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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전국 어디를 가나 볼 것이 많다. 우리나라 문화재 중 85% 정도가 불교유적이라고 할 만큼, 불교문화재는 우리나라 문화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길을 가다가 고찰 등이 있으면 꼭 들러가는 것도 그런 이유다. 또 예전에 들렀던 곳이라고 해도, 그 앞을 지날 때는 다시 한 번 들러본다.

 

가끔은 문화재가 색다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광주군 유정리 석불은 몇 년 만에 찾아갔더니, 흰 회칠을 하고 붉은 입술을 그려놓는 등 제 모습을 잃어버리기도 해 마음이 아팠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재 답사를 하러 전국을 다니면서 느끼는 것은, 문화재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기회만 있으면 답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고려시대의 석불 포초골 미륵좌상

 

여주군 금사면 외평리 454번지에 소재한 대성사(大成寺. 주지 최학산) 경내에 위치하고 있는 미륵좌상은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5호이다. 이 석불상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로 사각형의 보개석을 쓰고 있는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대좌는 상, 중, 하대를 갖춘 8각 대좌로 중대석에 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높이 2.48m, 어깨 넓이 1.8m 정도의 포초골 미륵불은 소발의 머리 위에 3단으로 꾸민 4각형의 갓을 얹어 놓았다. 한편이 떨어져 나간 이 보개석은 고려시대 석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다. 포초골 미륵좌상은 그저 바라다만 보고 있어도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모습이다.

 

둥근 얼굴에 조금은 감은 듯한 눈, 그리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듯한 입과 목에 뚜렷한 삼도가 있다. 넓은 어깨는 통견이 좌우로 흘러내린다. 벌어진 가슴에는 내의를 띠 매듭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두 손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보이는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에 얹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복부에 대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조금은 투박한 듯 보이지만, 안정감이 있다. 넓은 어깨와 부채꼴로 펼쳐진 법의 안에 가려진 결가부좌를 한 폭 넓은 발이 전체적인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 포초골 미륵좌상을 처음 답사한 것이 2004년 3월이었다.

 

광배로 인해 달라진 미륵좌상

 

2004년 3월에 포초골 미륵좌상을 찾았을 때는 전각이 지어졌으나 단청도 되지 않았었다. 당시 만나뵌 대성사의 주지스님은, 단청을 하고 나면 다시 한 번 찾아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12월 9일 오후, 남한강 정비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이포보로 인해 수몰 위기에 있는 양촌리를 답사 나갔다가, 내친 김에 가까이 있는 포초골 미륵을 찾아갔다.

 

그동안 대성사는 많은 불사를 하였다. 절의 경내 외각에는 대나무를 심어 한겨울에도 푸른색을 볼 수 있게 하였고, 종각도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산신각 앞에 있는 미륵좌상을 모신 용화전도 말끔하게 단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4년에는 보지 못했던 미륵좌상의 광배가 보인다. 얼핏 보면 제 것이 아닌 듯도 하다. 광배는 쇠로 미륵좌상과 전각 등에 연결을 시켜 놓았다.

 

 

미륵좌상을 촬영한 후 절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있는데, 주지스님이 나오신다. 광배가 없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거 예전에는 없었지. 그런데 산신각 앞에서 조각이 나서 발견이 되었어. 한 조각은 누가 집어갈까 봐 산신각 안에 보관을 해두었는데, 나머지가 그 앞을 정리하다가 나왔지."

"제 짝은 맞는 것인가요?"

"문화재위원들이 조사를 마쳤어. 밑 부분을 못 찾아서 쇠로 연결을 했지. 그것만 찾으면 쇠를 떼어내도 되는데."

 

광배는 윗부분에 불꽃을 조각했다. 그 불꽃의 모습이 힘차게 타오르는 듯하다. 광배의 뒤로 돌아가니 조각이 난 것을 붙인 부분이 보인다. 광배를 찾은 석불좌상이 전혀 달라 보인다. 이 석불좌상의 대좌 역시 땅 속에 묻힌 것을 찾았다고 들었다. 자칫 땅 속에 묻혀 볼 수 없었던 소중한 문화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 고맙기만 하다.

 

소중한 문화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

 

아침에 뉴스를 보니 4대강 유역에 문화재가, 지정 비지정을 합해 240점이 넘는다고 한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려면, 4대강 개발을 하루 빨리 멈춰야 한다. 보를 막고 물이 찬다면 수많은 문화유적이 사라진다. 그리고 자리를 옮긴다고 하면, 이미 그 문화재는 제 가치가 희석이 되는 것이다. 제 자리를 떠난 문화재들은 처음으로 조성될 때의 환경과 달라져 그 뜻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모탑은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서 있던 것을,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이 되었다가 3년 후인 1915년 반환되어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사를 할 때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6·25 동란 때 폭격을 받아 부수어졌던 것을 그 후 다시 맞추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탑이 제 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이런 수난을 당했을까? 결국 제자리를 못 찾은 소중한 문화재가 수난을 당하는데, 국가가 일조를 했다는 셈이다.

 

 

이번 4대강 정비로 인해 수많은 문화유적지가 수몰이 되고,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옮긴다면 이것은 문화재들의 집단 수난이다. 포초골 미륵좌상의 광배가 발굴되어 제 모습을 찾듯, 모든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더욱 가치가 있다.

 

숱하게 수탈당하고 밀반출하여, 외국으로 나간 문화재들을 찾아온다고 노력을 하는 이런 시기에, 정부가 4대강 정비라는 빌미로 문화재를 훼손시킨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다. 아마 이런 일을 주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언젠가는 나라의 정신이 되는 문화재를 훼손시킨 것만으로도 준엄한 역사의 질타를 받을 것이란 생각이다.


태그:#미륵좌상, #포초골, #대성사, #여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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