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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람이 차가운데도 오래된 책들은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며 2층 서재와 거실까지 눈에 띄는 곳마다 자리를 하고 있다. 살아온 생애만큼이나 빛바랜 책들은 그래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손 때 묻은 음악과 함께 방안을 가득 채운다.

1958년 목포여고 교사를 시작으로 목포교대와 전남대 명예교수로 교단을 떠나기까지 40여 년간 지내온 흔적들을 한 눈에 본다. 팔순이 된 나이에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며 그의 천직인 시 창작과 글쓰기는 여전히 멈추지 않은 채 펜 끝을 따라 꿈틀거리고 있다. 버릇처럼 움직이는 이러한 '자위'를 이제는 쉴 때가 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카타르시스를 향하고 있다.

팔순 넘어서도 시 쓰고 무등산 오르는 열정

▲ 팔순에 무등산 100번 오르기 범대순 교수 범대순 전남대 명예교수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며 오래 지니고 싶은 일들을 찾아 끊임없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범대순
계림동 E마트 뒷길(소방도로)을 따라 100여m 정도 따라가면 약간 언덕배기 위에 높은 은행나무가 있는 2층 양옥집이 보인다. 범대순 교수가 처음 찾아오는 필자에게 핸드폰 너머로 알려준 길잡이다. 근방에 도착해서 올라가는 길이라 전화 드렸더니 금세 길목까지 나와 고향집 찾아오는 자식을 반기는 듯 웃으시며 기다린다.

삐걱거리는 파란 철대문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섰지만 알루미늄 현관문이 바람에 제대로 닫히지 않는다. 두툼하게 옷을 껴입고 모자까지 쓴 범 교수의 모습은 촌로의 다정함이 묻어나온다.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차 한 잔 들라"며 이내 아내에게 부탁한다. 잣이 둥둥 떠 있는 한차와 귤이 나오고 현관문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은 갈 길을 잃은 듯 집안을 휘돈다.

"우리 내외만 살고 있어 단출한데도 겨울이면 난방비가 꽤 든다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특별하게 찬바람 때문에 귀찮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2층 거실 벽에 붙어있는 벽걸이 에어컨이 오히려 더 춥게 느껴진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범 교수가 경쾌한 클래식을 틀자 추운 느낌은 사라지고 재미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요즘 어떤 재미로 사시느냐고 여쭈었다. 나이 먹을수록 의식이 앞서고 행동이 약해져 생각대로 세운 일들이 자꾸 뒤로 미뤄지는 경향이 있단다. 그래서 우선 건강을 지킬 요량으로 자연친화적이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무등산을 찾는다.

나이 일흔이 되니 수염을 길러 나이에 도전하고 이제 팔순이 되니 2010년까지 무등산 서석대를 백 번 올라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벌써 40회 등정을 마쳤는데 주위에서 늘 조심하라는 권고를 한단다. 주위에서 늘 조심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어 무리하게는 오르지 않을 생각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일은 2010년에 시집 한권과 에세이집 1권을 발간한다는 것이다. 사실 팔순 기념으로 올해(2009) 발간하자는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남들이 다하는 팔순기념문집을 차라리 비켜서 내는 것도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팔순기념 문집들을 문학인들마다 다 내니까 너무 많지 않아요. 넘쳐나는 것 같아서 난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평소에 때가 되면 발간한다는 생각이라오."

이번에는 별로 두껍지도 않게 누구든 쉽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는 소품들로 50여 편을 준비한 시집과 300쪽 분량의 에세이집을 준비했다. 그리고 또 시집 한 두 권과 에세이집 한 권을 낼 만한 글이 남아 있어 이는 내후 년쯤 발간할 계획이라고 덧붙인다.

그동안 발간한 책으로는 첫 시집 <흑인고수 루이의 북>(시사영어사, 1965)을 시작으로 12권의 시집과 3권의 평론집, 2권의 영시 연구, 3권의 영시 역서, 3권의 에세이, 1권의 서간집, 1권의 일기초 등등 무려 25권에 이른다. 그래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다 보니 벌써 30권쯤 발간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1998년 8월부터 지금까지 11년이 넘도록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남도일보에 <범대순 세상보기>를 연재하여 삶의 궤적에서 묻어나오는 경륜으로 사회변화를 읽어나가는 열정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바쁘게 움직여야 살아 있다는 생각도 들고 외롭지도 않다는 것이다.

남들은 나이 먹어서 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범 교수는 서울에서 열리는 영어영문학회와 광주를 중심으로 한 21세기영어영문학회 등 학회에 가능한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또 학회에서는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일이 즐거워서 사전에 준비하고 가서 후배들에게 한 마디씩 해주는 일이 즐겁다.

