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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 48주년 특별기획 <선덕여왕>의 한 장면
 MBC 창사 48주년 특별기획 <선덕여왕>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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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아주 재미있게 보고 있는 애청자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 보는 눈이 탁월한 미실(고현정 분)에게 감탄하기도 하고, 나는 덕만(이요원 분)처럼 그릇이 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없어 보여 절망하기도 하고, 유신랑(엄태웅 분)처럼 우직하게 노력하면 나도 뭔가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한 가닥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드라마에서 유신과 복야회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뭔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드라마 속 유신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친일파들의 논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만 유별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 명이 나와 같은 생각을 말했다. 또 다른 동료도 같은 의견을 말했다. 나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야와 신라, 서로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가야를 고대에 잠깐 존재했다가 신라에 완전히 흡수된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다.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것은 가슴 아파하지만, 가야 따위는 망하거나 말거나 그닥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의 침략으로 멸망해서 일본 영토가 되었다면 모를까 우리의 또다른 조상 신라에게 흡수되어 결국은 우리의 영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김유신 장군이 금관가야 왕실의 후손이라는 사실, 가야 문화가 신라 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국사를 배워 알고는 있다. 하지만, 신라의 침략에 맞서 가야가 열심히 싸웠을 것이라는 것, 흡수된 가야인들이 신라에서 차별을 받았을 가능성 등은 가야사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 조상들 이야기니 우리 민족 내부의 사소한 갈등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라와 가야는 서로를 같은 민족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역사 수업자료 중에서 신라를 피고로 두고 모의재판을 하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검사는 신라가 당이라는 외부인을 끌어들여 한 형제인 고구려와 백제를 친 것은 민족적 반역 행위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우를 범하는 시각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우리의 조상이지만, 그 당시의 삼국은 서로를 타국으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들이 서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고 동질감이나 일체감을 가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고구려도 백제도 당도 모두 외국일 뿐이니 당과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든, 고구려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키든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작고 힘도 약하고 당에 저자세로 나간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지 말고, 강력하고 넓은 영토를 가졌으며 중국에도 당당했던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을 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라의 입장에서 이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자주 공격하던 골칫덩어리 백제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과거보다 두 배 가까이 늘릴 수 있게 해 준 당과의 동맹은 아주 탁월하고 훌륭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가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야인들 역시 신라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야가 신라에 흡수된 후 많은 이가 일본으로 망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 일본은 민족도 다르고 심리적 거리도 먼 외국이지만, 당시의 가야인에게는 신라보다는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던 것이다.

복야회 vs.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월야역의 주상욱
 월야역의 주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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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가야를 다시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복야회(復倻會)라는 단체가 등장한다. 처음에는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소품(?) 정도로 생각하고 바라보았는데, 이야기가 전개되어 갈수록 결코 편하게 볼 수 없는 소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복야회와 대가야의 왕손 월야의 실존 여부에 대한 역사적 고증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복야회의 모습에서 일제시대 독립 운동 단체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고, 월야(주상욱 분)와 설지(정호근 분)의 모습에서 고뇌하는 독립 운동가들의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불편했던 건 드라마 주인공 유신에게서 친일파들의 논리를 보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드라마 속의 월야는 가야의 부활을 꿈꾸고 가야의 부활을 위해 복야회를 이끈다. 드라마 속의 유신은 그런 월야를 꾸짖는다. 가야는 망한 지 오래된 나라이고 다시 부활할 수 없으니 신라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내게는 그의 이 말에 독립군을 고문하던 친일 경찰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이 미련한 놈. 조선이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는. 해방 이후에 태어나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조선-일제시대-대한민국 이라는 역사의 흐름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이나 사료를 읽어보면 조선은 언젠가 독립이 된다고 굳게 믿는 독립 운동가들이야말로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로 보일 지경이다. 일본은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 매우 강력했기에 이런 일본을 상대로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제시대 초기에는 이광수도 독립 운동가였다. 많은 이가 그랬었다. 그들은 1940년대가 될 즈음 대다수가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다. 이제는 식민지가 된 지 너무나 오래되었고, 일본이 너무나 강력하여 조선이 독립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일본의 일부분이 된 것은 현실이니 이제는 현실을 인정하고 일본 내에서 조선인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조선의 청년들에게 전쟁에 나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일본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조선의 청년들도 전쟁에 나가고 일본인들과 함께 피를 흘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 유신은 삼한일통의 대업에 가야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나름의 정연한 논리가 있었으나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친일파들의 변명과 너무나 유사한 논리였기 때문이다.

월야가 유신과 결별 후 복야회 산채에서 고민할 때 그도 이런 생각을 한다. 가야 유민들에게도 가야라는 나라보다 핍박받지 않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또다시 일제시대가 겹쳐 보였다. 우리가 조선인이면 어떻고 일본인이면 어떠리.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면 장땡 아닌가.

월야는 독립운동가, 유신은 친일파 아니 친신라파?

유신 역의 엄태웅
 유신 역의 엄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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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는 신라에 흡수되어 독립하지 못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가야가 신라로부터 다시 독립하여 지금까지 여러 왕조를 거치며 살아남았다면 어떨까? 그리고, 가야에 복야회라는 가야독립운동 단체가 있었고 그 수장이 월야였으며, 유신은 드라마와 똑같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가야의 역사 교과서는 월야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유신은 배신자, 반역자, 우리나라에서 친일파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친신라파로 기록하지 않을까?

작가는 신라도 가야도 우리의 조상이기에 망한 가야인은 신라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썼는지 모르겠다. 작가가 유신을 매우 우직하고 충성스러우며 올바른 캐릭터로 그리는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친일파들의 논리를 빌려와 유신의 입을 통해 내뱉게 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해방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지금까지도 그 족쇄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런 생각과 논리가 편할 수 없다.

내 동료는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되자 물타기를 하기 위해서인지 친북인명사전을 편찬하겠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이들이 행동을 시작하는 분위기인데, 이 드라마가 이런 논리를 대변해 주는 것 같다고.

개인적으로 나는 작가가 친일파를 옹호하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가의 전작들을 봐서도 그렇고,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한 에피소드들을 보아도 그렇다. 다만 작가가 전혀 의도하지 않더라도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이런 해석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서 언급하는 유신은 작가가 창조한 드라마 속의 등장인물인 유신이다.



태그:#선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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