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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영의 마지막 자존심인가, 단순한 모양 갖추기인가.

 

엄기영 MBC 사장은 15일 아침 8시 서울 태평로의 한 호텔 앞에서 자신의 유임 결정 이후 새로 짜일 신임 이사 인선을 위한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긴급이사회에 앞서 노조원들과 대치했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이근행 본부장은 이사회 참석을 위해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엄 사장을 붙들고 "(김우룡 방문진 이사장으로부터) 밤새 무엇을 요구 받았냐"고 다그쳤고, 엄 사장은 "(요구를) 다 뿌리쳤다"고 말했다. 책임을 통감하고 있고, MBC 사장으로서 책무를 다하겠다는 말도 건넸다.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러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말 끝에 MBC본부는 엄 사장에게 길을 터줬다. 엄 사장은 약 5분간 노조와 실랑이를 한 후에야 회의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엄기영, 전날 협의 뒤엎고 새 명단 제시"

 

이날 엄 사장은 전날 자정까지 김우룡 방문진 이사장과 협의한 4개 본부장(보도, 제작, 편성, 경영) 명단을 이사들에게 공개하고, 선정이유 등을 설명한 뒤 의결절차를 밟아 임시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는 무산됐다.

 

차기환 방문진 대변인에 따르면, 엄 사장은 김 이사장과 협의한 후보명단을 바꾸고 새 안을 들고 왔다. 전날 자정까지 김우룡 이사장과 협의한 내용을 뒤집어엎었다는 것이다. 

 

차 대변인은 15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어젯밤(14일) 늦게까지 엄 사장과 김 이사장이 협의한 결과 단일안에 이르렀고 엄 사장의 의견이 상당 부분 수용됐으나, 오늘 엄 사장이 다시 새로운 안을 제시해 단일안이 마련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엄 사장이 전날 협의한 후보 명단의 상당 부분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해서 단일안 마련이 무산됐다는 설명이다. 차 대변인은 여당 측 이사들이 불만을 품을 만한 인사까지도 김 이사장이 수용했는데 엄 사장이 다시 협의안을 거부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김우룡 이사장 역시 전날 협의한 내용과 달리 엄 사장이 새로운 후보명단을 제시한 데 대해 불쾌해했다는 후문이다.

 

엄기영의 새 카드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이에 따라 엄 사장이 김 이사장에게 새롭게 내민 카드가 어떤 인물들로 구성돼 있느냐에 촉각이 곤두선다. 엄 사장이 김우룡 이사장의 '김심'과는 관계없는 개혁적인 인물들로 새 명단을 채웠는지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다.

 

이에 대해 MBC 안팎에서는 엄 사장이 개혁적인 인물을 기용했을 리 없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이번 인사에서 엄 사장이 평소 MBC 내부에서 개혁파로 알려진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웠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엄 사장에게서 이명박 정권의 언론정책에 맞설 '언론운동가'의 면모를 찾기는 어려우며, 그 점에서 정연주 전 KBS 사장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진단이다.

 

따라서 엄 사장이 일종의 '모양 갖추기' 형태로, 김 이사장과 협의한 내용을 뒤엎고 새 안을 밀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MBC의 한 관계자는 "엄 사장도 30년간 MBC에서 일한 기자 출신이고 방문진이 유례없이 지나치게 경영진 인사에 개입한다고 판단하면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냐"며 "보도본부장 정도는 자기 사람을 심고 싶어서 버티기를 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전국언론노조 MBC본부의 한 관계자도 "MBC 내부에 엄 사장이 새롭게 내밀 마땅한 카드가 없다"면서 "제출키로 한 1안과 2안 중 복수 후보의 순위를 바꾸는 정도로 다시 냈다는 설도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현재 엄 사장이 새로 내민 카드를 두고 김우룡 이사장과 협의는 계속한다는 게 방문진 이사들의 설명이다. 엄 사장이 복수로 추천한 4개 본부장 후보들을 놓고 김 이사장과 줄다리기를 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방문진의 한 이사는 "김 이사장이 미는 후보군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엄 사장이 관철하려는 후보군이 있을 텐데 양자 간 협의로 이를 절충하는 것밖에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면서 "합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방문진 이사들은 의견을 같이했다"고 전했다.

 

또한 무엇보다 연말에 방송국이 바쁘기 때문에 공석 없이 일이 진행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한다는 점에도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방문진 이사회를 재소집하며, 엄 사장과 김 이사장이 합의한 내용을 공개하고 필요하다면 표결절차도 밟겠다는 설명이다.  

 

MBC노조 "정권의 사생아일 후임 이사진 인정 못한다"

 

한편, MBC본부는 엄 사장의 새로운 카드와 김 이사장과 협의한 내용 모두 MBC에 대한 방문진의 '방송 섭정'으로 간주하고 투쟁을 멈추지 않을 방침임을 밝혔다.

 

MBC 사장의 인사권은 공영방송의 독립성 보장 차원에서 존중돼왔는데, 김우룡 이사장 등 8기 방문진 이사회가 구성된 후 이를 지나치게 간섭받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MBC본부는 'MB정권이 MBC도 KBS처럼 정권의 나팔수로 만들기 위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음이 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고 개탄했다.  

 

이들은 15일 오후 발표한 성명을 통해 "당초 엄기영 사장은 오늘 오전 이사회에서 김우룡과 이른바 '자정까지 협의한' 인물들을 후임 인사로 추천하기로 했었는데 엄 사장이 그 협의안을 뒤집는 바람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공영방송의 독립성 보장 차원에서 존중되어온 사장의 인사권을 놓고, 대체 무엇을 협의하고 무엇을 합의했다는 건지 알 수 없다"고 질타했다.

 

또한 이들은 "정권의 보은인사로 방문진 이사장 자리를 꿰찬 김우룡에게 인정 받은 인물들이라면 밀실에서 정권에 충성 서약을 하고, 공영방송 MBC 직할 통치의 첨병으로 나서게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며 "후임 이사들은 정권의 사생아"라고 힐난했다.

 

이들은 엄 사장이 김우룡 이사장을 만나기 전 "내가 생각한 대로 인사를 관철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MBC 구성원은 없다고 못 박고 "정권의 하수인인 방문진이 자행하는 모든 불순한 음모를 분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MBC 경영진 전원의 사퇴서를 김우룡 이사장에게 건네고 비굴하게 생명을 연장받은 엄기영 사장은 무기력하게 굴복함으로써 '식물 사장'이라는 오명을 얻게 됐다"면서 "공영방송을 이끌어갈 경영진으로 후임 이사진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태그:#전국언론노조 MBC본부, #엄기영, #이근행, #보도본부장, #김우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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