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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인간은 언어로 소통한다. '언어', 그것은 단지 글자로 표현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똑같은 말이라도 억양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동시에 말을 듣는 사람 처지에서도 같은 말이 다르게 들리기도 하다. 언어로 소통하지만, 언어로 말미암아 오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언어의 한계요, 결국 말로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대화해야 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가끔씩 바다가 화를 내지만,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 성난 바다 가끔씩 바다가 화를 내지만,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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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들은 끊임없이 인간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왔다.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신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피조물 안에 신의 언어를 담아놓으셨던 것이다. 인간이 자기 욕심에 빠져 살지 않을 때에는 자연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자기 욕심에 깊이 빠져 이기적인 삶을 추구하는 만큼 자연과 소통하는 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런 단절이 깊어지면서 이젠 자연과 소통한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사는 것이다.

'소통'이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다.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강압이다. 강압에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아픔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순간, 사라짐(생명의 소멸)으로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를 남긴다. 때론 몸부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소통하자고 호소하기도 한다. 지구 위에서 하루에도 수십 종씩 사라지는 동식물들과 지진과 해일 같은 것은 인간을 향한 자연의 최후통첩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을 향하여 일방통행하는 인간을 향해 "너희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라!" 자연이 소리치는 것이다.

가만가만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그들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 청개구리 가만가만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그들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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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연은 대부분 세미한 소리로 평화롭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다가온다. 맨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사랑하는 연인의 속삭임처럼 다가온다. 너무 잔잔하고 고요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을 수 없고, 사랑하는 연인에게나 들려주는 이야기 같아서 사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지만 가만가만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면 그들은 수다쟁이가 되어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과 자연보호와는 다른 면면들이 있다.
▲ 꽃을 든 아이 자연을 사랑한다는 것과 자연보호와는 다른 면면들이 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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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추상적인가? 그것이 그냥 내 안에 있는 어떤 의식들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발로되는 현상이라고만 생각되는가? 아니, 그들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혹은 깨닫지 못하는 것들을 아주 쉬운 방식으로 깨우쳐준다. 단지 그것을 말로 혹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 부끄러움의 단계에 들어서면 자연과 소통하는 시작이다. 자연을 향하여 그 이전과 똑같은 행위를 하지만 전혀 다른 관계로 살아가게 된다. 꽃 한 송이 꺾는 일도 자연에 아픔을 주는 일이 아니라 자연이 기꺼이 "나를 꺾어 사랑하는 이에게 전해 주렴!" 하는 단계에 이른다는 말이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그들은 자기의 빛깔을 낸다.
▲ 말미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그들은 자기의 빛깔을 낸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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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들은 인간의 욕심을 그대로 잉태한다.

GMO(유전자조작) 식품은 물론이요, 육가공을 위해 사육되는 가금류, 가축들 속에는 인간의 욕심이 들어 있다. 그들은 어쩌면 인간의 욕심을 그대로 품고, 다시 인간에게 돌아감으로써 인간에게 비수를 던지는 것이다. 자신들이 망가짐으로써 결국에는 그들을 망가뜨리는 존재를 망가뜨리는, 그래서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그들의 소통방식이다. 자연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지만, 인간 없는 자연은 오히려 더 풍성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가가는 만큼 자연은 신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 물방울 우리가 다가가는 만큼 자연은 신비한 모습을 보여준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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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들은 인간이 다가가는 만큼 다가온다.

자연은 누구에게나 말을 걸지만, 누구나 듣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다가간 사람들만이 그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의도적일 수도 있고, 우연한 기회에 받는 선물일 수도 있다. 내게는 자연이 먼저 다가왔다. 그 후에 내가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은 또 내가 다가간 만큼 내게로 왔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나 양지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양지꽃 양지바른 곳에 피어나 양지꽃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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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추위가 끝나갈 무렵, 새벽기도를 마치고 산책을 하는 중 우연히 양지에 피어난 노란 양지꽃을 보게 되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양지꽃일까 생각하니 적어도 어린 시절 뒷동산에서 뛰놀며 본 이후 처음이니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시간 동안 내 안에 양지꽃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누가 봐주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모습 그대로 이른 봄 양지바른 곳에서 피고 지기를 쉬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남들에게 잊혀 지면 슬퍼하고, 인정받지 못해 안달하는 내 모습을 돌아보며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가만히 앉아 양지꽃 주변 한 평도 되지 않는 흙에 뿌리를 내린 들풀들을 하나 둘 세어보니 무려 삼십 종이 넘었다.

그런데 내가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두세 개였다. 그때부터 나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시작했다. 김춘수 시인의 시구처럼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들은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 그것이 그들과 나의 대화가 시작된 첫걸음이었다. 그 후 그들은 내가 다가가는 만큼 내게 다가왔고, 내가 멀어지는 만큼 멀어졌다.

깊은 산 속을 걸어갈 때에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보면 지나쳤던 꽃이 방긋 인사를 하고 있었고, 어떤 때는 환청처럼 그들이 들려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다가간 만큼 그들은 내게로 다가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었다.

피어나는 꽃 한 송이, 그것은 희망의 소리다.
▲ 구절초 피어나는 꽃 한 송이, 그것은 희망의 소리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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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그들은 희망의 언어로 다가온다.

자연의 언어는 그것이 무서운 경고라고 할지라도 궁극에는 희망으로 마친다. 자신이 죽어가는 순간에도 '지금이라도 너희가 돌이키면'이라는 단서를 단다. 그래서 자연의 언어는 희망의 언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들이 희망만 말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가 없다. 최근 이 나라를 휩쓰는 개발 광풍은 너무도 무지막지하기 때문이다. 개발 광풍을 이끄는 이들은 '살린다!'라고 하지만 그것이 속 빈말임은 그 현장에서 자연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긴 세월, 강이 왜 구불구불 흘렀는지도 왜 강 깊은 곳이 있고 낮은 곳이 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그들에게 일언반구 한 마디 묻지도 않고 강을 살리겠다고 한다.

자연과의 소통 부재, 자연이 어떤 말을 해도 자기 이익에 귀가 먼 이들에게 들릴 리 없으니 자연도 침묵한다. 일종의 침묵시위다. 인간에게 재앙으로 다가오지 않고, 아직은 침묵을 지키는 것 그것은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그들의 인내가 남아있을 때 돌이켜야 할 터인데 돌이킬 것 같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들이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듣는 이들이 이 땅 어딘가에는 있기에 자연은 여전히 말을 걸어온다.*


태그:#자연, #언어,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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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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