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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은행잎을 물들이는 게 아니라 은행잎이 가을을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영랑 생가 입구에 서서, 시(詩)를 낭독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지난 15일, 전남 강진군 영랑 김윤식 생가 '가족 시(詩) 기행'에서 시를 읽고 생가로 들어섰습니다. 마당에는 잎은 하나도 없고, 마른 줄기만 남은 모란이 있었습니다.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그게 모란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이를 보고 초등생 딸아이가 느낌을 말하더군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란 시를 여기서 처음 보고, 정원에 앙상하게 있는 모란을 보니 <모란이…>란 시가 이 모란을 보고 쓴 글인 걸 알겠어요. 모란이 가지만 남았지만 왠지 위엄 있고 멋있게 느껴져요."

 

 

감성이 너무 놀라운 <오-매 단풍 들것네>

 

김영랑은 1930년 정지용ㆍ박용철ㆍ이하윤ㆍ정인보 등과 함께 <시문학>지를 창간, 30여 편의 시를 발표했습니다. 1934년 4월, <문학>지 3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발표했지요. 1935년에는 <영랑시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1950년 9월 47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저는 "누나가 장독을 열 때 단풍진 감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오-매 단풍 들것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썼다"는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란 시를 좋아합니다. 감성이 너무 놀랍기 때문입니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이 시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나오는 길에 김영랑 시비(詩碑)를 보았습니다.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돌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을 살프시젖는 물결가치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이를 보고 초등생 아들 녀석 하는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와 우습다. 아빠, 맞춤법이 틀렸어요."

"옛날에는 저렇게 썼어. 맞춤법도 세월이 가면서 바뀌고 변했어."

"맞춤법이 달라 어색하지만 이 시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생가에 가서 뭔지 모를 좋은 느낌이 들었다."

 

김영랑 생가에 다녀온 후, 아이들에게 '김영랑 시 기행' 소감을 쓰도록 했습니다. 녀석들 "단순 여행인 줄 알고 부담가지지 않았는데 망했다"며 엄살이더군요. 아들 녀석 소감입니다.

 

"생가에 가서 뭔지 모를 좋은 느낌이 들었다. 김영랑 선생님처럼 아름다운 시를 써봐야겠다. 소박한 시지만 뜻은 소박하지 않고 아름다웠다."

 

여기까진 정형화(?)된 아이들 느낌입니다. 그런데 생가 앞에 있던 탑골 우물을 본 소감이 기가 차더군요.

 

"더러운 우물을 보고 옛날에 그걸 먹고 살았다니 너무 힘들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다음과 SBS U포터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영랑 생가, #강진, #모란 시인 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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