그리고 대학 특강이나 박사학위 논문 심사, 시인들의 모임 등 자신에게 역할이 주어진 일들이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찾아오기 때문에 스스로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내에 나갈 때면 반드시 책방에 들러 신간들을 구경하다 보면 하루 시간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이기도 하다.

감동과 흥분을 뛰어넘어 영원이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그의 시가 변함없이 관심을 받았던 것은 새로운 사유와 실험정신으로 시의 내용과 형식에 도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욕이 지나칠 정도여서 기계와 문명, 사회의 온갖 문제들에 대한 참여와 비판의식이 충일되었다. 서정시가 아니라 강렬한 사회시적인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하늘의 전천후를 흔드는 분노에 대하여 분노할 시간은 남아 있다'('아직도 분노할 시간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사회현실에 대한 비평적인 인목을 보여주는 그의 시에는 건조하고 단단한 언어의 사용이 눈에 띈다. 때때로 시적인 절약이나 함축과는 거리가 먼 산문적인 부연을 볼 수도 있다. <연가 1>에서 따뜻한 어버이의 정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으며, <6․25>에서는 설화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범 교수는 습관처럼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2층 거실에 홀로 앉아 음악을 들으며 시를 쓴다. 음악은 자신의 시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매체이다. 그래서 '나는 부글부글 용소같이 속이 미친/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라며, 디오니소스의 광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동방문학 47호(2009.12~2010.1)에 실린 <가을이 가을인 것은>에서는 '억새마을의 중봉 그 고삿을 지나'서 다가오는 '북극에 하얀 새끼 곰이 굶고', '남태평양 조용히 가라앉는 섬들'에 대한 지구온난화의 현실을 담고 '더운 모래의 나라 폭탄을 들고 달리는 소년의 꿈'을 이 세계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에 대한 경종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몇 번을 읽어도 가슴 저린 감동으로 슬금슬금 살아나는 <국화꽃이 피는데>는 서정주의 <국화꽃 옆에서>에 대한 대답으로 들린다.

국화꽃이 피는데
하늘이 저토록
높고 푸른 까닭이 있었다.

황량한 들 차고 모지게
바람이 부는 까닭이 있었다.
철이 아니게 눈이 내리는 까닭이 있었다.

국화꽃이 피는데
깊은 밤 어디선가
새도록 현금(玄琴)이 우는 까닭이 있었다.

국화꽃이 피는데
그리운 사람이여
내내 당신이 오지 않은 까닭이 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일이 무서워지지도 않고 오히려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어요. 다만 행동이 제대로 따라가질 않아 말썽이지요. 왜냐하면 나이가 들면 어떤 일들에 대한 감동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그래서 큰 일이 생겨도 별로 흥분도 나지 않고 순간보다는 영원이라는 느낌이 나를 감싸고 있지요."

요즘은 버리지 않을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하고 가급적 오래 지니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는 것이라 한다. 아마도 긴 시간을 자신에게 접목시키는 시상을 간직하면서 자신과 시를 합류하려는 합일의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시작업은 예전보다 훨씬 차분해졌다. 젊은 작가들은 산문시를 즐겨 하는데 범 교수는 산문시로부터 벗어나 언어의 정치함을 찾고 몇 번이고 읽으며 생각을 하는 정통적인 '시다운 시'를 쓰고 있다고 한다.

약력
1930년 6월 16일 광주 북구 우치동 신촌에서 한시인(漢詩人)인 부친 취강(翠崗} 범윤중(范潤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촌에서 3년간 모친과 같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네 살 때 광주시 북구 용강동 하신마을 부친의 농장 거처로 옮겨 이후 1954년까지 20년 동안 그 강변 마을에서 살았다. 1957년 고려대 영문학과, 1979년 고려대에서 'Stephen Spender의 시에 나타난 I'로 석사학위를 받고, 1986년 전북대에서 'Auden Generation의 시에 나타난  정치적 관심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8월 전남대를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로 있다.

[원탁시] 동인이며 전남도문화상(1971), 미국 Denison대 Macneill시문학상(1981), 미국 Ohio Denison대 MacNeill 시 창작상 및 동 영문학과 Essay 상(1981), 제4회 금호학술상(1987), 국민훈장 동백장(1994), 광주시민대상 '예술부문'(1996), 제29회 한국시인협회상(1997), 문예한국 대상(2002) 등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회보 <고향사랑>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범대순, #디오니소스, #국화꽃, #무등산, #영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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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무등일보에서 경제부장, 문화부장, 정치부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시민의소리에서 편집국장도 했다. 늘 글쓰기를 좋아해서 글을 안쓰면 손가락이 떨 정도다. 지금은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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