #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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