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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의 무법지대>라는 일본 만화가 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과잉 업무에 철야를 밥 먹듯이 하는, 파칭코 회사에 다니는 모모코의 이야기를 다룬 책인데요. 사회 초년생인 모모코에게 회사 생활은 수많은 업무 실수와 야근의 연속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던 바람과는 달리 그녀가 취직한 회사는 파칭코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였던 것입니다.

 

모모코는 "내가 왜 여기 있는거지?"라는 물음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좌충우돌 회사에 적응해가면서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일에서도 나름 보람을 느끼며 생활하게 됩니다. 만화 속 다른 내용은 몰라도, 멍 때리다가 업무 실수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출판사에서 근무한 지 1년 반이 되는 사회 초년생입니다. 몇 개월 전에 정말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업무상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에 대한 고민없이 출판사에 들어가다

 

모모코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꿈이 있듯이, 저에게도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취직을 했지요. 두어 군데 직장을 전전하다 들어온 곳이 지금의 출판사입니다.

 

회사 일에 정을 붙이기 쉽지 않아 잦은 실수가 많았는데, 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어 상사와의 관계에 벽까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제가 일하고 있는 직업인 '편집자'에 대한 고민이었지요.

 

편집자들은 비록 다른 업종보다 적은 보수를 받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오탈자 여부는 물론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줄 간격, 텍스트의 내용 오류와 숫자의 진위 여부를 하나부터 열까지 대조하는 끈기 등등 일에 임하는 그들의 끈질기고 꼼꼼한 자세는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완벽하게 일하는 게 가능하냐'라고 속으로 물렁하게 생각하며 일했던 저한테 편집자들의 존재는 '외계인' 같았지요(그 사람들에게는 제가 외계인이었을 겁니다;;). 억지로 자리에 앉아 일을 하면서 집중력도 떨어지던 일상이 반복되던 중에, 그만 빵! 하고 사고가 터졌습니다.

 

총 960여 페이지 분량의 원고 교정을 맡았던 때였습니다. 이전까지 너무 문법적인 틀에 맞춰서 교정을 보던 저에게 상사는 '너무 딱딱하게 교정보지 말고 번역자의 문체를 살려서 봐 달라'라는 말을 했고, 저는 그 말을 생각하면서 원고 교정에 들어갔습니다. 편집자가 자기 식으로 문장을 전부 뜯어고치는 것은 창작자가 자기 작품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은 나중에 편집자 관련 학원 수업을 듣고 난 다음 알게 됩니다. 그때는 그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이니까, 문장을 마구 뜯어고치면 안 된다는 판단하에 웬만한 문장들은 그냥 넘어갔지요.

 

저자의 창작품 존중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 원고의 문장들은 하나 같이 한글 문장으로써는 너무나 어색한 표현으로 가득한 직역투 문장이어서 그대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원고였다는 것을. 흐트러진 집중력과 원고를 보는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습니다.

 

결국 초교를 거쳐 2교를 보는데 상사가 작업물을 가져가 확인한 후 얼굴이 굳어지고는 "이대로는 책을 낼수 없다"며 회사 외부로 리뷰를 내보냈습니다. 외부로 나간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제 직속 선배가 훑어보았습니다.

 

통일 안 된 고유명사 표기, 읽는 도중 등장하는 어색한 문장 등 교정 상태가 한심한 원고였지요. 그전에 상사가 물어볼 때는 혼나는 게 싫어서 자꾸 숨기기만 급급했던 업무 상황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첫 교정을 시작했을 때 원고의 문장 상태가 나쁘다는 것을 바로 보고했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면 엄청난 분량에 전문 지식까지 모자란 내 능력을 솔직히 고백하고 도움이라도 청했어야 할 것을. 게다가 마감 기한을 열흘이나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알던 시한보다 열흘이나 당겨진 상황! 이리하여 960페이지 분량의 원고 마감을 향한 '헐랭하고 어리버리 회사원 이 모양'의 하루 걸러 밤을 새는 2주일이 시작되었습니다.

