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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로의 언덕길이 호젓하고 고요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 언덕길 월산로의 언덕길이 호젓하고 고요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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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초겨울? 가을과 겨울을 넘나드는 날씨의 변화는 때론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리게도, 차분히 가라앉히게도 하는 모양일 게다. 며칠 새 추웠던 날씨 탓인지 안개가 흐릿하게 자욱한 일요일 아침, 옷깃을 여미고서 어디론가 바삐 혹은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런 느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고양시)에 걷기여행에 좋은 작은 길, 지역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명상과 소통의 길을 열기 위해 모인 <고양올레> 사람들이 일요일 걷기여행을 위해 하나 둘씩 약속한 장소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매번 토요일에 걷기모임을 하다보니 토요일에도 일을 하는 사람들에겐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었기에 처음으로 일요일 걷기여행을 제안했고, 그에 동의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걷기로 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사내들로만 이루어진 11인의 올레꾼들이 만나 걸었다.
▲ 11인의 뚜벅이 올레꾼들 공교롭게도 사내들로만 이루어진 11인의 올레꾼들이 만나 걸었다.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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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대여섯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꼬마 녀석들을 포함해 열 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축구팀이라면 후보 선수 없이 꼭 한 팀을 꾸릴 수 있는 뚜벅이 올레꾼 11인은 공교롭게도 모두 사내들이었다. 물론 우연이었지만 사내들만의 걷기여행은 매우 이색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걷기여행 길에서 처음 만나는 반가운 사람들, 아빠를 따라 나선 초등학생 꼬마 녀석들, 일요일 걷기여행을 애타게 원하며 기다려 왔던 분들, 그 밖에 몇몇의 다른 이들. 그 누구도 옆 사람의 강요와 권유에 의해 자신의 금쪽같은 일요일 휴식을 포기하고 모인 사람은 없어보였다.

토종닭 집 음식점 앞에서 만난 닭과 벤치
▲ 올레길에서 만난 닭 토종닭 집 음식점 앞에서 만난 닭과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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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동안의 얼굴 익히기와 따뜻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하고서 지하철 원당역을 출발하여 원흥동, 원신동, 신원동으로 이어지는 걷기여행을 시작했다.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걸으며 더욱 깊숙한 인사를 나누었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어떻게 알고 참여하게 되었는지,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원한 바람을 상쾌하게 가슴에 받아 안으며 들길, 오솔길을 걸어 나누는 이야기는 자칫 어색할 수 있는 뻣뻣한 사내들 간의 서툰 만남을 부드럽고 친하게 만들어 주었다.

도토리나무 숲 낮은 언덕을 가르는 한적한 오솔길을 지났고, 왕릉의 숲에서 가늘게 발원한 효릉천이 제 갈 길을 찾아 졸졸 흐르는 지점을 스치듯 지났다. 다시 효릉천이 왕릉천과 만나 곡릉천으로 얽히고 섞여 합수되는 삼각수의 지점을 천천히 지나칠 수 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몸 속의 가는 혈관과 같은 각각의 실개천이 차분하고 온유한 흐름을 보이며 좀 더 굵은 혈관으로 자연스럽게 모이며 합쳐지는 것 같은 광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효릉천이 왕릉천과 만나 곡릉천으로 합수하여 흐르는 곳의 둑길을 걸었다.
▲ 둑길을 걷다. 효릉천이 왕릉천과 만나 곡릉천으로 합수하여 흐르는 곳의 둑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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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무심코 걸으며 작은 하천들의 그 개별적 자유와 순조로운 통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천의 둑길을 걸으며 길이 알려주는 물 같은 자유와 통합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어 좋았다. 길은 그냥 앞을 향해 사람이 지나쳐간 흐릿한 흔적만을 품은 초라한 흙과 돌과 풀이 깔린 땅일 뿐인데... 우리는 그 길 위에서 평소 한 권의 두툼한 철학서적 속에서도 어쩌면 깨닫지 못했음직한 함께 살아감의 철학을 배울 수 있으니 새삼 뿌듯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때론 아이들이 앞서 걸었고, 뒤를 쫒는 어른들의 발 빠른 걸음이 서둘러 질 때면 아이들이 조금씩 뒤처지기도 했다. 햇빛이 귀한 응달을 지날 때는 채 녹지 않고 남아 있던 엊그제 내린 흰 소금 같은 잔설을 구경할 수도 있었고, 길가 한 쪽에 다소곳이 서 있는 토종 감나무 한 그루의 정감 어린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주황색 물방울 같은 작은 토종감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 길에서 만난 토종 감나무 주황색 물방울 같은 작은 토종감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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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면서 눈으로 감상했고, 걸으면서 가슴을 열어 길이 우리에게 나눠주는 착하고 순박한 모성의 품성을 차곡차곡 주워 담았다. 굽이굽이 낮은 언덕을 휘감아 오르는 월산로 언덕길을 따라 어른과 아이로 구성된 11인의 뚜벅이 올레꾼들은 길을 누렸고, 마음껏 길을 만끽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걸으면서 스스로의 마음속에 억지스럽게 채워진 허상의 욕심을 비울 수도 있었을 테고,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긴장을 털어내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월산대군과 그의 부인 승평대부인 박씨의 무덤 앞에서
▲ 월산대군 묘 월산대군과 그의 부인 승평대부인 박씨의 무덤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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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나무 낙엽이 수북한 월산대군의 후손 종친묘역에 들러 그 자리에 남아 증거하고 있는 오래 전 역사를 상상하며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었다. 이채롭게 수염이 조각된 문인상이 있는 묘역을 살폈고, 그 아래 자리 잡은 월산대군의 사당 '석광사'를 가볍게 스쳐 지나쳤다. 건너편에 있는 월산대군의 묘에 들러 조선 전기 대표적인 대군묘의 형식을 살필 수 있었고, 마치 남편의 묘 뒤에 숨어 있는 듯 자리 잡고 있는 승평대부인 박씨의 묘를 보며 잠시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모성결핍이었던 조카, 주색잡기에 빠진 폭군 연산군에게 겁탈을 당해 스스로 자결을 했다고도 전해지는 승평대부인 박씨의 묘소는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우리가 사는 지역의 길을 걸으며 길가 곳곳에 남아 있는 우리 역사의 잔영을 되짚어 보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역사란 배움이 되기도 하고, 교훈이 되기도 하며, 내일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삼라만상 오만 가지의 존재들이 무수한 관계를 맺고 어우러져 혼돈으로 살아가는 '인드라망'의 세계는 모든 존재들의 상생과 공존의 원리가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으로 작동되는 우주이다. 그러니 그 우주의 한복판인 길 위에서 누구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생각은 그야말로 허튼 생각일 뿐이다.