 

혼자 매킨토시 컴퓨터를 붙잡고 밤을 새다가 너무 졸려 사무실 맨바닥에 쓰러져 자면, 경비 아저씨가 이불을 가져다주고는 아침 식사로 사발면까지 주시고 커피 마시겠냐며 물어봐주셨지요. 밤샘까지 가지 않는 건 그나마 잠이나마 집에서 잘 수 있고 씻을 수 있어서 좀 나았습니다.

 

많이 깨지고 많이 배웠습니다. 결국 결과물은 엉망이었지만 여차저차하여 기한을 이틀 넘기고 마감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 이때만큼 일에 대해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회사라는 시스템 자체가 불합리한 부분이 있어 업무 사고에 대해 저만 잘못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담당자인 제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어야 했으니까요.

 

대학 때까지 혼자 글 끄적거리고 그림 그리는 것만 좋아했지 사회성 기를 기회가 없다 보니 타인과 맞춰가며 업무상 의사소통을 하는 과정이 다른 사람들보다 어렵게 느껴졌고요. 하지만 회사란 학교처럼 그런 걸 다 봐주는 곳은 아니지요. 회사에서 더욱더 움츠러들어 의사표현조차 제대로 안 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맡아도 속으로 숨기기만 할뿐, 게다가 자꾸 감정이 상하다보니 일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윗 선배는 회사 생활에서 자꾸 부딪히는 제게 "좀 더 맞는 일을 찾아보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습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참 모르겠습니다. 맞는 일이란 게 있긴 있는 건지;;) 또 다른 선배는 "그래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라고 해주었고요. 하지만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시도하면 예전 업무상의 실수가 발견되어 자꾸 트러블이 생기고 저는 더욱더 의기소침해져 버립니다.

 

지금은 한동안 큰소리 오갈 일이 없어 어느 정도는 상사와 대화를 나누는 상태지만 제가 또 뭔가 큰 실수를 저지른다면 더는 용납할 수 없는 정도까지 사이의 골이 깊어질지 모릅니다.

 

대책없이 부딪혀도 나는 간다

 

요새 이런 저런 고민을 많이 합니다. 특히 제가 하는 일의 특성이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직업적인 정체성을 강하게 요구하다 보니, 직업인인 내가 먼저인지 그저 한 개인인 내가 먼저인지 자꾸 고민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편집자였나요"라고 물어보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직업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인 그들을 보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저의 경우 무작정 찾아 일을 시작했습니다만, "이 직업이 아니면 안 돼!"라며 전력을 다하는 그들의 마음가짐은 그 깊이도 절박함도, 나름 사회 생활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지요. 입사 전 편집자 입문 강의를 들었는데도 실제로 부딪혀서야 깨달았습니다. 편집자가 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 일을 하기 위해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를.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회적으로 각성할 만한 여러 이슈를 접해왔고 어떻게든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이 있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직업군 중에 '편집자'라는 게 있다는 것. 내가 책을 좋아하긴 한다는 것(책이 한껏 어질러진 제 방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아마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고 이 일을 계속할 수도 있고 선택은 여러 가지일 겁니다.

 

제 길이 어디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사회에서 좀더 당당해지고자 자기 계발을 위한 여러 공부를 하는 중입니다. 그때의 실수를 통해서 일에 대한 절박함을 느끼게 된 까닭도 있고요. "굳이 목표점이 어딘지 알 필요 있나, 일단 해보면 뭔가 답이 나오겠지"라는 심정으로 대책 없이 부딪히는 겁니다.

 

자신이 어리석으면 어리석은 대로, 굳이 내 인생의 답을 모르는데 아는 것처럼 허세부릴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빠릿빠릿한 알파걸이 못 되어 아쉽지만, 그저 서투름을 인정하고 삶을 살아낼 뿐입니다.


태그:#사고,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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