월산대군 종친 묘역에 있는 문인석상의 얼굴에 특이하게도 수염이 조각되어 있다.
▲ 수염 달린 문인상 월산대군 종친 묘역에 있는 문인석상의 얼굴에 특이하게도 수염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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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마을 송강문학관(효체험관) 뒤편에 스산하게 자리 잡은 송강의 애첩 '강아'의 묘
▲ 송강의 애첩이었던 '강아'의 묘 송강마을 송강문학관(효체험관) 뒤편에 스산하게 자리 잡은 송강의 애첩 '강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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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생각을 접고서 다시금 정해진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원신동에서 벽제로 넘어가는 '벽제교'를 조금 못 미쳐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대문장가인 송강 '정철' 선생의 삶의 흔적이 있는 '송강마을'을 지나칠 수 있었다. 비록 시간이 여유롭지 못하여 송강마을에 있는 정철 선생의 애첩이었던 의기 '강아'의 무덤도 들르지 못하고, 그 옆에 있는 송강의 형님(정황)의 딸이자 선조의 후궁이었던 귀인 정씨의 무덤도 들러 살필 수는 없었지만, 우리 일행은 걸으면서 아쉽게나마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서로 나누었다.

얼마 후 드디어 갈대밭이 넓고 길게 펼쳐진 곡릉천의 본류가 흐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곡릉천에는 북동쪽의 작은 지천인 벽제천이 합류하여 하천의 폭을 자연스레 넓히고 있었고, 무엇보다 꽤 많은 철새들이 물 위에서, 물가에서 헤엄치며 쉬고 있었다. 갈대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11인의 뚜벅이 올레꾼들은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곡릉천의 풍경에 누구랄 것 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수많은 흰 뺨 검둥오리와 기러기, 외가리와 백로, 까마귀와 까치, 그 밖에 작고 귀여운 물떼새 등등.

한 쪽에는 철새들 노니는 곡릉천이, 반대쪽에는 훤칠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뒤로는 북한산의 주봉들이 아름답게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 아름다운 곡릉천길 한 쪽에는 철새들 노니는 곡릉천이, 반대쪽에는 훤칠한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뒤로는 북한산의 주봉들이 아름답게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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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환호했다. 덩달아 어른들도 더욱 환호하며 놀라워했다. 이 곡릉천에 이렇게 많은 새가 있을 줄이야. 다들 놀라며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아름다운 곡릉천 갈대밭을 걸으며 사람들은 정말 행복해 하는 모습으로 길을 누리고 있었다. 저 멀리 뒤편에는 북한산의 주봉들이 은은하고 너그러운 모습으로 병풍처럼 서서 충만한 느낌으로 다부지게 걷고 있는 우리들 11인의 뚜벅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철새들이 노니는 물가를 따라 갈대는 포근하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훤칠하게 키 큰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병정들처럼 줄지어 서서 그림처럼 있었다. 오늘 우리들 일행 중에 만일 복잡하고 거친 마음을 가지고 온 이가 있다면 지금의 이 풍광에 자기도 몰래 스며들어 저절로 설탕처럼 녹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런 생각이 들었다.

11인의 뚜벅이 올레꾼들은 자갈과 풀들이 한데 어우러져 푹신하게 깔려 있는 아름다운 곡릉천 갈대밭 오솔길을 걸으며 멀쩡한 두 다리로 이렇게 걸을 수 있음에 감동했고, 사람들과 함께 걸어 동행하며 이야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음에 고마워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에너지와 풍부한 감성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것 같은 스스로의 가슴을 보듬으며 만족해하는 모습이  꼭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약 13km를 뚜벅뚜벅 걸어 오늘 걸음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 뚜벅이들의 걷기 약 13km를 뚜벅뚜벅 걸어 오늘 걸음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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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걷기로 한 종착지쯤에 도착할 무렵, 하늘에는 기러기와 오리 떼가 환상적인 몸짓으로 날며 11인의 사내들이 쉴 틈 없이 걸어온 13km 걷기여행의 최후를 환상적으로 축하해 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1월 22일에 세 번째 걷기모임을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고양올레'는 고양시에 걷기좋은 작은 길을 개척하는 <고양올레> 카페를 cafe.daum.net/gyolleh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태그:#고양올레, #고양시, #고양올레길, #곡릉천 길, #고양올레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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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에 걷기 좋은 길을 개척하기 위한 모임으로 다음 카페 <고양올레>를 운영하는 카페지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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